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몽유도원도 석철주 화백 7문7답] '물의 우연한 흐름' 담아낸 크로스오버 산수화로 '꿈의 현실화' 보여주고 싶어

이창훈 2022. 8. 3.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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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5~25일 방배동 비채아트뮤지엄서 'Fantastic Moment'展
명실상부한 21세기 몽유도원도 완성까지 일생 걸친 창작실험
"창작의 기본은 '양의 질로의 전환' 다양한 관점과 시도 필수"
석철주 화백이 'Fantastic Moment'전 시그니처인 '신몽유도원도 21-9'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미국에서만 누적 2000만부 이상 팔려 ‘성서 다음 많이 팔린 책’ 반열에 오른 작품 중 하나로 J.D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이 있다. (토머스 페인의 ‘상식’, ‘프랭클린 자서전’,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 등도 그 반열이다)

주인공은 고교에서 3번째 퇴학을 당한 16세 홀든 콜필드로 애연가이자 애주가이면서 지독한 독서광이다.

그는 소설 속에서 “좋은 책이란 모름지기 책장을 덮는 순간 작가에게 전화를 걸어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지는, 그런 책”이라고 규정한다.

그의 정의가 그림과 미술작품에도 해당될까. 정답이 따로 있지는 않겠지만 석철주 화백의 ‘신몽유도원도’는 콜필드의 말대로 ‘작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지게’ 한다.

15세기 화가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한국화의 상징적 작품이다. 교과서와 미디어를 통해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깊이 아로새겨져 있다.

신몽유도원도는 친숙하지만 진부하고 고색창연한 몽유도원도를 화사한 색감과 스펙타클한 스케일로 부활시켰다. ‘고정관념을 전복시킨 환골탈태’가 딱딱하게 굳어있던 심미안을 마디마디 뒤흔든다고 할까.

구구절절 설명 필요 없이 바로 마음에 와 닿는다. 사실 오리지널 몽유도원도는 ‘꿈속에서 무릉도원을 노닌다’는 제목이 없다면 화풍이나 필치가 여느 산수화와 다름없다. 주로 기암괴석을 그렸다는 것뿐이다.

재탄생한 몽유도원도는 우리가 꿈에서나 볼 수 있는 심상이 그대로 투영됐다는 점에서 명칭과 실체가 비로소 맞아 떨어진다.

핑크빛의 몽환적 산수 속을 떠다니는 열기구가 ‘용의 눈’이다. 유유히 하늘을 떠돌면서 산수를 감상하는 상상을 불러일으키며 보는 이를 작품 속으로 빨아 들인다. 잠재의식의 한 구석을 차지한 채 잠들어 있던 이미지가 활짝 기지개를 켜며 날아오르는 느낌이다.

쉽게 읽히는 글일수록 작가의 고뇌가 깊다고 한다. 쉽고 자연스럽게 감동을 일으키는 그림일수록 그 경지에 오르기까지 작가의 오랜 고뇌와 다양한 시도가 응축돼 있다.

신몽유도원도의 작가 석철주 화백은 57년째 작품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원로작가다. 한국 산수화의 전범(典範)을 만든 청전 이상범 화백 문하에서 동양화의 기본기를 엄혹하게 수련했다.

약관 21세에 국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 동양화 부문 입선 뒤 여섯 차례 입선기록을 세웠다. 하지만 전통작법의 틀에 안주하지 않고 다양한 창작실험으로 동양화의 현대적 재구성을 치열하게 추구했다. 그가 독창적으로 개척한 장르로서 그에게 대중적 명성을 안겨준 것은 동양문화의 상징적 오브제인 ‘도자 항아리’ 그림이다.

달항아리, 청화백자 등 항아리 시리즈는 그에게 ‘항아리의 작가’라는 애칭을 부여했다. 그 이후 규방 소품 등 다양한 한국적 생활 소재를 형상화하는 작업을 이어왔다. 그가 ‘21세기의 안견’을 표방하면서 2005년부터 천착하고 있는 장르가 바로 신몽유도원도다.

석 화백과의 인터뷰도 작품이 추구하는 표현정신처럼 쉽고 친숙한 화제부터 시작했다. 작품과 예술이전에 한 사람의 생활인으로서 먹고 사는 이야기다. 석 화백을 만난 곳은 8월5일부터 25일까지 ‘Fantastic Moment’를 테마로 그의 개인전이 열리는 서울 방배동 비채아트뮤지엄 1층 갤러리다.


Q1. 평생 작가로서 외길을 걸어오기가 쉽지 않으셨을텐데 어떻게 생활을 꾸려 오셨나요?

A. 아내의 희생이 컸습니다. 아내가 서양화를 전공했는데 결혼상대로 나를 고른 것은 작품활동을 같이 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 때문이었다고 해요.

그런데 결혼 후에는 전적으로 내 뒷바라지에만 매달리게 됐어요. 지금은 전공을 살려서 일러스트 작가로 활동하고 있지요.

사실 전업작가로서만 살아온 것은 아니고 결혼 무렵 추계예대에서 전임강사 자리를 얻어 넉넉지는 않아도 일정한 급여를 받게된 것이 큰 도움이 됐습니다.

국전 입선이후 작품활동을 하다가 27살에 추계예대에 입학해 늦깎이 대학생이 됐어요. 만학이 결과적으로는 작가로서 살아가는 현실적 기반이 된 셈이죠.

1980년대에는 함께 작품활동을 하던 동료들이 참 많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돌아보면 나 혼자 뿐이에요. 재능있는 동료들이 생활이라는 굴레에 갇혀 창작을 중단한 현실이 참 안타까워요.

나도 전임이 되기 전까지는 창작과 생활을 병행해야 해서 어려웠던 순간이 많았어요.

고종사촌 형이 1970~1980년대 활동하던 세샘트리오 멤버였어요.

제가 작품활동에 전념하겠다며 백수생활을 고집하는 것이 걱정됐는지 같이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자고 했어요. 당시로선 노래도 그림만큼이나 답이 없어 보여서 사양했지요. 그러다가 형의 권유로 불러 본 요들송이 뜻밖에 반응이 좋아서 한동안 무대에서 요들송을 부르기도 했지요.

원래 워낙 산을 좋아했는데 어린시절 당한 다리 부상으로 전문적인 클라이밍은 못하고 등산가이드 역할을 했어요. 20~30대에는 가이드 활동하며 부수입을 마련하기도 했어요.


Q2. 동양화 스승이신 청전 이상범 화백의 이야기도 궁금합니다. 청전 외에 작품세계를 형성하는데 영향을 준 분들로는 또 누가 있을까요?

A. 청전은 그림 외에 다른 데는 일체 눈길을 돌리지 않는 분이었어요. 창작에 있어서나 작품의 평가에 대해 타협을 몰랐지요. 서로 화풍이 달랐던 이당 김은호 화백과의 갈등도 유명하잖아요.

잘 알려진 대로 동아일보 미술기자였던 청전은 그 유명한 ‘손기정 일장기 말소사건’의 주인공이기도 하죠. 독립운동에 필적할 기념비적인 항일 활동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주관한 미전에서 심사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친일예술인으로 분류된 것이 참 안타까워요. 작품에 대한 평가에 엄정하고 투철한 분이었기 때문에 작품 심사를 화단 원로에게 주어진 일종의 사명으로 여겼을 것이라 봅니다.

청전 다음으로 영향을 준 분이 선친이십니다. 목수이셨는데 주로 한옥을 설계하고 짓는 일을 하셨어요. 전통 용어로 도편수라고도 하지요. 특히 한옥을 지반에서부터 끌어올려 전체적으로 부양시키는 시공이 특기이셨죠.

어려서부터 선친의 목공작업을 어깨너머로 보면서 무엇이든지 만드는 것에 재미를 붙이게 됐어요. 지금도 작업실 의자는 대학생 때 취미로 제작한 것을 그대로 쓰고 있어요.

동양화의 수묵화 기법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 해서 다른 시도를 하는 것도 선친의 영향인 것 같아요.

세 번째로 영향을 준 사람을 꼽으라면 바로 아내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서양화를 전공한 미술학도여서 작품 구상이나 화법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눕니다.

생계를 꾸려나가고 아이들 교육시키는 문제에 있어서도 아내가 많은 몫을 맡아 준 덕분에 작품에 보다 집중할 수 있었구요.

제가 또래 중에서는 많이 늦은 나이인 마흔 살에 결혼을 했어요. 그러다 보니 두 아이 모두 30대입니다. 큰 딸은 작곡을 전공하고 음악을 공부하러 독일에 가 있고 막내인 아들은 작품활동을 돕고 있어요.

딸은 신몽유도원도를 주제로 곡을 만들어 전시회 때 연주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아들은 작품에 대한 반응이 그보다는 미지근한 것 같아요. 하하. 이른바 MZ세대라는 20~30대들은 전통 산수화를 모티브로 한 담백한 작풍보다는 ‘쨍한 느낌의 그림’을 선호하는 것 같아요.


Q3. 그 동안의 작품활동을 시기별로는 어떻게 나눠볼 수 있을까요?

A. 중학교 때인 16세에 입문한 수묵화에 집중하면서 국전에 입선하고 15년쯤 지난 1985년 첫 개인전을 열었어요. 그로부터 다시 5년이 지나 항아리 그림을 시작하면서 석철주라는 존재를 알릴 수 있었지요.

나의 ‘항아리 시대’라 할 수 있겠네요. 그로부터 5년 뒤 전통생활 소품을 주로 그린 ‘규방시대’에 접어들게 됐지요. 그 시대를 거친 뒤 눈부신 대자연의 모습보다는 그림자나 창문에 비쳐진 풍경 같은, 우리 곁에 있는 일상 속 자연의 모습을 화폭에 담은 ‘자연시대’를 거치게 됐어요. 규방시대와 자연시대는 일종의 모색기였던 것 같아요.

다양한 시도와 실험을 거치면서 창작의 에너지를 축적했고 작품활동의 첫 걸음이었던 산수화로 다시 돌아왔지요.

그게 바로 신몽유도원도입니다. 2005년부터 일상 풍경으로 자리잡은 인왕산, 북한산 등의 산수를 모티브로 하거나 이념산수화라고도 하는 몽유도원도의 개념대로 동양적 서정을 형상화하면서 신몽유도원도 연작 시리즈를 계속 그려내고 있습니다.

작품은 구체적인 지명이나 대상의 이름을 붙이지 않고 ‘신몽유도원도 21-9’, ‘신몽유도원도 21-31’과 같이 넘버링하고 있어요.


Q4. 규방시대나 자연시대 작품은 전통 동양화의 기준에서 외도라고도 할 수 있는데 혹시 그로인한 비판이나 힘든 경험은 없으셨나요?

A. 양(量)의 질(質)로의 전환은 창작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라고 봅니다.

천재의 대명사로 꼽히는 파블로 피카소도 유화, 판화, 조소 등 장르를 넘나들면서 10만점 이상의 작품을 남겼지요.

쉬지 않고 다양한 대상을 많이 그려내는 가운데 번뜩이는 창조적 영감이 예기치 않게 떠오릅니다.

지금도 난 후학들에게 틈만 나면 “해외에 나가서 그들의 관점으로 우리 화단과 작품세계를 보라” “상대적 관점을 확보해라”라고 조언합니다.

그만큼 많은 체험과 다채로운 관점이 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동양화 기초원리인 육법(六法)은 창작의 에너지를 일으키는 기운생동(氣運生動)으로 시작하는데 그 가운데 전이모사(轉移模寫)라는 것이 있습니다.

다른 작품을 베껴 모사하면서 창작의 새로운 경지로 옮겨가는 원리이죠.

규방시대 작품들은 한지나 캔버스가 아니라 광목에 그렸어요. 일종의 창작적 과도기였다고 할까요. 서양화의 캔버스도 광목과 같은 직물의 일종이어서 자연스럽게 캔버스로 넘어오게 됐지요.

신몽유도원도에는 그동안 체득한 작품활동의 기법들이 모두 녹아 있어요.

한 가지 작풍이나 장르에 집착하지 않고 다양하고 폭넓은 시도를 통해 새 경지를 추구하는 것이 예술의 창조정신이라고 봅니다.


Q5. 요즘 심리학에서는 ‘내 안의 아이’라는 개념이 보편화되고 있습니다. 소년시절에 형성된 기억과 체험이 어른이 됐다고 사라지는게 아니라 오히려 자아의 한가운데 자리 잡고 의식을 좌우한다고 하죠. 소년시절 야구선수를 꿈꾸셨다고 하는데 어릴 때의 집중적인 스포츠 활동이 창작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생각을 해보신 적이 있나요?

A. 물론 있습니다. 하하. 난 무엇이든지 머릿 속에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순간 바로 실행에 착수합니다. 내가 이런 걸 그려내면 남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을까 좌고우면하면서 시간을 흘려보내지 않아요.

어린시절 운동장을 뒹굴면서 공을 치고 던지던 스포츠활동이 그런 실행력을 심어주었고 그것이 다양한 창작 경향으로 나타났던 것 같아요.


Q6. 몽유도원도는 15세기 최고의 서예가였던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를 화가 안견이 그려낸 것으로 잘 알려져 있죠. 꿈이나 이상향을 형상화시켰다고 해서 ‘이념산수화’라고도 하구요. 그렇게 본다면 동양화는 실재하는 사물이나 풍경을 묘사하고 해석하는 서양화와는 개념 자체가 다른 것 같습니다. 회화를 추상과 구상으로 구분할 때 동양화는 어디에 속할까요?

A. 추상과 구상의 이분법으로 동양화를 정의하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동양화에서 산수화는 단순한 풍경 묘사가 아니죠.

자연 속에서 인생의 이치와 만물의 조화를 추구하는 동양철학의 이념이 담겨있습니다.

한국화의 기본 장르인 매난국죽(梅蘭菊竹)의 4군자도도 실제 정물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식물로 상징되는 기백과 품격, 절조와 유연성이라는 이념을 표현하는 것이죠.

서양화가 인상주의, 야수주의, 입체주의 등 다양한 사조를 거쳐왔지만 본질적으로 실물을 묘사하고 해석하는 ‘사실(寫實)화’라고 하면 동양화는 의미를 담아내는 ‘사의(寫意)화’라고 합니다. 추상과 구상의 구분은 서양화에 맞는 것이라면 동양화는 사실과 사의라는 구분이 적합한 것이겠죠.

석 화백이 각기 다른 분위기의 연작 시리즈 신몽유도원도 앞에서 전시회 공간 구성에 대해 의견을 밝히고 있다.

Q7. 신몽유도원도에는 붓만 아니라 스프레이건 등 그동안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새로운 기법이 적용된 것으로 압니다. 여기에는 어떤 모티브나 표현의도가 담긴 건가요?

A. 신몽유도원도는 장르상 산수화지요. 산수는 산과 물이구요. 수 십만년 어쩌면 그보다 긴 세월을 거쳐 누구의 의도와도 상관없이 우연히 흘러내린 물길이 계곡을 형성한 것이 우리의 산수입니다. 산수를 형성한 ‘우연한 물의 움직임’을 그림에 반영하려고 했습니다.

먼저 바탕을 원색으로 칠한 후 그 위에 흰색 물감으로 윤곽을 그려 넣었지요. 그리고 흰색 물감이 마르기 전에 스프레이 건으로 캔버스를 향해 물을 쏩니다. 그러면 물에 많이 지워진 부분과 적게 지워진 부분 사이에 층이 생기면서 산세(山勢)가 자연스럽게 나타납니다.

서양화는 기본적으로 붓으로 ‘덧칠’해서 그려나가는 것인 반면 한국화에는 한지에 먹이 스며드는 과정인 ‘스밈과 번짐’이 있습니다.

시간이 흘러야만 나타나는 농담(濃淡)의 ‘삭임과 여백’을 작업과정에 고려해야 합니다. 캔버스에 아크릴 물감으로 그리면 바로 완성되는 유화와 달리 수묵화에는 물이 지닌 우연적 특질이 필연적으로 작용합니다.

한지에서 물이 완전히 증발할 때는 그림이 막 그려졌을 때와 비교해 약 20% 정도 변화가 발생합니다.

스프레이건으로 물을 분사해서 이 것이 원래의 의도와 무관하게 우연히 산세를 그려나가는데, 이 우연의 작용이 작품 완성도의 20% 정도를 차지하는 것 같습니다.

인위적인 세부 묘사없이 물의 우연성으로 산수의 실루엣을 형성시킨 것이 전통산수화에서는 볼 수 없는 자연 그대로의 느낌을 발산하는 것이라 봅니다.

몽유도원도의 제작과정을 통해, 그리고 완성된 이미지를 통해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도 그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는 피할 수 없는 우연적 숙명적 요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에 저항하거나 탓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수용하고 나아갈 때 꿈꾸던 것들이 현실화될 수 있다는 것이죠.

물론 그림은 그림으로써 예술적 감동과 희열을 주는 것까지가 목적입니다. 교훈을 구하는 것은 예술의 본질이 아닙니다.

다만 그 뒤에 숨어있는 오랜 시간의 다양한 시도속에서 꿈의 실현을 위한 단서를 찾을 수 있다면 작가로서 기대이상의 보람이겠습니다.

글과 사진 = 이창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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