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펠로시號' 대만 상륙에 동북아 초긴장
(시사저널=모종혁 중국 통신원)
8월2일 밤 10시43분(현지시간) 대만 타이베이 쑹산공항에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 일행이 탑승한 C-40C 전용기가 착륙했다. 전용기에서 내린 펠로시 일행은 모두 마스크를 착용했으나 약간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같은 시간, 대만 상공에서는 전투기들이 굉음을 내며 항공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밤 8시 일본 오키나와 미군 가데나 기지에서 전투기 8대와 공중급유기 5대가 잇따라 이륙해 남쪽으로 향했다. 일본 NHK는 "이 군용기들이 펠로시 의장이 탄 전용기를 지원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것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밤 10시 중국 전투기 여러 대가 대만 방공식별구역(ADIZ)에 침입했다. 중국 국영 CCTV는 "이 기체가 4.5세대급 전투기인 Su-35"라고 보도했다. 이에 대해 대만 국방부는 "중국 전투기가 ADIZ에 침입한 것은 사실"이라고 밝혔다. 대만 국방부는 이튿날 브리핑을 통해 "2일 밤에만 21대의 각종 중국 군용기가 대만 남서쪽 상공을 침범했다"고 밝혔다.
"대만 지키려는 미국 결의 여전히 철통같다"
이렇듯 위험한 상황에서 시작된 펠로시 의장의 대만 방문은 비교적 순조로웠다. 8월3일 오전에는 대만 입법원을 찾았다. 입법원은 한국의 국회에 해당한다. 펠로시 의장은 "대만은 세계에서 가장 자유로운 나라 중 한 곳"이라며 "우리는 대만과 의회 간 교류를 늘리길 원한다"고 말했다. 다음으로는 총통부를 찾았다. 펠로시 의장은 1997년 뉴트 깅그리치 하원의장 이후 25년 만에 대만을 찾은 미국 최고위 지도자다.
그래서인지 펠로시 의장을 맞이하는 차이잉원 총통의 모습은 아주 밝았다. 차이 총통은 펠로시에게 외국인에게 주는 최고 등급의 특종대수경운 훈장을 수여하며 "펠로시 의장은 대만의 가장 굳건한 친구"라고 치하했다. 이에 화답하듯 펠로시도 "우리는 대만과의 약속을 저버리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 대만에 왔다"고 밝혔다. 또한 "대만과 세계 다른 지역의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미국의 결의는 여전히 철통같다"고 말했다. 두 사람의 화기애애한 회견은 대만 전역으로 생중계됐다. 이를 '지켜본 이들'은 또 있었으니, 바로 중국이었다.
중국은 펠로시 의장의 대만 방문에 그 어느 때보다 분노했다. 외교부는 펠로시가 대만에 도착하자마자 심야에 니컬러스 번스 주중 미국대사를 초치했다. 이 자리에서 셰펑 부부장은 "펠로시 의장은 '하나의 중국' 원칙과 3대 중·미 공동성명 규정을 심각하게 위반했다"고 비난했다. 또한 "행위의 성질이 극도로 악랄하고 후과는 엄중하다"며 "불장난을 하면 반드시 불에 타 죽는다"고 경고했다. '불장난'과 '불에 타 죽는다'는 7월28일 시진핑 국가주석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통화하면서 썼던 표현인데, 이를 되풀이 한 것이다.
8월3일 펠로시 의장의 대만 일정 중에는 왕이 중국 외교부장이 직접 나섰다. 왕 부장도 "우리는 반드시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것이며 결연히 반격할 것"이라면서 "불장난을 하면 반드시 불에 타 죽는다"고 또 말했다. 이렇듯 분노에 찬 비난을 쏟아냈지만, 펠로시의 대만행은 아시아 순방 계획 때부터 예정된 수순이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는 펠로시 의장이 민주주의와 인권을 최우선시하는 진보주의자로, 대중(對中) 강경 입장을 견지해 왔다는 점이다. 펠로시 의장이 중국과 첫 인연을 맺은 것은 1991년이었다.
당시 하원의원 4년 차였던 펠로시 의장은 공식 일정에 따라 베이징을 방문했다. 그런데 몇몇 의원과 톈안먼(天安門)광장을 찾아 '중국 민주주의를 위해 죽어간 이들에게'라는 플래카드를 펼쳤다. 1989년 톈안먼 사건 때 유혈 진압당해 희생된 시민들을 추모하기 위해서였다. 이 일은 동행한 미국 기자들이 촬영해 공개됐다. 하지만 달려온 중국 공안(公安)들에게 모두 강제 연행됐다. 이때의 경험 때문인지 펠로시는 더욱 강경한 반중 매파로 돌아섰다. 1997년 장쩌민 당시 국가주석이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는 "폭군"이라 부르며 항의 시위를 벌였다.
2009년 후진타오 당시 국가주석이 미국을 방문하자, 정치범의 석방을 촉구하는 서신을 직접 전달했다. 홍콩에서 민주화 시위가 벌어졌던 2019년과 2020년에는 방미한 시위대 지도부를 만나 그들을 지지했다. 중국에서 벌어지는 각종 인권 탄압을 이유로 2008년 베이징하계올림픽 유치를 반대했고, 올해 2월 베이징동계올림픽에서의 외교적 보이콧을 주도해 성공시켰다. 이런 활동 외에도 펠로시는 매년 톈안먼 사건과 관련해 중국을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중국 입장에서는 펠로시가 그야말로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다.
둘째는 '칩4 동맹'을 위한 결속 차원이었다. 칩4는 미국이 구상하는 반도체 공급망 동맹으로 미국, 일본, 대만 그리고 한국을 가리킨다.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와 함께 칩4 동맹을 진행시키고 있다. 일본과 대만은 이미 참여 의사를 밝혔고, 한국에는 8월말까지 통보해 달라고 요청한 상태다. 미 의회는 칩4 동맹을 위해 반도체산업진흥법안을 마련해 7월27일과 28일 각각 상원과 하원에서 통과시켰다. 하원에서는 공화당이 반대했지만, 펠로시 의장이 적극 중재해 24명의 공화당 의원이 찬성표를 던졌다.
'칩4 동맹' 결속 강화가 대만 방문 목적
반도체산업진흥법안은 중국을 견제하고 미국의 반도체산업 발전과 기술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 2800억 달러를 투자하는 것이 핵심 골자다. 이 중 520억 달러는 반도체 업체에 지원하고 미국에 반도체 공장을 짓는 기업에는 25%의 세액을 공제해 준다. 따라서 이 법안이 바이든 대통령의 서명을 거쳐 발효되면, 현재 미국 내 반도체 투자를 약속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대만 TSMC가 큰 수혜를 보게 된다. 그래서인지 펠로시 의장은 대만 방문 내내 반도체 협력을 강조하며 "미국 반도체 법안이 양국의 반도체산업 협력에 좋은 기회"라고 밝혔다.
차이잉원 총통에게는 "미국 반도체법이 더 나은 경제 교류의 문을 열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화답하듯 차이 총통도 "대만은 미국의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라며 "대만은 반도체 공급망을 포함한 모든 방면에서 지속적으로 협력해 미국과의 관계를 한 단계 끌어올리겠다"고 말했다. 게다가 펠로시 의장은 세계 최대의 반도체 위탁생산(파운드리) 업체인 TSMC의 창업자와 회장을 모두 만났다.
비록 사안의 민감성을 고려해 회견 내용이 공개되지 못했지만, 펠로시의 방문 목적이 무엇인지 뚜렷이 보여주는 일정이었다. 실제로 오찬에 동석했던 집권 민진당의 한 의원은 "펠로시 의장은 TSMC 측에 미국 투자에 대한 감사의 뜻을 표했고, TSMC 측은 투자를 더 늘리기 위해 바라는 사항을 전달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런 펠로시 의장의 행보는 한국에는 큰 부담이다. 한국 입장에서는 홍콩까지 포함해 반도체 수출의 60%를 흡수하는 중국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이 칩4 동맹 가입을 주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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