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2 중국, 체급이 달라졌다..'4차 대만위기'가 위험한 이유

정의길 2022. 8. 2.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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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로시 대만 방문][1~3차 대만해협 위기와 비교해 보니]
1·2차 위기 '하나의 중국' 인정 투쟁..중, 3차 위기뒤 군비확장
미-중 경제·안보 경쟁 '팽팽'..양국 위기관리 해낼지 미지수
2일 대만 타이베이의 한 신문에 낸시 펠로시 미 하원의장의 대만행과 관련한 기사가 실려 있다. 타이베이/로이터 연합뉴스

미-중 관계가 최악의 상태로 얼어붙은 시점에서 이뤄지는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의 2일 대만 방문을 전세계가 걱정스런 눈으로 주시하고 있다. 이번 위기는 제4차 대만해협 위기로 격화될 것인가?

대만해협 위기는 1950년대 초반부터 중국이 대만을 두고 전쟁까지 불사하겠다고 으르며 무력충돌이나 긴장을 고조시킨 일련의 위기이다. 1·2차 위기는 기본적으로 중국의 자기 인정투쟁이었다. 국공내전에서 승리하고 본토를 장악했음에도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베이징의 공산당 정권은 대만이 중국의 일부라며 무력 위기를 고조하고 해소하는 과정을 반복했다. 이를 통해서 미국 등과 협상하면서 국제적 지위를 인정받았다. 미국과 소련이 핵전쟁을 상정하는 수준까지 대결과 긴장이 고조됐음에도 중국은 금지선을 넘지 않는 위기관리를 해왔다.

1954년 8월11일 중국은 본토 샤먼에서 불과 3㎞ 떨어진 대만 점유의 진먼섬과 마쭈섬에 포격을 가했다. 이날 저우언라이 당시 총리는 대만은 해방돼야만 한다며 인민해방군을 이 지역에 파견했다고 발표했다. 1차 대만해협 위기의 시작이었다.

1차 위기는 진먼과 마쭈섬에 대만이 대규모 방어병력을 배치한 것에 대한 대응이 명분이었으나, 실제로는 미국의 중국봉쇄 강화 등에 맞선 역공이었다. 그 전해 취임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 행정부는 대만해협에서 7함대의 순시를 중단하는 한편 대만과의 상호방위조약 협상을 맺고 동남아조약기구(세토) 창설에 나섰다.

대만해협에서 7함대는 중국과 대만 모두에게 방어벽이었다. 중국은 7함대의 순시 중단을 미국이 대만에 중국 침공을 인정하는 조처로 봤다. 진먼섬 등에서 대만의 병력 증가 움직임이 그 증거였다. 동남아조약기구를 창설하는 마닐라 조약이 체결되기 5일 전에 1차 대만해협 위기가 일어났다.

매일 계속되던 진먼섬 등에 대한 포격으로 9월3일 미군 군사고문 3명이 숨졌다. 12일에는 미 합참이 중국 본토에 대한 핵무기 사용을 권고해 위기는 절정으로 치달았다. 미국은 3개 항모전단을 파견했다.

하지만, 중국과 미국 모두는 긴장을 고조시키면서도 확전을 막는 위기관리 능력을 보여줬다. 마오쩌둥은 미군에 대한 공격을 전면 금지하고, 중국의 진먼섬 포격은 날이 갈수록 의례적인 성격이 되어갔다. 미국도 12월 대만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며 진먼섬 등은 배제했다. 중국은 1955년 1월18일 다천섬과 이장산섬을 점령해 체면을 살렸고, 미국은 대만군의 대피를 도왔다. 5월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열린 아시아-아프리카 비동맹회의에 참가한 저우언라이는 “미국과 전쟁을 원치 않는다”며 “미국 정부와 극동, 특히 대만 지역의 긴장 완화를 논의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다음날 중국은 포격을 중단했다.

나중에 마오쩌둥은 니키타 흐루쇼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게 “우리가 그 섬들을 점령했다면, 언제든 우리가 원할 때 장제스를 불안하게 만들 수 없지 않겠소”라고 말했다. 애초 진먼섬을 점령할 의도가 없었고, 대만을 묶어두려는 의도였다는 설명이다.

1차위기를 통해 중국은 미국과 공식적으로 대화를 재개했다. 제네바에서 접촉이 대사급으로 격상됐다. 미국은 중국에게 공식적으로 무력을 포기하도록 하는데 외교의 초점을 맞추는 수세적 입장을 보였다.

1958년 8월23일 중국은 진먼섬 등에 다시 포격을 재개했다. 넉달 동안 이어질 2차 대만해협 위기였다. 대상은 표면적으로 미국이지만, 내용적으로는 소련이었다. 중국과 소련은 이념분쟁을 통해 양국 간의 뿌리 깊은 지정학적 불화를 심화시켜 가던 때였다. 마오쩌둥은 2차 대만해협 위기를 일으켜서, 미국과의 평화공존을 제창한 흐루쇼프의 발목을 잡았다.

2차 위기가 발생하기 3주 전에 흐루쇼프는 베이징을 방문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이 2차 위기를 조성하자, 소련이 2차 대만해협 위기를 승인했다는 추측이 나왔다. 하지만, 흐르쇼프는 중국 방문에서 마오와 대치했다. 소련은 당황했다. 소련은 중국에게 자제를 촉구하면서도, 핵전쟁을 감수하며 지원하겠다는 뜻을 미국에 밝히겠다고 제안했다. 중국은 소련의 발목을 잡고 미국에는 자신들의 목적이 중-미 대화를 대사급으로 돌리는 데 있다고 말하며 위기 해소에 나섰다. 약 1천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2차 위기는 미국에는 “최초의 심각한 핵 위기”였다고 크리스찬 허터 국무장관이 평가했다.

진먼섬 포격은 그 이후에도 1979년까지 간헐적으로 계속되며, 일종의 의례가 됐다. 중국은 미국과 정식 수교한 뒤인 1979년 10월25일에 포격을 멈춘다고 발표했다.

3차 대만해협 위기는 미국과 중국이 수교 뒤 전략적 협력관계를 확장하던 1995년에 리덩후이 당시 대만 총통의 미국 방문으로 촉발됐다. 중국이 주도적으로 도발한 1·2차 위기와는 달리 3차 위기는 중국의 수동적 대응이었다.

리덩후이가 코넬대 동창회 참가를 희망하자, 미 하원은 5월에 이를 승인하는 만장일치 결의안을 채택했다. 그러자 미 행정부도 그의 비공식적 방문을 승인했다. 미국을 방문한 리덩후이는 도발적인 연설로 일관했다. 중국은 7월7일 대만해협에서 미사일 발사 실험을 하고, 병력을 동원했다. 실탄 사격을 동반한 미사일 발사는 8월 중순에 열흘간 다시 이어졌다. 11월에는 수륙양용 강습훈련도 대규모로 실시됐다. 중국의 군사대응은 12월 대만 총선에 즈음해 다시 가열됐다. 미국은 항모전단 2대를 파견했다. 베트남전 이후 최대의 군사력을 동아시아에 동원한 것이다.

이때도 양쪽은 선을 넘지 않게 위기 관리를 했다. 중국이 발사한 미사일 탄두는 모조품이었고, 실탄 사격은 상징적이었다. 미국도 항모전단을 파견하면서도 외교장관 회담을 통해 ‘하나의 중국’ 원칙을 지지하고 대만 관리들의 미국 방문 절차를 강화하겠다는 타협안을 내놓았다.

8개월 동안 계속된 3차 위기는 미-중 수교 이후 양국 관계의 변곡점이었다. 이를 계기로 양국은 상대에 대한 의구심을 드러냈다. 미국의 전력 앞에서 거듭 굴복했던 중국은 이후 본격적인 군비 확장에 나서게 된다. 중국의 대응은 미 항모전단의 제1도련선(오키나와~대만~필리핀) 접근을 막는 것에 집중됐다. 중국은 이를 위해 ‘항모 킬러’라 불리는 둥펑-26D 대함 탄도미사일을 개발하는 등 중거리 미사일 전력 강화에 나섰다. 이는 미국에 맞서는 중국의 군사전략인 반접근·영역거부(A2·AD) 전략으로 구체화되어 간다.

펠로시 의장의 방중으로 촉발된 이번 상황은 미-중 간의 압도적 국력 차이가 존재했던 1~3차 위기 때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미 국방부는 2020년·2021년 ‘중국 군사력 보고서’에서 대만해협에서 국지적 충돌이 발생할 경우 미국에 승산이 없다는 결론을 내놓았다. 경제와 안보를 아우르는 모든 영역에서 치열하게 갈등하고 있는 두 나라가 예전 같은 위기관리 능력을 보여줄지도 알 수 없다.

3차 위기 때 장쩌민 당시 중국 국가주석은 “대만을 위해서라면 중국은 100년을 기다린다”라는 마오의 발언이 아직 유효하냐는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의 질문에 “그렇지 않다”며 “그 약속은 23년 전에 했고, 이제 77년밖에 안 남았다”고 답했다. 중국은 이제 ‘중화민국의 위대한 부흥’을 공공연히 외치고 있다. 이전과 질적으로 다른 4차 위기가 시작되려 하고 있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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