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루섬의 영웅들을 잊지 않겠습니다"

이삭 기자 2022. 8. 4.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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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전 단양 남한강 홍수..희생과 헌신으로 생명 구한 '기적의 현장' 다시 찾은 생존자들
지난 2일 충북 단양역 앞에서 시루섬 주민들이 섬을 바라보며 50년 전 홍수가 났던 상황을 회상하고 있다(왼쪽 사진). 단양군 남한강 한가운데 자리 잡은 시루섬은 한때 23만8016㎡ 면적에 주민 250여명이 살던 비옥한 곳이었지만 1985년 충주댐 건설로 대부분 물에 잠겨 있다. 이삭 기자·단양군 제공
주민 198명이 지름 5m 물탱크 올라가 팔짱 끼고 하룻밤 버텨
19일 60여명 초청 행사…지난달엔 당시 상황 재현 ‘생존 실험’도

“50년 전 그날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충북 단양군에 거주하는 노진국씨(78)는 단양역 인근 공터에서 잡초가 가득한 황무지 섬인 시루섬을 내려다보며 이처럼 말했다. 남한강 한가운데 자리 잡은 시루섬은 현재 6만㎡ 크기의 작은 섬이지만 1985년 충주댐 건설 전까지는 23만8016㎡ 면적에 토지가 비옥해 한때 주민 250여명이 살았던 곳이다. 이 평화로운 마을은 태풍 ‘베티’가 찾아온 1972년 8월19일 섬이 모두 물에 잠기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겪었다. 당시 주민들은 헌신과 희생정신으로 인명피해를 최소화했는데 주민들은 이 일을 ‘시루섬의 기적’이라고 부른다.

노씨는 당시 생존자 중 한 명이다. 노씨는 “그날 시루섬은 평소와 같았다”며 “아침 일찍 밥을 먹고 물고기를 잡으러 강으로 향했다”고 말했다. 그는 무릎까지 올라오는 강에서 낚시를 하다 물이 조금씩 불기 시작하자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다.

노씨는 “물이 불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이장에게 알렸다”며 “면사무소에 전화해 ‘섬이 위기에 처했다. 사람들을 구해달라’며 구조요청을 보냈다”고 말했다. 1971년까지 증도리 이장을 맡았던 이몽수씨(83)도 “당시 마을 곳곳을 돌아다니며 주민들을 대피시켰다”고 밝혔다.

주민들은 마을에서 가장 높은 장소로 대피했다. 이곳에는 소나무 40~50그루와 마을 주민들이 상수도로 쓰는 물을 저장하던 높이 6m, 지름 5m의 물탱크가 있었다.

1972년 8월19일 태풍 피해 당시 시루섬 마을 주민들이 올라가 몸을 피한 물탱크 모습(왼쪽 사진). 50년 후인 지난 7월21일 단양읍 문화체육센터에서 단양중 학생 197명이 시루섬 모형 물탱크에 올라가 버티는 실험을 하고 있다. 단양군 제공

이씨는 “물이 허리까지 차오르자 청년들이 사다리를 놓고 물탱크에 노인과 어린이를 먼저 올려보냈다”고 말했다. 이때 물탱크에 올라간 주민은 모두 198명이다. 나머지 주민들은 소나무에 매달려 몸을 피했다.

물탱크에 올라선 청년들은 주민들이 밖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서로 팔짱을 끼고 14시간을 버텼다. 당시 태풍 베티로 전국에서 550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됐다. 반면 시루섬에서는 물탱크에서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숨진 갓난아기를 포함해 8명이 숨졌다.

노씨는 “다음날 새벽 5시쯤 물이 빠지면서 물탱크에서 내려오니 갓난아기의 머리가 싸늘했다. 아기 어머니는 아기의 사망 사실이 알려지면 주변 사람들이 동요할까봐 조용히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시루섬 이야기는 2017년 단양역 국도변 수양개유적로에 조성된 ‘시루섬의 기적’ 소공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곳에는 젊은 여인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갓난아기를 안고 있는 동상과 서로 꼭 붙어선 채 단단히 스크럼을 짠 주민들의 모습을 표현한 동판 등을 담은 조형물이 있다.

단양군은 오는 19일 시루섬이 내려다보이는 증도리 단양역 광장에서 ‘1972. 8. 19. 시루섬 영웅들의 이야기’라는 이름의 행사를 연다. 행사에는 생존자 60여명이 함께한다. 앞서 지난달 21일에는 단양읍 문화체육센터에서 중학생 200명이 참여해 이 중 197명이 시루섬 모형 물탱크에 올라가 3분 동안 버티는 생존 실험을 했다.

올해 취임한 김문근 단양군수는 부군수 시절인 2014년부터 시루섬 관련 자료와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꾸준히 수집하고 있다. 김 군수는 이 자료를 모아 조만간 책을 발간할 계획이다. 단양군은 또 사업비 190억원을 들여 단양역에서 시루섬을 거쳐 맞은편 남한강변을 잇는 길이 600여m, 폭 1.5m 현수교를 만들기로 했다. 다리 이름은 ‘기적의 다리’다. 다리에는 탐방객들이 시루섬에 내려갈 수 있는 길도 낸다.

김상철 단양군 문화예술팀장은 “김 군수가 부군수로 재직하던 2014년 지역주민의 이야기를 듣고 관심을 가져온 것으로 안다”며 “위기 속에서 꽃핀 주민들의 헌신과 희생정신을 단양군이 이어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삭 기자 isak84@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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