"변방 속초에 연극문화 심은 '이반 작가' 기려 희곡집 냈어요"

김경애 2022. 8. 4.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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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짬] 강원 고성 오봉교회 장석근 목사

강원도 고성 오봉교회의 장근석 목사가 지난 7월17일 앞마당에서 야외 예배를 진행하고 있다. 그 뒤편으로 한옥 민속문화재인 왕곡마을의 초가지붕이 보인다. 김경애 기자

강원 고성군 죽왕면 오봉리, 송지호의 서쪽 옛길을 따라가다 보면 소담한 북방식 전통한옥과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왕곡마을이 나온다. 고려말 이성계의 조선건국에 반대한 두문동 72현 가운데 양근 함씨 후손들이 은거하면서 생겨난 집성촌이라고 한다. 지난 2000년 국가민속문화재(제235호)로 지정된 이 마을에는 한옥 교회당이 눈길을 끄는 오래된 교회가 자리하고 있다. 해발 200미터 안팎의 작은 봉우리 다섯 개에 둘러싸인 오봉골에서 이름을 얻은 오봉교회(기독교대한감리교)로, 1919년 인근 간성교회를 다니던 김정섭 속장의 기도처로 시작해 올해 103돌을 맞았다.

지난달 17일 마침 일요일이어서 마당에서 예배를 올리고 있었다. 40~50명의 신도들이 위아랫채 한옥의 툇마루에 자유롭게 앉아 설교를 들었다.

“우리 교회와 인연이 깊은 장로이자 극작가 고 이반 선생님의 작품 <그날, 그날에>를 속초 지역의 극단 파·람·불이 오는 12~14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공연을 하게 됐어요. 그런데 제작비가 모자라 애를 태우고 있어서 조금이나마 힘을 보탰으면 해요.”

설교를 마친 담임 장석근(65) 목사가 내민 것은 교회 자료가 아니라 뜻밖에도 자신이 엮은 <그날, 그날에> 추모희곡집이었다. 예배를 마친 뒤 한 신도가 갓 수확해서 가져온 찐옥수수를 점심으로 나눠 먹으며 그 사연을 들어봤다.

1990년대초 고성 핵폐기장 건설 반대
생태환경운동 통해 이반 작가와 인연
2008년 고성 정착 이 작가 2018년 별세

지난 7월17일 강원도 고성 왕곡마을의 오봉교회 신도들이 한옥 건물의 툇마루에 앉아 일요 예배를 올리고 있다. 1919년 세워진 이 교회는 2012년 문화재청에서 한옥으로 재건축했다. 김경애 기자
왕곡마을 쪽에서 들어가는 오봉교회 입구에 세워진, 하늘 맞닿은 나무십자가. 이 교회에는 담장도 첨탑도 없다. 김경애 기자
지난달 17일 일요예배를 마친 오봉교회 신도들은 갓 수확한 찐옥수수를 점심으로 나눠 먹었다. 김경애 기자

2020년 지역극단 연합공연 ‘그날, 그날에’
12~14일 서울 예술의전당 재공연
모자란 제작비 보태려 희곡집 직접 엮어

고 이반 작가 극본과 변유정 연출로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공연하는 <그날, 그날에> 포스터. 극단 파·람·불 제공

우선 오봉교회와 장 목사의 이력이 궁금했다. “양양에서 태어나 속초에서 자랐어요. 모태신앙자로 1980년 목원대 신학과에 입학해 1984년 오봉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시작했죠. 그때만 해도 차편도 없는 오지인데다 신도도 20명 남짓이어서 목회자들이 기피하는 곳이었어요. 당연히 도시의 큰 교회에서 지원을 받아 명맥을 잇고 있었죠. 부임 했을 때 최저생계비도 받기 어려웠지만, 외부 지원을 거부했어요. 그랬더니 외려 교인들이 책임감을 갖고 자립을 위해 힘을 모으더라고요. 어언 42년째 지금도 예배 때 50~60명쯤 모이지만, 그나마 인근 지역에서 일부러 찾아오는 교회가 됐지요.”

장 목사는 “이제는 젊은 목회자들이 선호하는 교회로 꼽힌다”고 자랑했다. 지난 2012년 문화재청에서 워낙 벽돌 건물이던 교회당을 한옥으로 지어주면서 명소로 소문난 덕분이기도 하단다.

고 이반(본명 이명수) 극작가는 함남 홍원군에서 태어나 1951년 속초로 피난을 왔고 숭실대에서 석·박사를 거쳐 스웨덴 웁살라대학에서 유학한 뒤 모교에 문예창작학과를 창설했다. 1966년부터 작가로 활동해 수많은 희곡상을 받는 한편 1976년 극단 현대극장 창단에 참여해 연극의 현대화운동에 나서 국제연극협회 한국본부 희곡분과위원장, 한국국제아동청소년연극협회 이사장, 동북아시아 기독작가회의 한국회장 등을 지냈다. 2008년 교수 정년 퇴임 이후 귀향해 속초예총 회장으로 활동하며 2018년 별세할 때까지 속초지역 문화예술 발전을 위해 헌신했다.

“이반 선생님과는 1990년대 초반 고성 핵폐기장 건설 반대를 계기로 생태환경운동을 하면서 만나게 됐어요. 목원대 시절 대전맹학교에서 목회 실습 때 시각장애인 녹음도서 1천부를 제작하면서 이오덕·권정생 선생님의 도움을 받았는데, 두 분과 이반 선생님의 친분이 깊었어요. 속초고 선후배이기도 해서, 1994년 매립위기에 놓인 ‘청초호 되살리기 시민모임’ 운동 때 동참을 해주셨죠.”

감리교단의 생태목회운동에도 앞장서온 장 목사는 1996년 속초고성양양 환경운동연합 창립 때부터 공동의장을 맡았다. 고 이반 작가는 귀향한 뒤 속초고성양양 환경운동연합의 고문으로 힘을 보탰는데, 지금은 장 목사가 고문 자리를 잇고 있단다.

“귀향 초기 속초에서 지내던 이반 선생님께서 부인(한순자)과 함께 2010년께 왕곡마을의 한옥을 구해 정착하면서 오봉교회에 나오셨어요. 장로였던 선생님은 생전에 여러 작품으로 크리스천 문협상, 기독교 문화대상, 기독교문화대상 등도 받았고, 한국루터란아워 이사장을 맡을 정도로 신앙이 돈독하셨 거든요. 권정생 선생의 소설 <한티재 하늘>을 희곡으로 각색한 ‘한티재’로 교인들이 출연하는 낭독공연을 열기도 했죠.”

고 이반 작가와 한순자씨 부부가 지난 2010년께 정착한 고성 왕곡마을의 한옥 ‘반시제’. 감나무가 많은 마을이어서 자신의 예명 ‘반’(베드로)에 감 ‘시’를 붙여 직접 지은 이름이다. 장석근 목사가 현판을 만들어 걸었다. 김경애 기자
생전의 이반(오른쪽) 작가와 변유정 감독. 두번째 만남이었던 2015~16년 겨울 이 자리에서 이 작가는 변 감독에게 <카운터 포인트> 연출을 요청했다. 변유정 감독 제공

오는 12~14일 서초동 예술의전당 씨제이(CJ)토월극장에서 공연할 <그날, 그날에>의 연출을 맡은 변유정 감독이 이반 작가를 처음 알게 된 것도 오봉교회의 <한티재> 낭독공연 때였다. 그뒤 2016년 이반 작가의 적극 권유를 받아 변 감독은 연극협회 속초지부(3개 극단 청봉, 파·람·불, 소울시어터) 연합공연으로 <카운터 포인트>를 연출했고, ‘제1회 대한민국연극제’ 금상을 수상했다. 이어 2020년에는 고인을 기려 <그날, 그날에>를 무대에 올려 지역 극단으로는 최초로 ‘대한민국연극대상’을 거머쥐기도 했다.

“북녘의 고향을 잊지 못하는 실향민의 이야기를 통해 분단상황을 성찰한 <그날, 그날에>는 이반 선생님의 자전적 이야기가 담긴 대표작이죠. 올해 예술의전당 지역 우수작품 초청 공모사업에 선정된 덕분에 국내 최고의 무대에서 선보일 기회가 생기니 선생님이 새삼 그리워요.”

4일 전화로 인터뷰한 변 감독은 지역 연극계의 숙원사업인속초시립극단 창단에도 이번 서울 공연이 긍정적인 계기가 되기를 기대했다.

“파·람·불 극단을 이끌고 있는 석경환·김강석씨를 비롯한 단원들 대부분이 어릴 때부터 교회와 직간접으로 인연이 있는 사이여서, 온갖 생업을 하면서도 연극 열정을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지켜봐왔어요. 변방이지만, 연극 수준만큼은 전국 어느 곳보다 높다고 자부합니다.”

실제로 이번 공연을 위해 속초문화관광재단은 물론 최윤 강원민주재단 이사장 등 시민들도 후원에 적극 나서고 있다고 장 목사는 소개했다. 희곡집은 공연장을 찾은 관객들에게 판매될 예정이다. 공연 문의 (010)2785-5991.

글·사진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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