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트타임, 때때로, 어쩌다 비건 모두 환영
직장인 김유선(가명)씨가 채식을 시작한 건 2016년이다. 책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멜라니 조이)를 읽고 ‘논리적으로 도망갈 구석이 없다’고 생각했다. 육류를 먹지 않기 시작했다. 그러나 직장인이 되니 채식을 지속하기 어려웠다. 그는 술을 일절 마시지 않는데 거기다가 고기도 먹지 않다보니 “사회성을 어필하기 힘들다”고 느껴졌다. 공격(“생선은 안 불쌍해?”)과 배려(“유선이 고기 못 먹으니까 다른 식당에 가자”)의 대상이 되는 것도 불편했다. 친구들의 짓궂은 농담을 받아치는 것도 버거웠다. 2019년 결국 채식을 중단했다.
‘비건 지향’으로 살다보면 번아웃이 찾아올 때가 있다. 한국의 집단주의적인 식문화, 육식에 길든 입맛, 협소한 채식 선택지… 걸림돌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어떻게 하면 지속가능성을 담보할 수 있을까. 비건 지향인들은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찾아가며 유연한 비거니즘을 실천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말한다.
앵무새 한 마리 어깨에 얹은 듯한 부담?
초래(활동명)와 토토(활동명)는 ‘베러테이블’(VETTER TABLE)을 운영하고 있다. 베러테이블은 인스타그램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비건 지향 커뮤니티다. 게스트를 초대해 매월 마지막 주를 채식만 하는 비건위크로 보낸다. 매 끼니 인스타그램에 인증하고 느낀 바를 공유한다. 비건 요리법도 나눈다.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은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 목표다. ‘파트타임 비건, 때때로 비건, 어쩌다 비건’ 모두 환영한다.
베러테이블은 2020년 2월 여성 커뮤니티 ‘빌라선샤인’에서 활동하던 초래가 한 달에 일주일 채식에 도전하는 소모임을 만든 데서 시작했다. 과거 매달 1~7일 비건위크를 시도하다 매번 실패로 끝난 경험이 있었다. 육식에 흔들린다는 자괴감이 컸다. 그런 모습이 비건에 대한 선입견을 강화할까봐 외부에 실천 사실도 알리지 않았다. 그러다 소모임을 이끌며 다시 동력을 찾았다.
“완벽한 한 명보다 불완전한 100명이 더 큰 시너지를 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지속하려면 무겁지 않아야 하더라고요. 앵무새 한 마리 어깨에 얹고 다닐 수 있는 정도의 부담이면 괜찮지 않을까.(웃음) 조금씩 품을 모아서 변화를 만들어내고 다음 스텝으로 나아가면 되죠.”(초래)
“비건 지향이라는 말이 좋았어요. 내가 도착할 곳이 저기(비건)라는 것을 알고, 당장은 완벽하지 못해도 계속 시도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 단어 같아서요. 오늘 실패해도 다음에 성공하자고 서로 독려하기도 하고요.”(토토)
간헐적 채식은 유래가 깊다. 심리적 장벽이 낮고 여러 명이 함께한다는 점에서 힘을 얻는다. 전 비틀스 멤버인 뮤지션 폴 매카트니가 시작한 ‘미트 프리 먼데이’(고기 없는 월요일) 운동은 한국을 포함해 여러 나라에 널리 퍼졌다. 영국의 ‘비거뉴어리’ 캠페인은 비건(Vegan)과 1월(January)을 합한 말로, 1월 한 달 동안 비건으로 생활하는 것이다.
무결함보다는 꾸준함
대학원생 박수현(가명)씨는 2020년 일주일에 한 번 채식을 시작한 뒤 점차 그 횟수를 늘려 비건까지 나아간 사례다. 그는 친구들과 비건 식당을 방문하거나 생태를 주제로 한 소모임에도 참여한다. 관련 뉴스레터도 구독했다. ‘내가 먹는 이 음식이 어디로부터 왔는가’ “포괄적 의미의 연결감”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이다. “혼자 하기는 어려워요. 삼시세끼를 다 바꾸는 거잖아요. 같은 고민을 공유하는 친구와 이야기 나누다보면 피자가 정말 먹고 싶을 때 ‘○○에 비건 피자가 있다’는 팁을 얻기도 하고 도움이 돼요.(웃음)”
비건 지향인들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해시태그 ‘#나의비거니즘일기’를 달고 비건 식사를 인증하거나 비건 요리법, 비건 식당을 공유한다. 인스타그램에만 게시글 8만2천 개가 검색된다. 완벽한 성공담만 있는 것은 아니다. 기후위기에 대한 고민이나 실패담도 올라와 있다.
출판업계에도 유연한 비거니즘을 공유하는 서적들이 출판되고 있다. 책 <불완전 채식주의자>는 ‘평생 해나가야 할 도전에서 가장 중요한 건 무결함보다는 꾸준함’이라고 말한다.
이 책을 쓴 동물자유연대 활동가인 정진아 작가는 2011년 구제역 사태 이후로 채식을 다짐하고 실천한 지 10년여째다. 그러나 ‘완전’하지 못하다. 육류를 좋아한데다 친구들과 웃고 즐기며 먹는 행위 자체에서 오는 즐거움이 때로 그리웠다. 수차례 실패하고 도전하기를 반복했다. 자책이 컸는데 이런 사람이 혼자만은 아닐 것 같았다.
“10년 넘게 노력한 사람도 여전히 어려움을 느끼는구나, 그럼에도 계속 시도하는구나, 들으면 마음 편해지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나도 한번 해볼까 용기 내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그런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결점을 드러내고 고백하는 게 의미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식생활을 바꾼다는 건 살아가는 동안 계속되는 일이잖아요. 오늘 당장 한 끼를 내가 올바르다 생각하는 기준에 어긋나게 먹었어도 자책하기보다는 내일은 더 노력해보자 생각하면 실천을 이어나가는 게 덜 힘들 것 같아요. 스스로 다독이며 오래 이어갈 수 있게끔 자신을 잘 돌봐주는 게 필요해요.”
중요한 것은 ‘어디로 향하는가’
심리학자이자 비건 운동가인 멜라니 조이도 완벽주의를 내려놓자고 말한다. “완벽한 비건보다는 지속가능한 비건이 되려고 애쓰는 편이 더 좋다. 지속가능한 비건이 되는 건 완벽주의에 집착하지 않고 자신에게 필요한 회복탄력성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최대한 비거니즘을 실천하는 것이다. (중략) 중요한 것은 스펙트럼의 어느 지점에 있느냐가 아니라 어느 방향을 향하는가다.”(책 <나의 친애하는 비건 친구들에게>)
엄격한 비건까지 도달하진 못해도 느슨하게나마 채식을 실천하는 사람은 늘어나는 추세다. ‘플렉시테리언’은 기본적으로 채식하지만 개인적 욕구나 사회적 상황에 따라 육식하기도 하는 사람이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가 펴낸 보고서에 따르면, 설문에 응답한 채식주의자(418명) 중 ‘플렉시테리언’은 79.7%(333명)를 차지했다.(‘2021 가공식품 세분 시장 현황·비건식품’,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
벨기에 비영리단체 ‘윤리적 채식대안’(EVA)의 공동창립자인 비건 운동가 토바이어스 리나르트는 “다수의 채식 지향인 집단은 소수의 베지테리언 혹은 비건 집단보다 시장에 더 큰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말한다.(책 <비건 세상 만들기>) 같은 보고서에 따르면 채식 지향인이 늘어남에 따라 실제 비건 인증 식품은 2018년 13개, 2019년 114개, 2020년 119개, 2021년 286개씩 늘어 누적 612개로 나타났다.
직장인 햇님(활동명)도 고기를 지양하고 우유 대신 아몬드유나 두유를 섭취하는 플렉시테리언이다. 그는 최근 앞다퉈 출시되는 비건 식품을 ‘도장 깨기’ 하듯 먹어보고 그 후기를 SNS에 공유한다. 비건치킨, 두부소시지 후기에 논비건 친구들까지 호기심을 갖는다.
“내가 나를 채식한다고 정의해도 될까 죄책감도 들지만 이 정도의 죄책감은 채식을 계속해야 한다는 동기부여도 되거든요. 비건 식품도 가격이 부담되긴 하지만 리뷰에 논비건 친구들도 관심을 가져요. 신상 비건용 햄은 품절 대란이라고 하기에 맛이 괜찮다면 가족과 나눠 먹어볼 생각이에요. 그렇게 식재료를 하나씩 바꿔나가려고요.”
다양한 사람들의 각자의 여정
비건 지향의 문턱을 낮추기 위해 채식 종류를 굳이 구분하지 말고 ‘비건’과 ‘비건 지향’만 남기는 게 낫다는 주장도 있다. 물론 비건이 되는 것이 최선이지만 “비거니즘이라는 명확한 목표를 제시하되 운동의 대중화를 위해 최대한 포용적인 자세를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채식의 종류가 한국 실정과는 맞지 않고 “채식주의자 종류 간에 도덕적 차등이 있다는 잘못된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고 우려한다(책 <살고 싶다, 사는 동안 더 행복하길 바라고>).
이 책의 저자이자 동물해방물결 자문위원인 비건 운동가 전범선 작가의 말이다. “동물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서는 내가 얼마나 완벽하게 안 먹는지보다 얼마나 더 많은 끼니가 채식이 되는가에 더 주목할 필요가 있어요. 피라미드(채식의 종류)에서 누가 더 높은지 낮은지 따지기보다 최대한 많은 사람이 비거니즘에 공감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을 하는 것, 또 지속하는 것이 중요하겠죠. 다양한 사람들의 각자의 여정을 존중하는 거죠.”
고한솔 기자 sol@hani.co.kr
내일 조금 더 비건이 되면 돼
완벽한 비건이 될 필요는 없다. 먼저 실현 가능한 목표를 세워보자. 김한민의 <아무튼, 비건>과 초식마녀의 <오늘 조금 더 비건>에 나오는 ‘조금씩 완벽해지는 비법’을 정리했다.
정리 신지민 기자 godji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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