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금 1억 귀금속업체가 4000억 해외송금.. 수상한 거래, 은행은 확인도 안했다

류재민 기자 2022. 8. 4. 0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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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한 외환거래, 뻥 뚫린 은행]
법인 등기만 떼봤어도..
작년 4월 설립된 신생업체인데다 본사 주소가 아파트 '의문투성이'
은행은 왜 못 걸러냈나
외화 송금실적 성과지표 반영에 지점마다 과열 유치경쟁 벌여
"서울 지점이 지방영업 뛸 정도"

“최근 포착된 이상(異常) 외환 거래 가운데 송금액이 가장 큰 기업은 한 귀금속업체다. 정상적 무역업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금융감독원은 지난달 27일 7조원대에 달하는 은행권의 수상한 외환 거래와 관련한 브리핑 때 “은행 지점이 거액의 외환 송금을 승인한 업체 중 대다수가 제대로 된 무역 회사가 아닌 ‘페이퍼 컴퍼니’(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회사)일 가능성이 크다”면서 이같이 밝혔다.

3일 본지가 우리은행의 이상 외환거래 가운데 약 4000억원을 송금한 업체를 조사해 보니, 은행들이 송금 기업의 규모 등을 확인했다면 수상한 점을 충분히 포착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당시 은행들은 “해외 송금 거래 내역의 구체적 내용을 일일이 확인하기는 어렵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지점 간 외환 업무 경쟁 과열 등의 문제로 은행이 최소한의 확인도 거치지 않고 무분별한 불법 송금을 방치했다는 의혹이 제기된다. 4대 금융지주 등 한국 금융사들은 불어난 가계대출을 토대로 올해 상반기 사상 최대 실적을 올렸다고 자랑하고 있지만, 횡령과 불법 외환 송금 등이 잇따라 적발됨에 따라 내부 통제가 여전히 허술해서 보완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5분 걸리는 등기 열람도 안 했나

우리은행 한 지점은 귀금속 업체라고 주장하는 A사의 요청으로 약 4000억원에 달하는 외환 송금을 했다고 알려졌다. 해외에 5만달러 이상을 송금하려면 송금 목적을 명시해야 하는데, 이 회사는 이를 무역 대금이라고 했고 우리은행은 이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본지가 금감원이 언급한 ‘귀금속 업체’의 소재를 찾아내 확인한 결과, 이 회사는 수천억원에 달하는 송금을 하기가 불가능한 명백한 페이퍼컴퍼니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래픽=박상훈

약 5분 걸리는 간단한 법인 등기부등본 열람 서비스를 통해 확인했더니 지난해 4월 설립한 A사의 자본금은 1억원밖에 되지 않았다. 이 회사는 설립 당시 본사가 부산이었고, 올해 4월 인천으로 이전했는데 두 주소지 모두 정상적인 무역 회사로 보기엔 무리가 있었다. 부산 동래구의 주소지는 철학원 등이 있는 작은 2층 건물이었다. 올해 4월 이전했다는 새 본사는 인천 남동구에 있는 아파트 단지의 한 주택이고, 이 회사의 대표이사 거주지로 적은 주소는 대구 달서구에 있는 유흥가 지하로 수상한 점이 많았다.

A사의 설립 목적은 귀금속 도소매업·수출입업, 농수산물 가공업·수출입업, 양식업, 식품 제조업, 소프트웨어 및 프로그램 개발업 등 11개에 달한다. 자본금 1억원짜리 회사가 귀금속과 농수산물을 유통·수출하고 소프트웨어 개발도 한다고 주장하는데도 은행은 아무 의심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금융 당국 관계자는 “누가 보아도 정상적이지 않은 회사가 거액의 외환 송금을 실행하는데도 은행이 이를 의심하지 않았다면 명백한 무책임”이라고 말했다.

◇은행들은 눈감고 있었나

은행 측은 이번 해외 외환 송금은 거의 대부분 무역 대금 결제를 위한 ‘사전 송금’ 방식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거래 내역을 확인하기가 힘들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업계에서는 이런 터무니없는 외화 송금이 가능했던 배경으로 은행 지점들 사이에서 외환 영업을 두고 과열된 경쟁이 일어났었던 점을 지적하고 있다. 외환 영업 실적이 최근 은행의 ‘핵심 성과 지표(KPI)’에 크게 반영되기 시작하자 은행 지점들이 ‘출혈 경쟁’을 하면서까지 외환 송금 고객 유치에 혈안이 됐던 게 이 사태를 불러일으킨 중요한 원인이라는 것이다.

시중은행들은 2019년 불거진 사모펀드 부실 판매 사태 이후로 한동안 영업점에 대해 ‘비이자 이익’을 통해 수익을 내라는 압력을 자제해 왔다. 무리한 영업과 상품 판매에 대한 압박 때문에 사고가 발생하고, 부정적인 여론이 들끓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은행들은 최근 이자 이익 쏠림이 심해지자 비이자 이익 관련 항목에 대한 평가 가중치를 늘리는 추세다. 특히 약 4조1000억원에 가까운 외화가 송금된 우리은행·신한은행의 경우 KPI 평가에 ‘외환 영업’ 항목을 별도로 두고, 올해는 배점을 강화하기도 했다. 한 은행 관계자는 “무역 업체에 대한 외환 송금은 경쟁이 너무 치열해서 우대 환율 등을 적용하면 사실상 수수료가 ‘0원’에 가깝다고 봐도 된다”며 “KPI에 이 항목의 가중치가 크기 때문에 서울에 있는 지점이 지방까지 외환 송금 영업을 뛸 정도로 경쟁이 치열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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