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칼럼]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방익수 천주교 대전교구 신부 2022. 8. 4.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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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구나 이 세상이 미덕이 넘쳐나는 곳이길 바란다.

성경에 나오는 표현 중에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루카 12,49)'라는 구절이 있다.

세상을 구원하러 왔다는 이가 안녕과 평화가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겠다고 하니 당혹스러울 수 밖에 없다.

더구나 인간관계에서 가장 각별해야 할 가족마저도, 그 불 때문에 혼란스러워지고 서로 맞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될 것이라는 구절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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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익수 천주교 대전교구 신부

우리는 누구나 이 세상이 미덕이 넘쳐나는 곳이길 바란다. 하지만 이는 이상(理想)일 뿐이고, 우리의 세계는 그렇지 못하다. 모두가 똑같을 수는 없기에 서로 이해하고 배려하면 좋을텐데, 현실은 적당한 타협에 안주할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뉴스를 보면 양보는 온데간데 없고, 자기 입장만 고집하다가 적정선에서 이익을 찾을 만하면 서둘러 타협해버리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양보해서 이뤄낸 거라며 자신들이 인격이 엄청나게 고매한 줄 착각한다.

양보와 타협은 무엇이 다른 것일까? 양보는 어느 정도 희생이 뒤따르는 것인 반면 타협은 희생보다는 더 큰 이익이 따라오는 것이다. 양보가 넘쳐나는 세상이 되려면 각자가 이익보다 희생을 끌어안을 줄 알고, 개인의 선보다는 이른바 공동선의 가치를 아는 성숙함이 필요하다.

성경에 나오는 표현 중에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루카 12,49)'라는 구절이 있다. 세상을 구원하러 왔다는 이가 안녕과 평화가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겠다고 하니 당혹스러울 수 밖에 없다. 더구나 인간관계에서 가장 각별해야 할 가족마저도, 그 불 때문에 혼란스러워지고 서로 맞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될 것이라는 구절이 이어진다. 그러나 예수의 평화는 이 세상의 평화와는 다르기 때문에, 이 분열도 세상의 분열과는 다르게 이해해야 한다. 이 분열은 온갖 부정적인 것들과 갈라지기 위한 분열이다.

친구들과 캠핑을 가게 되면 빠지지 않는 것이 이른바 캠프파이어나 불멍 같은 불놀이다. 뜨거운 불이 활활 타오르면 왠지 모르게 가슴도 설레고 낭만도 넘친다. 불이 지닌 속성들 중에 열정과 같은 뜨거움과 위험성이 동반된 스릴, 모든 걸 불사른다는 강렬한 이미지 때문에 이것에 열광하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낭만적이고 즐거운 일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는 고역이 될 수 있다. 캠프파이어만 해도 장작패기, 쌓기 등 기본적인 것에도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데, 이벤트적인 요소라도 가미하게 되면 서너 시간은 족히 땀을 흘려야 한다. 더더욱 생나무는 연기만 많이 나고 타지도 않으니 숨이 죽은 나무들만 골라야 한다. 그런데 필자는 낭만과 거리가 먼 사람여서 그런지, 늘 그 불을 볼 때마다 '나는 얼마나 잘 타오르고 있는가?' 라고 자문하곤 했다.

안도현 시인의 '연탄재를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라는 시처럼, 신앙의 대상이건, 개인의 열정, 사랑의 상대이건, 목표를 향해 얼마나 뜨거운 사람인가를 생각하면 대부분 조금은 부끄럽기도 하고 고개를 숙이기도 하지 않을런지….

그러나 이보다 중요한 것은 나 스스로가 열정과 헌신의 불이 쉽게 사그라들지 않고, 잘 타오를 만큼 숨을 죽인 나무인가라는 점이다. 내 생각과 이익, 입장이 강하면 여전히 숨을 죽이지 못한 나무일 수밖에 없다. 수분을 지니고 있어 불도 잘 붙지 않고, 기름을 부어서 불을 붙이더라도 오래 가지 못하는 것처럼, 나의 것만 쥐고 있을 때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어진다. 잘 마르고, 기름이 잘 머금어진 나무가 더 오랜 시간, 활활 타오르듯, 나의 것을 내려놓고 상대나 지향을 더 품어 안을 때 각자가 추구하는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

어쩌면 세상을 살면서 벌이는 타협을 지혜나 슬기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저 적당하고 적정한 선에서 수고를 덜어가며 요행을 바라며 사는 것을 바른 처세라고 추켜세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자신의 삶과 적당히 타협하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누구나 꿈꾸고 바라고 좇고 있는 행복의 삶, 그 행복이 스스로에게 떳떳하고 자부심 넘치는 것인지, 아니면 타협에 의해 이루어진 것인지 성찰할 필요가 있겠다.

잘못된 습관과 나 자신의 욕심에 대해 타협하지 않는 사람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의 것을 조금 내려 놓고 다른 이들에게 나 자신을 내어줄 줄 아는 양보의 미덕을 갖춘 사람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우리 각자는 늘 뜨겁게 살아갈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모두가 아름답게 불 타오를 줄 안다면 그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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