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안중근의 '빛나는 청춘, 폭발하는 에너지' 그렸다".."반일민족주의로 이해되는 것은 원하는 바 아냐"
“<칼의 노래>를 넘어서는 김훈의 새로운 대표작.” 신간 <하얼빈>(문학동네) 기자회견장 뒤 펼친 현수막 문구다. 김훈은 3일 오전 11시 서울 마포구 합정동 디어 라이프에 마련한 기자회견장에 나와 사진 촬영에 응한 뒤 자리에 앉아 “반갑다”는 인사를 건네곤 이렇게 말했다.
“배경을 만들지 말라고 (출판사 문학동네에) 그렇게 부탁을 했는데 기어코 쑥스러운 배경을 만들어놓고 그 앞에서 말을 하니까 식은땀이 납니다.” 질의응답 말미 ‘현수막 내용에 동의하느냐’는 질문엔 “넘어섰다는 게 뭔지를 난 잘 모르겠다. 넘어섰는지 그 안에서 주저앉았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넘어섰느냐 넘어서지 못했느냐 주저앉았느냐 이런 것들은 매우 과학적이지 못한 언사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훈은 “공들여서 쓴 것은 사실”이라고 했다. “안중근의 빛나는 청춘을 소설로 써보려는 것은 내 고단한 청춘의 소망”(<하얼빈> 중 ‘작가의 말’)이었다. ‘필생의 과업’은 아니라고 했다. 밥벌이하느라 바빴고, 감당하는 게 자신 없어 “필생 방치한 작품이 맞을 것 같다”고 했다.
‘고단한 청춘’의 시기 ‘안중근 신문조서’를 보고 충격에 빠졌다고 한다. “혁명에 나가는 몸가짐이 가벼운 것이구나, 발딱 일어서는구나, 혁명의 추동력, 삶의 열정, 격정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막연한 생각을 했어요.” 이 신문조서는 <난중일기>와 더불어 “책이 인간 삶을 지배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게 한 텍스트였다.
김훈은 이날 기자회견 중 여러 차례 ‘빛나는 청춘’에 관해 이야기했다. “소설을 쓰면서 가장 신바람 나고 행복했던 순간”은 안중근과 우덕순이 블라디보스토크 허름한 술집에서 만나는 장면을 그릴 때다. 신문조서를 참조했다. 소설엔 이렇게 요약했다. “우덕순은 이토를 죽이러 가자는 안중근의 제안에 즉석에서 동의하고 이틀 뒤 둘이서 열차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났다. 이토를 죽여야 하는 이유를 둘이서 말하지도 않았다. 둘 사이에 정치적 대화는 없었다.”
김훈은 “(안중근, 우덕순은) 이 일을 왜 해야 하느냐는 대의명분은 한마디도 토론하지 않았다. 가장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대목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젊은이다운 에너지가 폭발하는 것이죠.. 바람처럼 가볍게 발딱 일어나서 (하얼빈으로 가려고) 블라디보스토크역으로 가는 거죠. ‘청춘은 아름답다’라는 말은 이럴 때 할 수 있는 말이로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청춘이라는 게 더 나이 먹어 완성된 세월을 기다리는, 기다림의 세월이 아니라 그 순간 이미 완성돼 폭발하는 에너지를 가진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김훈은 ‘작가의 말’에서 체포 뒤 안중근은 직업이 ‘포수’ ‘무직’, 우덕순은 ‘담배팔이’라고 일관되게 말한 점을 꼽으며 “포수, 무직, 담배팔이 이 세 단어의 순수성이 이 소설을 쓰는 동안 등대처럼 나를 인도해주었다”고도 했다. “이 세 단어는 생명의 육질로 살아 있었고, 세상의 그 어떤 위력에도 기대고 있지 않았다. 이것은 청춘의 언어였다. 이 청년들의 청춘은 그다음 단계에서의 완성을 도모하는 기다림의 시간이 아니라 새로운 시간을 창조하는 에너지로 폭발했다.”
소설은 “두 젊은이의 산맥처럼 무거운 시대 전체에 대한 고뇌”도 다룬다. 소설에서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려는 뜻을 거듭 생각했다. “이토를 죽여야 한다면 그 죽임의 목적은 살(殺)에 있지 않고, 이토의 작동을 멈추게 하려는 까닭을 말하려는 것에 있는데. 살하지 않고 말을 한다면 세상은 말에 귀 기울이지 않을 것이고, 세상에 들리게 말을 하려면 살하고 나서 말하는 수밖에 없을 터인데. 말은 혼자서 주절거리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대고 알아들으라고 하는 것일진대, 그렇게 살하고 나서 말했다 해서 말하려는 바가 이토의 세상에 들릴 것인지는 알기가 어려웠다.”
소설의 주 갈등 축은 안중근과 이토다. 둘 다 ‘동양 평화’를 말한다. 안중근이 사형 선고를 받고 <동양평화론>을 쓴 건 유명하다. 그에게는 “동양의 모든 나라가 자주독립하는 것”이 동양 평화다. 이토는 “조선이 평화와 독립을 동시에 누릴 수 있는 길은 제국의 틀 안으로 순입하는 것이다. 이것이 곧 동양의 평화”라고 했다.
김훈은 회견에서도 이 차이를 설명했다. “안중근은 <동양평화론>에 희망을 아주 논리적이고 구체적으로 전개했다. 동양 전체의 평화 안에서 각 민족의 평화와 독립을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희망이었다. 이토는 일본의 패권을 만드는 게 동양의 평화라고 생각했다. 한국, 중국, 일본뿐만 아니라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인도네시아까지 전체가 제국의 패권 안에 들어옴으로써 동양의 평화가 가능하다는 것”이라고 했다.
김훈은 안중근의 ‘동양평화’는 ‘민족주의’ 상위에 있다고도 했다. 소설을 두곤 “내 소설이 반일 민족주의로 이해되는 것은 원하는 바는 아니다”라고 했다.
“민족주의는 안중근 시대 국권이 짓밟히고 위태로울 때 국권 회복을 위해서 국민을 하나로 모으는 정신의 동력으로서 매우 고귀한 이데올로기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 시대 민족주의는 국민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로서는 매우 허약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 모든 계층에 먹이 피라미드가 있잖아요. 먹이 피라미드의 관계가 적대적인 사회에서, 모든 이념과 갈등이 대립하는 사회에서 민족주의가 사회를 통합할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낭만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생각이 아닌가 싶어요.”
그는 “민족주의의 정신적 가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현실 갈등을 통합하고 현실 문제를 타결하며 분열, 대립하는 국민을 통합하는 이데올로기가 되기에는 매우 빈약한 것이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김훈은 일본에 가 이토의 족적을 찾아다녔다. 이토에 대한 지배적 통념인 “안중근 총에 맞아 죽어 마땅한 쓰레기”로 묘사하지 않았다. 김훈은 “이토라는 한 인간 안에서 문명개화라는 큰 사업과 약육강식이라는 야만성이 동시에 형성되고 동시에 존재한다. 동시에 (이토가) 그것을 이 세계에서 어떻게 실현하려고 하는지 어떻게든 묘사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동양평화’와 ‘민족주의’에 관한 말은 <하얼빈>과 <칼의 노래>, 안중근과 이순신과의 차이를 묻는 질문 때 나왔다. “내 소설은 이순신을 근왕주의, 왕도사상이 없는 인물로 그렸다. 이순신은 (부하들은 도망치고, 임금은 신의주로 도망가는) 세상을 한심하게 여겼다. (임금이 자신을 죽이려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희망의 허상을 제시하지 않았다. 절망의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그걸 들이받고 나갔다.” 한국의 대표 영웅 안중근은 또 다른 대표 이순신과 달리 “세계의 희망을 제시하고, 희망을 목표를 가진” 사람이었다.
김훈은 “안중근이 얼마나 위대한 영웅인지는 이미 다 증명됐다. 안중근이라는 젊은이가 옆에 와 있는 것처럼 그의 말을 듣고 그의 고민이 뭔가를 듣는 것처럼, 퍼스널(personal) 한 모습을 그리려 했던 것이지 한 영웅을 그리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고 했다.
<하얼빈>은 천주교 신자 안중근과 천주교 신부(뮈텔과 빌렘) 간 갈등도 다룬다. 뮈텔 주교는 “총으로 쏘아 죽이는 방식으로 증오를 표출한 천주교인의 죄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김훈은 ‘후기’에 안중근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범한 ‘죄인’으로 남아 있다가 1993년 김수환 추기경이 안중근 추모 미사를 집전한 뒤에야 천주교 내에서 선양이 시작된 기록도 적었다. <흑산>의 주요 인물인 황사영에 관한 이야기도 <하얼빈>에 녹였다. 순종과 이토의 남방 순행, 황태자 이은의 일본행과 당시 ‘일본 천황’ 메이지와의 만남 등 당대의 여러 사건도 소설을 넣었다.
김훈은 건강 문제와 코로나19에 따른 여행 불편 문제 때문에 하얼빈과 블라디보스토크 등지를 가지 못했다고 한다. “소설을 쓰는 데 직접 표현이나 묘사에 도움이 안 된다 하더라도 (현장 답사를 하면) 그 지역을 내가 손바닥에 장악하고 있구나 하는 느낌으로 자신 있게 글을 써낼 수가 있는데 이번에는 그런 장악력이 전혀 없었다. 아쉽지만 그렇게 됐다. 개인적인 여행으로라도 한번 가려고 한다”고 말했다.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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