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0일 청와대가 국민에게 개방됐다. 100만 명이 넘는 시민이 이곳을 다녀갔지만, 학계에서는 ‘투어리즘’이 강조되는 현재 이용 방식에 대한 비판이 나온다. 청와대의 역사적·건축학적 의미를 담아 강난형 건축가가 ‘답사 안내서’를 보내왔다.
현재 청와대는 고려시대 남경 터이자 조선시대 경복궁 후원에 해당되는 지역에 조성됐다. 경복궁 후원 영역이 정치적 공간으로 재구성된 것은 고종 5~30년 무렵으로, 경무대를 조성하며 궁성을 둘러 경계를 만들면서다. 망국과 함께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총독 관저 및 관사 단지 개발에 따라 경무대에 있던 융무당, 융문당 등 많은 건물이 매각되고 이건 되며 헐렸다. 이곳은 미군정기에 미군정 장관의 관저로, 대한민국 대통령의 관저로 재사용되면서 크나큰 역사적 변동에도 약 150여 년간 정치적인 속성을 유지했다.
명칭은 달라졌다. 대한민국 첫 대통령 관저 이름으로 재사용된 '경무대’는 독재정권과 부정부패의 이미지를 연상한다는 이유로 1960년 12월 30일부터 '청와대’로 불렸고, 현재까지 통용된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와대로 1’에 위치한 청와대는 현대 도시 서울의 중심부에 있는 중요 보안 시설이기에 많은 규제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 주변 지역뿐 아니라 도심 지역 내 건물의 입면, 높이, 형태를 결정하는 요인이 되면서 서울 시민의 생활에도 영향을 끼쳤다.
2022년 5월 10일 자로 정치적 기능을 상실한 청와대는 이제 국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보안과 규제의 빗장이 풀린 청와대를 역사적·건축학적으로 산책하기 위한 루트를 세 갈래로 구분해봤다.
루트 1: 디지털 자료로 보는 청와대 공간의 변천
국토교통부 국토지리정보원이 운영하는 국토정보플랫폼에서 청와대 주변 지도를 볼 수 있다. 과거의 사진 기록도 있다. 보안 지역으로 분류된 청와대 주변의 공간 정보는 오랜 시간 열람이 제한됐다. 5월 10일 청와대 개방에 따라 이제 온라인에서도 주변을 확인할 수 있다. 청와대에 직접 방문하기 전 지도와 사진을 통해 둘러보자.
루트 2: 경복궁에서 청와대로, 신무문 안과 밖 넘나들기
앞서 소개한 것처럼 청와대 공간은 조선시대부터 1950년대까지 많은 변화를 거쳐왔다. 이후 1990년대 '역사 바로 세우기’로 경복궁 일대에 변화가 찾아오면서 경복궁 후원이었던 청와대 역시 그 영향을 받았다. 경복궁 북문인 신무문은 경복궁과 청와대를 나누는 경계 역할을 한다. 신무문의 안과 밖을 드나들어 보자.
문화재청은 경복궁 일대 복원 당시 고종 시대를 기준으로 뒀다. 1868년(고종 5년) 임진왜란으로 불타 사라진 경복궁을 재건하고 신무문 밖 후원 지역을 정치적 공간으로 재조성했다는 이유에서다. 이에 따라 조선총독 관사 건물은 1993년 11월, 조선총독부 건물은 1996년 철거된다. 신무문 안 경복궁 영역은 당시 자리에 건물을 올리는 원형 복원 작업을 진행했다. 대표 사례는 일제가 대한제국 병탄(倂呑) 25주년 기념 박람회장을 세우기 위해 철거한 건청궁을 복원한 것.
다만 후원 영역에 해당하는 청와대까지 원형 복원이 이뤄진 것은 아니다. 지금의 청와대 영역에 세워진 고종 시기 건물 중 현재 방문 가능한 것은 후원의 정문이었던 신무문과 오운각, 침류각 정도다. 이들은 청와대 대통령 관저를 신축하면서 이건했기 때문에 당시 위치와 다른 곳에 있다.
루트 3: 전통과 현대 버무리기
경복궁과 청와대는 한때 하나의 영역으로 인식됐으나 현대에 와서 문화재와 사적(私的) 영역의 구분에 따라 공간을 관리하는 주체가 달라졌다. 1960년대부터 청와대는 문화재관리국(현재 문화재청)이 아닌 총무처(현재 행정안전부로 통합)에서 관리했다. 중앙청, 미술관, 박물관과 함께 건물 기능 변화가 자유로운 편이었다.청와대에서 상징적인 의미를 담아야 하는 정부 시설은 전통 한옥 또는 전통 형태를 모티프로 만들어졌다.
경복궁 영역에서 광화문과 국립민속박물관을 새로이 복원하고 건립하여 콘크리트라는 재료로 전통을 표현하는 1960~70년대식 실험은 청와대 공간에서 1990년대까지 유효했다. 전통 형태를 모티프로 지은 현대 한옥은 영빈관(1978), 춘추관(1990), 청와대 본관이 있다. 대통령 집무실 역할을 하며, 국무회의가 열렸던 청와대 본관은 1991년 9월에 신축됐다.전통 양식의 철근 콘크리트 구조는 정림건축이 '경복궁, 창덕궁, 덕수궁 등 우리의 전통 건축물 양식’을 참고해 설계했다. 이를 위해 울산의 청기와 제작업체가 1200℃ 고온 가마에서 구운 약 15만 장의 청기와를 팔작지붕에 얹었다. 나무를 이용하는 전통 방식은 주거시설에 적용되었는데, 상춘재(1982)와 대통령 관저(1990)가 그 예다. 200년이 넘은 경북 봉화군 춘향목을 사용해 전통가옥 형식으로 상춘재를 설계·시공했던 신응수 대목장은 9년 뒤 경복궁 복원 사업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앞으로가 중요하다
건축 연구자로서 최고 국가권력 기관이자 중요 보안 시설인 청와대 공간이 개방된다는 급작스러운 소식을 접한 후 막막한 마음이 앞섰다. 앞으로 청와대 공간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는 여전히 미지수이기 때문이다. 궁궐 경복궁이 도시 공간으로서 전통 기획의 실험 장소가 된 것은 근대 국가 출현과 함께였다. 건축 전문가들도 국가 관료조직과 함께 국가적 프로젝트에 참여해 전통을 재해석하는 방식으로 역할을 해왔다.
오랜 시간 닫혀 있던 청와대 공간도 경복궁의 후원 영역으로 전통에 대한 시대별 해석에 따라 그 영향을 받았다. '광화문에서 경복궁을 거쳐 백악, 보현봉과 함께 하늘로 이어지는 조선시대 경관’을 구축하는 장기 복원 계획은 현재 진행형이다. 그중 하나인 청와대를 모두의 기억에 남는 도시 문화자원으로 만들어 이를 완성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