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인하대 '쥐어뜯긴 대자보'..온라인 말고 광장에 붙인 이유
"학내 온라인 공간, 여성·소수자 혐오 글 넘쳐
문제 지적하면 신고당하고 계정 정지되기도
대자보 쓸 수밖에 없었지만 그마저도 철거돼
비대면 '코학번' 성인지 감수성 키울 기회 부족"
인하대에서 발생한 ‘성폭행 사망 사건’ 열흘 뒤인 지난달 25일 학생들은 손글씨로 쓴 대자보를 학내 게시판에 걸었다. 2차 피해 등을 우려해 사건에 대해 “최근 마주한 전대미문의 사건”이라고만 표현하며 구체적인 묘사를 피하면서도, ‘꼴페미’ ‘메갈’이라는 공격받을까 학내 성폭력 사건에 대한 발언조차 자기 검열할 수밖에 없는 학내 성차별적 문화를 짚었다. 학교 내부에서 공개적으로 터져 나온 문제 제기였다. 그러나 학교는 “사전 승인을 받지 않았다”며 3시간 만에 대자보를 떼어냈다.
대자보를 직접 쓰고, 에스엔에스(SNS)에서 ‘익명의 인하대 학생’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는 인하대 사회과학대학 20학번 ㄱ(20)씨는 1일 <한겨레>와 만나 자신을 입학 3년 만에 올해 처음 등교해본 ‘코학번’(코로나 학번·20∼22학번)이라고 소개했다. 이번 사건의 가해자·피해자 역시 코학번이다. ㄱ씨는 “코학번은 비대면 대학 생활 동안 성인지 감수성을 환기시킬 수 없었고, 그 대신 활성화된 대학 온라인 공간에는 혐오가 판치고 있다”며 “코로나로 완전히 무너져내린 학교 공동체를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학교와 교육부에서 내놓은 재발 방지 대책은 “단편적”이라고 지적하며, 학생 자치 기구 조직 등을 통해 학생들이 ‘평등하고 안전한 학교’를 만드는 데 앞장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ㄱ씨와의 일문일답.
-익명으로 활동하는 이유는
“안전의 문제도 있었지만, 현 국면에서 이름 공개 여부는 중요하지 않은 문제다. 이름을 알리면 그 사람에 집중하지 않겠나. 메시지에 집중하게 만들어야 했다. 모두가 숨겨왔던 목소리가 학내 전반에서 터져 나오도록 하는 방식으로 이번 문제 제기가 진행되길 바랐다.”
-사건 발생 열흘 뒤 대자보를 쓰기까지 어떤 일이 있었나.
“처음에는 사건이 너무 처참하고 몰상식하니까 괴로워서 못 본 체하고 싶었다. 학교라는 공간과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살인과 성폭행이라는 두 가지가 합쳐지다니, 생각하기를 멈췄던 것 같다. 학내 커뮤니티인 <에브리타임>에는 피해자를 겨눈 2차 가해성 발언마저 팽배해있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무기력이 찾아왔다. 근데 자꾸 곱씹다 보니 부끄러웠다. 잊는다고 없던 일이 되는 것도 아니지 않나. 그러던 와중 한 학우가 ‘우리가 뭔가 해야 하지 않느냐’고 했고, 본격적으로 또 제대로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처럼 무기력하고 억눌려있던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위해서는 판을 우리가 깔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자보에 익숙지 않은 세대인데.
“대자보는 너무 옛날 방식이 아닌지, 이런 형식이 유효하기는 할까, 누가 관심이나 가질까 하는 걱정도 됐다. 하지만 대자보는 하나의 시작일 뿐이다. 학교에 4년 다닌 선배마저도 우리 학교에서 대자보 붙은 거 처음 본다고 하더라. 대자보를 붙이고 있는데 한 교수님이 지나가면서 “이 학교에서 대자보 붙는 거 7년 만에 처음 본다. 대자보 내용 뭔지는 모르겠지만 응원한다”고 했다. 오늘날 대학 사회 안에서 얼마나 비판적인 목소리들의 볼륨이 얼마나 낮춰져 있었는지, 얼마나 학교가 수동적인 공간이 되었는지 느꼈다.”
-이번 사건과 ‘코학번’과의 연관성이 있다고 보나.
“이번 사건이 발생하게 된 핵심적인 원인으로 꼽을 순 없겠지만, 코학번이기 때문에 온라인으로 수업이 전환돼 성인지 감수성을 환기시킬 기회가 없었던 점 등을 짚을 필요는 있다. 무너진 학생 공동체를 대신해 영향력이 커진 학내 커뮤니티 ‘에브리타임’에서는 익명성에 기대, 여성과 소수자, 외국인 등에 대한 혐오가 버젓이 자행된다. 이러한 문제를 지적하는 지극히 상식적인 글을 올리면 오히려 신고를 먹여 글이 삭제되고, 계정마저 정지된다. 혐오가 공감받고 살아남는다. 이번 사건과 관련한 글이 올라오면 ‘더이상 언급하지 말라. 학교 명예나 입결(입시결과)에 좋을 게 뭐가 있나’라며 논의 자체를 소멸해버리려고 하는 시도까지 벌어진다. 실명으로 글을 올려야 하는 학교 공식 누리집인 ‘인하광장’은 온라인 광장으로서의 힘을 잃고 있다.”
-학내 반응은 어떤가
“굉장히 반응이 빨랐다. 학교는 단 세 시간 만에 이를 철거했다. ‘미승인 게시물’이라는 규정을 들었는데 황당했다. 학교라면 학생들의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듣고 다시는 이런 일이 안 생기도록 노력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학생들 반응은 엇갈렸다. 수십명의 재학생과 졸업생들이 응원과 지지를 보내줬다. 현재 20여명이 함께 후속 행동을 하기 위해 모여있다. 하지만 ‘에브리타임’에서는 ‘페미’가 쓴 대자보라며 학교에 철거 요청을 해야 한다는 글이 잇따라 올라오기도 했다.”
-앞으로 계획은?
“온라인에서 ‘좋아요’ 수천개를 받았다고 해서, 응원·지지 수십개를 많이 받는다고 해도 공중전으로만은 한계가 분명히 있다. 지금 학내에는 학교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학교에 정당한 요구를 할 수 있는 기구가 전혀 마련돼있지 않다. 학생회조차도 꾸려져 있지 않다. 학교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비판적인 입장을 낼 수 있는 기구가 있었다면 경비 노동자를 그렇게 많이 줄이는데, 학생들이 아무 얘기도 안 할 수가 있었겠나. 성평등위원회나 학생인권위원회 등을 설치해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문제 제기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방안을 구상하고 있다. 경비 등 학내 노동자 문제부터 시작해서 학내 견제 목소리를 내는 동시에 무너진 공동체성도 되살려야 한다.”
-학교와 교육부에서 재발 방지 대책을 내놨는데
“학교에서 교육부 권고를 받아 내놓은 거라고는 폐회로텔레비전(CCTV)을 추가 설치하고, 야간 통행금지, 일회성 성폭력 교육이 전부다. 폐회로텔레비전을 늘리면 그것을 모니터링할 경비 노동자 수는 늘려주는 건지 등은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일회성에 그치는 성폭력 교육도 아쉽다. 실효성 있는 성인지감수성 교육이 필요하다.”
▶관련기사: 인하대생 숨진 밤, 경비 4명뿐…CCTV 765대 무용지물이었다
https://www.hani.co.kr/arti/area/capital/1051397.html
장나래 기자 w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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