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춘추] 하늘의 역린(逆鱗)
옛 기록을 보면 우리 선조들은 용을 비나 구름, 그리고 물과 관련지어 생각해 왔음을 알 수 있다. 고려사에는 '가뭄이 오래 지속되니 토룡을 만들고 또 민가에서도 용을 그려놓고 비를 빌게 하기를 왕에게 청한다'는 내용이 전해진다. 농사가 생업이었던 옛사람들에게 용은 물과 비를 관장하는 신적인 존재로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에는 용이 수호신으로 등장한다. 잘 알려진 것처럼 문무대왕은 죽은 뒤 자신을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왜구를 막겠다는 유언을 남겼다. 이후 그의 아들 신문왕은 682년 5월에 용으로부터 만파식적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만파식적을 불면 적군이 물러나고, 가물 때는 비가 오고 비가 올 때는 맑아졌다고 하니 그야말로 신묘한 피리다.
용은 또한 제왕의 상징이기도 하다. 제왕을 용에 비유한 문헌이나 표현들이 많은데, 그 가운데 한비자는 독특한 맥락에서 용을 군주에 비유했다. '무릇 용이란 짐승은 잘만 길들이면 등에 타고 하늘을 날 수 있다. 하지만 턱밑에 한 자쯤 거꾸로 난 비늘(역린)이 있는데 이를 건드리면 누구나 죽임을 당한다.' 이는 군주를 설득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설파한 '세난' 편에 등장하는 말로 여기서 '역린'은 군주의 노여움, 군주의 노여움을 사는 절대 건드리지 말아야 할 부분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과연 '역린'은 군주에게만 있는 것일까? 민본 개념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백성에게도 역린은 있다. 민심이 천심이니 하늘에도 없을 리 없다. 하늘을 거스른 자, 즉 역천자가 망한다는 사실은 두말할 필요 없다. 하늘의 질서를 거스르는 것은 군주의 마음에 어긋나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늘에는 해와 달이 뜨고 지는 질서와 바람, 구름, 물, 대기 등 자연의 조화인 날씨가 있다. 이를 거스르면 엄청난 대가를 치르게 된다. 인간의 탐욕이 불러온 기후변화와 기상이변이 바로 그 대가다. 최근 유럽을 덮친 극단적인 폭염은 기후위기의 증거이며, 폭염을 비롯해 집중호우, 위협적인 태풍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우리 눈앞에 가까이 온 기상재해들을 보며 하늘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인간의 모습을 반성해 본다. 용을 길들여 하늘을 날 수는 없어도 하늘의 역린을 건드리는 어리석음을 지금 당장 멈춰야 한다.
[박광석 전 기상청장]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