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동원 피해자 측, 윤석열 정부와 "신뢰관계 깨졌다" 민관협의회 불참
[이재호 기자(jh1128@pressian.com)]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 측이 외교부가 주도하고 있는 문제 해결을 위한 민관협의회에 더 이상 참여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외교부가 피해자들의 권리 시행을 늦추기 위해 대법원에 의견서를 제출했고 이 과정에서 피해자 측에 사전 통보도, 사후 설명도 없어 신뢰관계가 깨졌다는 것이 이들의 설명이다.
3일 일본제철, 미쓰비시중공업, 후지코시 상대 강제동원 소송 피해자 지원단(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및 피해자 대리인(법무법인 해마루 장완익·임재성·김세은 변호사)은 서울 도렴동 정부서울청사 별관 외교부 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외교부의 대법원 의견서 제출 및 전후 사정을 고려할 때, 외교부와 피해자 측 사이에 신뢰관계가 파탄났다고 판단한다"며 "이에 피해자 지원단·대리인단은 이후 민관협의회 불참을 통보한다"고 밝혔다.
앞서 외교부는 7월 26일 근로정신대 피해자인 양금덕·김성주 할머니가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낸 특별 현금화 명령 재항고심에 대해 민사소송규칙에 근거해 대법원에 의견서를 제출했다.
외교부 당국자는 2일 이 의견서에 "한일 양국의 이익에 부합하는 합리적인 해결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각계각층의 의견을 수렴 중이다"라며 "민관협의회는 이러한 노력을 경주하는 차원"이라는 내용을 담았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 당국자는 "외교부는 대법원에 의견서를 제출했고 이후 원고 및 피해자 측에 내용을 설명드렸다"며 "피해자 분들에게도 의견서 제출 사실 및 내용을 전했다"고 말했다.
외교부는 해당 의견서 제출을 사전에 피해자들에게 통지하지 않았다. 정부 입장을 확인하고 공개한다는 중요한 의미가 있는 의견서 제출에 대해 민관협의회에서 전혀 언급이 없었다는 것이 피해자 측 주장이다.
피해자 대리인인 임재성 법무법인 해마루 변호사는 "민관협의회라는 공개적인 절차가 진행되고 있음에도, 그 절차에서 전혀 논의되지 않음은 물론 피해자 측에 사전에 어떠한 논의나 통지도 없이 의견서가 제출됐다"며 "절차적으로 피해자 측의 신뢰관계를 완전히 저버리는 행위"라고 규정했다.
임 변호사는 "정부가 실력이 부족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일본의 입장 워낙 강경하기 때문에 실제 외교적 협상이 쉽지 않다, 우리가 더 많은 양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있다' 라고 상황을 판단할 수도 있다"며 "하지만 최소한 자신이 한 행위에 대해서는 (피해자들에게) 솔직하게 설명하고 이해를 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외교부가 의견서 제출 이후에 설명을 했다는 부분에 대해서도 임 변호사는 "지난 목요일(7월 28일)에 외교부가 광주에 내려가 의견서 제출 사실을 (피해자 측에) 확인했다. 그런데 내용 확인 요청에 대해서는 구두로 간략하게 언급만 했다"며 '설명'이 아닌 '통지'라고 주장했다.
임 변호사는 "피해자 측이 사후적으로나마 외교부에게 의견서를 달라고 요구하고 있지만, 외교부는 이미 제출된 의견서조차 피해자 측에 공개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며 "'어차피 아실 것 같아서 말씀드린다. 내용 확인시켜드릴 수 없다'는 것이 외교부의 언급이었다"고 전했다.
피해자 측은 외교부가 민사소송규칙에 명시된 의견서 제출이라는 형식을 활용한 것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했다.
이들은 "재판거래 또는 사법농단이라는 범죄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민사소송규칙을, 그 범죄의 공범이었던 외교부가 과거에 대한 아무런 반성없이 그 규칙을 다시 활용해서 강제동원 집행절차를 지연시키려는 모습은 재판거래의 피해자들인 강제동원 소송 원고들에게는 매우 충격적인 모습"이라고 비판했다.
앞서 박근혜 정부 당시 양승태 대법원장이 재임하던 때인 2015년 대법원은 소송 당사자가 아닌 국가기관과 지방자치단체 등이 의견서를 낼 수 있도록 민사소송규칙 제134조를 개정‧신설했다. 그런데 당시 대법원이 이러한 결정을 내린 배경에 대해 강제동원 사건의 소송 결론을 뒤집어 달라는 박근혜 정부의 청와대 요구를 수용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주장이 있었다.
이와 함께 정부의 의견서 제출 행위는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을 막거나 지연시키기 위한 조치라는 것이 피해자 측 판단이다.
임 변호사는 "언론을 통해 확인된 외교부 의견서 내용으로 볼 때, 피해자 측은 사실상 대한민국 정부가 대법원에게 '판단을 유보하라'라는 취지로 의견서를 제출했다고 본다"며 "이는 헌법이 보장한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피해자들이 이같은 주장을 하게 된 배경은, 한일 간 이 사안에 대한 외교적 교섭이 쉽지 않은 가운데, 정부 입장에서 일본 기업의 한국 내 자산에 대한 강제 매각을 막기 위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외교부가 제출한 의견서는 근로정신대 피해자인 양금덕·김성주 할머니와 관련한 소송으로, 이들은 일본 미쓰비시중공업이 판결에 따라 배상을 하지 않자 국내에 있는 자산인 상표권 2건, 특허권 2건에 대해 강제 매각인 현금화 명령을 내려달라고 소를 제기했다.
1,2심 모두 피해자 측이 승소한 상황에서 미쓰비시중공업은 지난 4월 대법원에 재항고했다. 일반적인 재판 기간 등을 감안할 때 대법원 판결이 9월 중에 나올 것이라는 전망이 제기되는 가운데 정부는 현금화를 막고자 지난 7월 4일 피해자 측과 각계 각층의 인사들이 참여하여 해결 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민관협의회 1차 회의를 개최했다.
하지만 협의회에서 구체적인 해결 방안은 나오지 않고 있고 재항고 대법원 판결까지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다. 일본과 관계 개선을 외교의 주요 목표로 하고 있는 윤석열 정부 입장에서는 대법원의 판단 지연이 필요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임 변호사는 "권리를 행사하겠다는 피해자가 오랜 시간 압류와 매각 명령 결정 등을 신청하고 1,2,3심을 지속해 왔던 과정이 있는데 정부가 외교적 노력을 다하겠다는 의견을 왜 대법원에 제출하나"라며 "이건 (대법에서 현금화에 대해) 판단하지 말아 달라는 의사를 낸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사법부가 행정부 의견대로 판단을 늦출 것인가, 아니면 집행 절차의 핵심은 신속한 판단이기 때문에 그대로 진행할 것인가가 쟁점이 됐는데, 왜 한국의 국가 기관 간에 쟁점이 되는 것인지가 안타까운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임 변호사는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한국 정부와도 싸워야 하나.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 기업과 과거 불법행위에 대해 싸우는 것도 버거운데 이 절차 속에서 한국 정부와도 싸워야 한다는 것은 굉장히 유감"이라고 말했다.
피해자 대리인 측은 민관협의회에는 불참하지만 이후에 정부가 강제동원과 관련한 안을 마련할 경우 동의 여부 절차에는 협조하겠다고 밝혔다. 임 변호사는 "대리인이기 때문에 구체적인 안이 나오면 피해자들에게 여쭤볼 수밖에 없다"며 대리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설명했다.
[이재호 기자(jh1128@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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