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경비실에 선풍기 하나..해도해도 너무하는 거 아닙니까"..경비실 에어컨 설치 의무 조례 제정되나

더위를 참지 못하는 사람을 표현한 일러스트. 김상민 화백

“이 더위를 경비실에 있는 선풍기 하나로 견딥니다. 경비 업무보다 더위를 이기는 게 훨씬 힘듭니다. 기후변화로 불볕더위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아파트 경비실의 에어컨 설치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 사항 아닙니까.”

“경비실에 에어컨 설치해 달라는 얘기를 꺼냈더니 관리사무소 소장과 입주자대표회의 측에서 전기요금 부담된다고 눈치를 주는 바람에 그냥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대전광역시의 아파트 경비노동자와 주민들이 아파트 경비실에 에어컨 설치를 의무화하는 내용의 조례를 제정하자는 운동에 나섰다.

대전 대덕구의 공동주택에서 일하는 경비노동자와 주민 등이 참여하는 ‘대덕구 공동주택 노동자 인권증진 및 고용안정에 관한 조례개정 운동본부(운동본부)’는 4일 대덕구에 경비실 내 냉난방기 설치를 의무화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조례 개정안을 제출했다. 지방자치단체의 조례에 경비노동자를 위한 에어컨 설치 등 노동조건 개선을 담는 사례는 전국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운동본부 관계자는 “아직도 에어컨이 없는 경비실이 상당수 있지만, 경비노동자들은 고용불안 때문에 이 문제를 포함한 근무환경 개선에 관한 얘기는 꺼낼 엄두도 내지 못하는 게 실정”이라면서 이번 조례 개정 운동의 취지를 밝혔다.

운동본부는 대덕구 지역 아파트단지 50여 개 중 32개를 표본으로 선정해 조사를 벌인 결과, 5개 단지의 경우 경비실에 에어컨이 한대도 설치돼 있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대덕구 이외에 서구 등 다른 지역에도 아파트단지 경비실에 에어컨이 없는 곳이 흔하다. 서구에 있는 한 아파트는 세대 수가 1000세대를 넘지만, 경비실에 에어컨이 없다. 이 아파트의 한 경비노동자는 “요즘 같은 여름철에는 24시간 근무를 하고 나면 몸이 완전히 녹초가 된다”라면서 “아파트 측에 에어컨 설치를 요청했지만 전기요금 부담이 커서 설치할 수 없다는 답변이 왔다”라고 말했다.

대덕구가 아파트 등 공동주택 노동자와 관련해 현재 시행하고 있는 조례(대전광역시 대덕구 공동주택 경비원 인권 증진에 관한 조례)는 경비노동자를 위한 ‘기본시설’로 근무공간 및 휴게실, 그리고 편의시설로 ‘화장실’과 ‘샤워 시설’을 지정하고 있다. 에어컨 등 냉난방 시설 설치 규정은 빠져 있다.

한 건물의 경비원이 선풍기 바람을 쐬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운동본부는 조례에 명기된 기본시설에 ‘냉·난방기’를 추가하는 내용의 조례안을 만들어 구에 제출했다. 이번 조례 개정안에는 2826명이 서명을 했다. 운동본부 관계자는 “경비노동자와 일반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서명을 하면서 서명자가 발의 요건(대덕구민의 70분의 1인 2178명)을 훌쩍 뛰어넘었다”라고 설명했다.

이번 조례 개정안에는 ‘경비원’이라는 명칭을 ‘경비노동자’로 바꾸는 내용도 들어갔다. 또 구청장은 물론 입주자가 공동주택 노동자의 고용안정을 위해 필요한 여건을 조성하고 이를 위한 시책을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추진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내용도 넣었다.

심유리 대전아파트경비노동자권리찾기사업단장은 “경비노동자의 고용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경비노동자의 고용 체계를 장기고용 체계로 전환하는 공동주택에 대해서는 모범단지를 선정하거나 공동주택 관리비용을 지원할 때 우선권을 부여하도록 하는 내용도 조례에 담았다”라고 밝혔다.

조례 발의를 이끈 현태봉 대전경비관리노동조합 사무장은 “경비노동자의 노동 여건을 근본적으로 개선하기 위해서는 정부 차원에서 정확한 실태조사를 진행한 뒤 대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라고 밝혔다. 주민이 낸 조례안은 심사와 이의신청을 거쳐 수리한 날로부터 30일 이내에 구의회 의장이 발의해야 한다. 이후 구의회는 1년 안에 조례안을 의결해야만 한다.

윤희일 선임기자 yhi@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