尹의 칼춤에 당해본 김규현은 안다..'대통령의 고발 승인' 발언은 '보험'?
[박세열 기자(ilys123@pressian.com)]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1980년 외무고시에 합격해 외교부 주요 요직을 섭렵했고, 박근혜 정부에서 외교안보수석, 국가 안보실 1, 2차장을 지낸 베테랑 외교관 출신 김규현 국정원장이 문재인 정부에서 국정원장을 지낸 두 명을 고발한다고 윤석열 대통령에게 보고하면서 '승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표현상의 실수'를 했다?
전직 국정원장 두 명을 현직 국정원장이 고발을 주도하는 엄중한 업무를 수행하면서 김규현 원장은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이 칼이 누구에게든 향할 수 있다고 보지 않았을까. 그게 윤석열 정부의 국정원장일지라도.
김 원장은 2014년 2월 청와대에 입성해 일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때도 국가안보실 2차장으로 '정권 문을 닫고' 나온 인사다. 그는 탄핵의 모든 과정을 권력 핵심부에 앉아 전부 지켜봤다. 한솥밥 먹던 안종범 전 경제수석이 국정농단으로 구속되는 것을 목격했고, 우병우 전 민정수석이 직권남용으로 수사 받은 것도 지켜봤다. 국정농단의 소용돌이 속에서 김 원장 본인도 세월호 사건 관련 '최초 보고 시간 조작' 의혹 수사 대상에 오르면서 고초를 겪은 바 있다. 검찰이 김 원장을 체포했을 때 수사 책임자가 당시 서울중앙지검장이었던 윤석열 대통령이었다. 그는 '무서운 검사' 윤석열 대통령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비선 보고, 서류 조작, 직권 남용 등 혐의로 권력 주변 공직자들이 하나 둘 날아가는 생생히 지켜 본 김 원장이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베테랑 공직자' 김 원장이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 탈북 어민 북송 사건 관련 고발을 주도할 수 있었을까? 이걸 주도했다가 나중에 잘못된다면? 하지 않은 일은 책임 지지 않는다, 그게 산전수전 겪어 온 김 원장의 '승인' 발언에 담긴 의미라고 해석된다. 그에게는 '대통령이 전직 원장 두명 고발을 승인했다'는 걸 국회 속기록에 남겨둘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추정하는 게 합리적이다.
국정원의 전사(前史)는 특히 화려(?)하다. 노무현 정부 김만복 국정원장은 북한의 김양건 통일전선부장과의 대화록을 유출해 불명예퇴진했고, 김대중 정부의 국정원장들도 불법 도청 등으로 법의 단죄를 받았다. 이명박 정부 원세훈 전 국정원장은 막강한 공권력을 토대로 국내 정치에 개입해 국정원 개혁의 단초가 됐다. 박근혜 정부의 남재준·이병기·이병호 국정원장은 특활비를 빼돌려 '정권'에 상납했다는 이유로 유죄를 선고받았다. 유우성 간첩 조작 사건으로 국정원이 관리하던 정보원이 자살 시도를 하고, 고위 간부들이 줄줄이 수사 대상이 된 적도 있다. 이때문에 국정원은 문재인 정부 들어 '국내 정치 개입', '대공 수사권 이관' 등 정치 중립을 위한 개혁에 나섰고 일부 성과를 냈다.
정치권에선 국정원의 실세를 조상준 기획조정실장으로 본다. 기조실장은 국가정보원의 조직과 예산을 총괄하는 핵심 보직이다. '윤석열 라인' 검찰 출신인 그는 공직을 맡기 전 김건희 전 코바나 대표의 주가조작 의혹 사건 관련 변호인으로 활동한 바 있다. 윤 대통령의 자타공인 '측근'으로 꼽힌다. 전직 국정원장 두 명을 고발하는 데 단초가 된 감찰은 최근 감찰심의관실에 파견된 최혁 검사가 주도했다는 보도도 나왔다. 그 과정에서 김규현 원장의 운신의 폭은 좁았다. '승인' 발언은 그런 배경을 염두에 두면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대통령 측근에 둘러싸안 정통 관료인 그를 '정권 보위'를 위한 '자발적 충성파'로 보긴 어렵다. 나중에 문제가 됐을 때 윤 대통령의 '승인'은 김 원장의 책임을 비켜나게 해 주는 최소한의 장치가 될 것이다. 국정원장이 '표현상의 실수'를 했다고 강변하는 국민의힘과 국정원의 '해명'은 되레 초라해 보인다. 현직 국정원장이 대통령의 '승인'을 받았다고 밝히면서 "보도자료를 보고 (고발 사실을) 알았다"던 대통령실도 궁색해졌다.
이 사태가 의미하는 건 무엇일까. 정부와 관료의 엇박자, 이건 비단 국정원과 김 원장의 문제만이 아니다. 지지율 하락과 국정 동력 확보의 어려움 속에서 현상 뒤에 숨어있는 본질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지금 윤석열 정부의 검찰은 윤 대통령의 '특기'인 직권남용 수사, 그리고 문재인 정부 블랙리스트 의혹 수사를 대대적으로 벌이고 있다. 문재인 정부를 단죄할 칼로 박근혜 정부를 단죄했던 그 칼을 다시 꺼내든 셈이다. 공직사회는 이 광경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윤석열 정부의 '사정 칼날'이 작동하는 건 '이전 정부'에만 국한될 것이라고 볼까? 아이러니하게도 윤석열 정부의 사정은 '전 정부'를 벌벌 떨게 하는 걸 넘어, '현 정부' 공무원들을 벌벌 떨게 만들고 있다. 멀쩡히 업무를 수행하던 동료들이 갑자기 수사 대상이 되면, 공무원은 얼어붙는다. 어느 공무원이 정부의 정책 성공을 위해 적극 나설 수 있을까. 수사를 하지 말란 얘기가 아니다. 윤석열 정부의 수사가 엉뚱하게 윤석열 정부의 국정 동력을 갉아먹고, 발목잡고 있는 희한한 상황을 짚어보는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본인 스스로 인정했듯 "대통령을 처음 해 본" 인물이다. 정부 출범 2달이 넘었는데도, 아직 윤석열 정부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이 정부의 국정 기조는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한다. '공정과 상식', 그리고 '자유'라는 추상적 화두만 있을 뿐이다. 오죽했으면 현직 국토부장관인 원희룡 장관이 국회에 나와서 "국민 신뢰를 잃으면 어떤 말과 정책도 국민들에 의해 진지하게 받아들여질 수 없다"며 "윤석열 대통령과 정부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반드시 신뢰도를 회복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한다"고 훈수를 둘까. 이런 전례가 있었나 싶다.
윤 대통령은 지금 자신을 지지해 준 세력, 그 중에서도 '극단적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심이 든다. 전 정권 적폐 청산은 윤 대통령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제각각 내 놓았던 수많은 정권교체 이유 중 하나였다. 극단적인 인사들, 이를테면 대통령실 9급 행정요원으로 임용되려다 취소된 인사의 동업자이자 친동생은 문재인 전 대통령 사저 앞에서 '문재인 구속'을 외쳐왔다. 홍준표 대구시장은 윤석열 대통령이 후보시절인 지난 1월 5일 "더이상 헛소리로 일부 국민들 세뇌시키는 '틀튜브'는 보지 마시라"고 조언한 바 있다. 비슷한 시기에 "황교안 전 자유한국당 대표에게 붙어 180석을 외치던 그 사람들이 이젠 윤석열 후보조차 망치고 있다"고 극우 유튜버들에게 휘둘리는 윤 대통령을 비판한 바 있다.
'문재인 구속'이나, '문재인을 따르던 공무원들 모조리 구속'과 같은 극단적 주장을 '민심'으로 오인하는 것이라면 유감이다. 정권 교체 여론이 정권 유지 여론보다 다소 높았다고 전 정권을 '처벌해야 할 범죄자' 취급하게 되면, 문재인 전 대통령을 지지했던 40~50% 유권자를 적으로 돌리게 된다. '통합'은 멀어진다. 전 정부의 '잘못된 실정'은 바로잡아야 할 대상이지만, 무분별한 '보복'은 반드시 역풍을 불러온다. 지금 대통령의 득표율과 현재 대통령이 처한 정치적 지형을 객관적으로 보고 대통령에게 조언할 정무 참모가 필요한데, 그런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정권 말에나 볼 수 있는 현상을 지금 목격하는 건 고역이다. '초보 대통령'의 선무당 춤은 자해행위나 다름없다. 그게 야당에겐 호재일 수 있겠지만 나라에는 불행이다. 게다가 스스로 '무능 프레임'으로 걸어들어가고 있는 모습은 더욱 우려스럽다. 지금 상황은 그리 한가롭지 않다. 전 세계적 팬데믹 여파로 풀었던 돈이 경제 위기로 돌아오고 있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경기 침체 와중에 물가는 오르고 있으며, 양극화는 더욱 심해지고 자산 거품이 꺼질 조짐도 보인다.
국정 기조 전환이 시급하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집권 1년차에 한미쇠고기협정 때문에 촛불 시위를 맞닥뜨렸고, 이른바 '만사형통(모든 것은 대통령의 형으로 통한다)', '권력 사유화' 파동으로 타격을 입었다가, 이듬해인 2009년 '친서민 중도 실용'으로 국정 기조 전환을 이뤄내 지지율을 회복한다. 물론 '친서민 중도 실용'은 양두구육에 가까웠으나, 어찌됐던 국정 동력을 확보하는 데 성공한 바 있다. 당시 이를 기획했던 건 이 전 대통령이 기용한 박형준 당시 정무수석(현 부산시장) 등 소장 개혁파들이었다. 대통령이 자신에 비판적인 소장 개혁파의 쓴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 윤 대통령에게 필요한 건 이런 용인술이다.
[박세열 기자(ilys123@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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