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신'의 사회 속 불타는 욕망들을 적나라하게 보다

도재기 기자 2022. 8. 3.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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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메스재단 미술상 최연소 수상작가 류성실 개인전
'불타는 사랑의 노래'..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영상·설치로 현대인의 욕망·천민자본주의 속성 풍자
류성실의 ‘불타는 사랑의 노래’ 스틸 이미지, 2022, 싱글채널 비디오, 10분 (C) 류성실, 에르메스 재단

에르메스재단의 갤러리 ‘아뜰리에 에르메스’(서울 도산대로)가 애견 화장장·장례식장으로 변했다. 지난해 에르메스재단 미술상을 최연소로 수상하며 주목받는 류성실 작가(29)가 개인전 ‘불타는 사랑의 노래’를 열면서 전시장을 가상의 애견상조업체 사업장으로 만든 것이다.

조소과 출신의 신진인 류 작가는 그동안 ‘BJ 체리 장’ ‘대왕트래블’ 등의 영상작업을 통해 배금주의적 욕망에 매몰된 현대인, 자본주의의 폐해 같은 사회 현실을 담은 묵직한 서사를 B급 감성의 캐릭터로 풍자하고 비튼 블랙코미디로 선보였다. 특히 가짜뉴스 등 1인 미디어 시대의 부작용을 직접 1인 미디어의 콘텐츠 생산방식으로 작업해 미술계에 신선한 충격을 줬다. 기존 작가들처럼 작품의 제작과 유통을 오프라인 전시장이 아닌, “가성비가 훨씬 더 좋은” 미디어 플랫폼을 통해 ‘전시’한 것이다.

신작전 ‘불타는 사랑의 노래’는 영상과 설치로 구성됐다. 전시장은 장례식장에서 흔히 보듯 양쪽으로 늘어선 근조 화환들로 시작된다. 화환들은 극진하게 손님을 맞는 듯, 조폭들의 인사처럼 90도로 허리를 꺾었다. 작가에게 근조 화환은 “화려하고 얄팍하고 뭔가에 부역하면서도 뻔뻔하게 자기를 뽐내는, 그래서 훌륭한 껍데기의 역할을 하는 흥미로운 사물”이란다. 과도하게 허리를 숙인 화환은 갖가지 욕망을 숨기고 치장하는 상징물로 다가온다.

전시장 중앙에는 큰 벽체가 설치됐다. 거창한 대기업 본사 로비나 기념관처럼 부조가 새겨진 묵직한 화강암 벽면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화강암이 아니라 얇고 번들거리는 시트지 인쇄 이미지다. 전시의 핵심인 영상은 애견명 ‘공주’의 화장·추모 과정 등으로 짜였다. 공주의 이력 소개, 불타는 화로, 견주의 애끓는 절규가 이어진다. 하늘을 날아오른 공주는 마침내 무지개다리를 건너 천국에 이른다.

상조업체 사장인 ‘이대왕’은 애도 분위기를 극도로 끌어올리고 견주의 슬픔을 위로한다며 자작곡 ‘진짜배기 사랑’도 열창한다. 동물과 소통이 가능하다는 ‘애니멀 커뮤니케이터’도 거든다. “엄마”를 애타게 부르는 공주의 외침 속에 견주는 지갑을 아낌없이 열어젖힌다. 이대왕은 전작 ‘대왕트래블’에서 부도덕한 물신주의 자본가이자 문어발식 경영인의 상징이었다. 코로나19로 여행업 수익성이 떨어지자 발 빠르게 애견상조로 업종을 바꿨다. 인간에 비해 개의 생애주기가 짧아 상대적으로 회전율이 좋아서다. 돈만 번다면 수단과 방법은 중요하지 않다는 그는 여전히 돈을 향한 불타는 욕망에 충실하다.

류성실의 ‘불타는 사랑의 노래’ 전시 전경(후면), 2022, 영상 및 설치, 사진 김상태 (C) 류성실, 에르메스 재단

화장장 후면의 벽체는 휘황찬란하면서 조악한 이미지들로 가득 찼다. 이대왕의 사업 성과와 지금까지의 영웅적 서사, 향후의 꿈 등이 과도하게 드러나 있다. 관객이 QR코드로 들어가면 경제사범이자 돈밖에 모르는 천박한 인간인 이대왕의 본모습이 드러난다. 이미지들 속에는 음악을 즐기고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 이대왕이 부각된다. 돈의 노예인 자신을 포장하고 이미지를 바꾸는 수단이 예술이다. 류 작가는 “예술이 누군가에게는 훌륭한 기능의 상품일 수 있다는 생각도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일까. 벽체 속에서는 차의 오물을 닦아내는 세차장의 솔처럼 근조 화환들이 서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끝없이 돌고 있다. 작가는 이대왕을 통해 근사한 이미지로 포장·위장하려는 권력자와 기득권자 등 모두의 이중성·위선을 꼬집는다. 나아가 근조 화환처럼 치장물로 전락한 예술의 의미나 가치도 한번쯤 되새기게 한다.

과장되고 키치적 요소들로 구성된 영상은 웃음을 끌어낸다. 웃다보면 문득 돈이든 권력이든 저마다의 뜨거운 욕망으로 죽음은 물론 희로애락의 감정까지도 상품화되는 자본주의의 속성에 씁쓸함을 느낀다. 사실상 돈이 신으로 여겨지는 신자유주의 속 현대 사회에서 누구도 돈을 향한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애견 장례식장은 이대왕뿐 아니라 관람객 저마다의 불타오르는 욕망들, 치장된 이미지들을 살펴보는 자리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오프라인 전시는 왠지 비효율적으로 느껴진다”며 “누군가의 치적을 홍보하고 뽐내고 과시하기에 효과적인 형식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전시를 꾸렸다”고 말했다. 기존 미술전 형식을 되돌아보게 하는 말이다. 미술상 수상의 이점으로 “자기를 증명하는 데에 큰 스트레스를 받는 게 우리 사회인데 나를 증명해야 하는 노력과 시간을 온전히 작업에 쓸 수 있어서 좋았다”는 말에서는 새삼 젊은 작가들의 간절한 바람이 읽힌다. 10월2일까지.

류성실의 ‘불타는 사랑의 노래’ 전시 전경 일부, 2022, 영상 및 설치, 사진 김상태 (C) 류성실, 에르메스 재단

도재기 기자 jaek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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