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탱크 위 노인·아이들에 '곧 내려간다' 거짓말도 했죠"..50년 전 '시루섬의 기적' 생존자들
충북 단양역에서 남한강을 내려다보면 잡초가 가득한 황무지 섬이 눈에 들어온다. 단양군 증도리에 속하는 이 섬은 시루 모양을 닮았다. 그래서 ‘시루섬’이라고 불린다. 6만㎡ 크기, 축구장 8배 규모의 작은섬. 이곳에 살던 주민들은 50년 전인 1972년 8월19일 마을을 덮친 홍수에서 대부분 살아남아 ‘시루섬의 기적’의 주인공이 됐다. 1985년 충주댐 건설로 시루섬은 이제 사람이 살지 않는 섬이 됐다. 단양군은 50년 전 홍수에서 주민들의 희생과 헌신으로 수많은 사람을 지켜낸 것을 기념하기 위해 오는 19일 60여명의 생존자를 초청해 행사를 연다.
지난 2일 오후 어르신 4명이 단양역 앞 시루섬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서 있었다. 이몽수 전 증도리 이장(83)과 노진국씨(78), 박동준씨(76), 이경희 (65)씨 등 4명은 1972년 8월19일 태풍 베티로 시루섬이 물에 잠겼을 당시 살아남은 주민들이다.
“단양에서 잘 살았던 동네였는데….” 이 전 이장이 50년 전 추억을 회상하며 말했다. 이 전 이장은 23살 때부터 31살 때인 1971년까지 시루섬에서 이장을 맡았다. 그는 “1970년대만 해도 시루섬이 단양에서 가장 부유했던 곳”이라고 했다.
50여년 전 시루섬은 남한강에 펼쳐진 넓은 평야와 비옥한 토지로 단양지역에서 보기 드문 경작지였다. 단양군은 전체면적 780.1㎢ 중 80%가 임야다.
김상철 단양군 문화예술팀장은 “단양은 산이 많은 지형 특성상 당시 농사가 쉽지 않았다”라며 “넓게 펼쳐진 시루섬의 평지는 지역 주민들의 훌륭한 수입원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1985년 충주댐 건설로 시루섬 대부분이 물에 잠겨 현재 면적은 6만㎡다. 단양군은 물에 잠기기 전 시루섬의 면적을 23만8016㎡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시루섬 주민들은 논농사가 아닌 땅콩, 누에, 담배 등 특용작물을 재배해 많은 소득을 거뒀다는 것이 단양군의 설명이다.
시루섬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씨도 “주변 학교들이 소풍으로 시루섬을 찾았다. 운동장이 없는 학교는 운동회도 시루섬에서 했다”며 “겨울에는 얼음썰매를 타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50년 전 그날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노씨는 홍수가 났던 1972년 8월19일도 시루섬은 평소와 같았다고 했다. 그는 “며칠 동안 비가 왔고 남한강 수위가 오르락내리락 했지만, 위험을 느끼지 못했다”고 말했다. 당시 20대 청년이었던 노씨는 이날 아침 일찍 강에 나가 물고기를 잡았다고 했다. 그는 “강에서 고기를 잡고 있는데 비가 오기 시작하더니 강물이 불어났다”며 “큰일이 났다 싶어 집에 돌아가려는데 불어난 물이 나를 따라왔다”고 했다.
위험을 느낀 노씨는 곧바로 이장이 살던 집으로 달려갔다. 그는 “이장집에 면사무소와 연결된 전화가 있었다”며 “면사무소에 전화를 걸어 ‘섬이 물에 잠긴다. 주민들을 살려달라’고 구조를 요청했다”고 했다. 이어 “낮은 곳에 있는 집부터 거센 물살에 쓸려서 갔고, 면사무소와의 통화도 끊겼다”고 말했다.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난 물은 마을 주민들을 위협했다. 주민들은 거센 물살을 피해 마을 가장 높은 곳인 윗송정으로 향했다. 소나무 40~50그루가 있는 윗송정에는 마을 주민들이 상수도로 쓰는 물을 저장하던 물탱크가 있었다. 물탱크의 높이는 6m, 지름은 5m였다. 노씨는 “윗송정에서도 물이 발목까지 차오르기 시작하더니 금세 허리까지 올라왔다”며 급박한 상황을 설명했다.
마을 주민들은 물탱크에 사다리를 놓고 아이들과 노인들을 먼저 올려보냈다. 이 때 물탱크에 올라간 주민들은 모두 198명이다. 나머지 주민들은 소나무에 매달려 몸을 피했다. 또 물탱크에 올라선 청년들은 주민들이 밖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서로 팔짱을 꼈다. 소나무에 매달렸던 노씨는 “초저녁에는 물탱크 절반 높이까지 물이 찼지만, 주민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물이 줄고있다. 금방 내려갈 수 있을 것’이라고 거짓말을 했다”며 “집이 물살을 버티지 못하고 굉음을 내면서 하나 둘 떠내려갔다. 해가지자 설상가상으로 물이 더 불어났다”고 했다.
당시 15살로 물탱크 가운데에 있던 이씨는 “얼마나 물이 차오르는지도 몰랐다. 모두 떨고 있었다”며 “어두워지자 잠깐 잠이 들었다가 떠내려갈까 무서워 소스라치게 놀라며 잠에서 깼다”고 말했다. 이어 “아침 식사 이후 아무것도 먹지 못했지만 긴장한 탓에 배고픈 것도 잊었다”고 덧붙였다.
다음날 새벽 5시쯤 물이 빠지면서 주민들은 겨우 땅을 밟을 수 있었다. 노씨는 “물탱크에서 갓난아이가 내려왔는데 머리를 만져보니 싸늘했다. 아이 어머니는 물탱크 위에 주저앉아 있었다”고 했다. 이어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아이가 물탱크 위에서 압박을 이기지 못해 숨졌고, 아이 어머니는 주변 사람들이 동요하면 물탱크에 있던 주민들이 위험할 것 같아 조용히 있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베티는 하루 최대 강수량이 407.5㎜를 기록하는 등 한반도에 물폭탄을 쏟아부은 태풍이었다. 당시 이 태풍으로 전국에서 550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됐다. 그러나 시루섬에서는 실종·사망자가 8명에 불과했다. 아이 어머니의 희생과 주민들의 헌신으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건진 것이다. 시루섬 주민들은 그때를 ‘기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노씨는 “살아남은 사람들 모두 물탱크를 생명의 은인으로 생각하고 있다”며 “마을 주민들의 협동심으로 고난을 이겨냈다”고 말했다.
단양군은 오는 19일 시루섬이 내려다보이는 증도리 단양역 광장에서 ‘1972. 8. 19. 시루섬 영웅들의 이야기’라는 이름의 행사를 연다. 행사에는 생존자 60여명이 함께 한다. 시루섬 사진전, 시화전, 다큐 공연, 설치미술, 백일장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펼쳐진다.
지난달 21일에는 단양읍 문화체육센터에서 단양중학교 학생 200명이 참여한 가운데 시루섬 모형 물탱크 생존 실험을 열리기도 했다. 이 실험에서 197명의 학생이 당시 시루섬 주민들이 올랐던 물탱크와 같은 지름의 모형 물탱크에서 3분 정도를 버티기도 했다.
2017년에는 단양역 국도변 수양개유적로에 ‘시루섬의 기적’ 소공원을 조성했다. 소공원에는 젊은 여인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갓난아기를 안고 있는 동상과 서로 꼭 붙어선 채 단단히 스크럼을 짠 주민들의 모습을 표현한 동판 등을 담은 조형물이 있다.
단양군이 시루섬 관련 행사를 여는 이유는 당시 주민들이 보여줬던 희생과 헌신을 기리기 위해서다. 또 올해 취임한 김문근 단양군수는 부군수 시절인 2014년부터 시루섬 관련 자료와 생존자들의 증언을 꾸준히 수집하고 있다. 김 군수는 이 자료를 모아 책을 발간할 계획이다.
김 팀장은 “김 군수가 부군수로 재직했을 2014년 지역주민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관심을 가져온 것으로 안다”며 “위기 속에서 꽃 핀 주민들의 헌신과 희생정신을 단양군이 이어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단양군은 또 사업비 190억원을 들여 단양역에서 시루섬을 거쳐 맞은편 남한강 변을 잇는 길이 600여m, 폭 1.5m 현수교를 만들 계획이다. 다리의 이름은 ‘기적의 다리’다. 이 다리에는 탐방객들이 시루섬에 내려갈 수 있는 길도 낸다.
노씨는 “다리가 생기면 제일 먼저 시루섬에 내려가 걷고 싶다”고 말했다.
이삭 기자 isak84@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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