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법적으로 고통받는 우리 시대의 사람들..자본주의 체제의 범죄성을 비판하다[인터뷰]
격월간 12권을 1권 1280쪽 정리
성경부터 허삼관 매혈기까지 인용
'자본'의 언어로 삶 돌아봐
서울 용산 ‘읽기의 집’ 벽엔 조지 버나드 쇼(1874~1936)의 말을 새긴 청년 마르크스의 초상 사진 한 장이 붙었다. “그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학문적 업적을 남겼다. 마르크스는 세상의 마음을 바꾸어놓았다.”
고병권과 출판사 천년의상상이 5년간 진행한 ‘강의-강연-집필-출판’의 프로젝트가 <고병권의 자본 강의>로 최근 나왔다. 격월간으로 낸 12권을 1권으로 모았다. 1280쪽 방대한 분량의 <자본> 해설서를 두고 고병권은 “마르크스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마르크스는 다른 학자들이 자본주의에 대한 맹목으로 들여다보지 못한 것을 신기하게 또 중요하게 살펴봤다. 그중 하나가 ‘상품’이다. 마르크스는 ‘상품’을 이야기하면서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사회의 ‘부’와 ‘가치’의 정체를 밝히려 했다고 고병권은 분석한다.
“눈동자만큼 마음을 잘 드러낸 게 없다”는 고병권은 ‘상품’ 등을 다룬 2권 제목을 ‘마르크스의 특별한 눈’이라 붙였다. “마르크스는 침울한 노동자들의 그림자에 눈이 가고 머리가 가고 마음이 갔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이해해야 한다고 봤다. 세상을 바꾸는 데 도움이 되려는 마음을 가졌다. 그 마음을 이번 책에 살려보려고도 했다”고 말했다.
책은 <성경>부터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까지 여러 문헌을 두루 인용한다. 프리모 레비가 <이것이 인간인가>(돌베개)에 서술해 널리 알려진 절멸 공간 아우슈비츠 정문의 ‘노동이 자유롭게 하리라’는 문구 등을 두고 <자본>의 맥락에서 재해석했다. 데이비드 하비 같은 현대 마르크스 학자 이론에다 한국 노동의 현실 문제까지 다룬다.
고병권은 “일부러 집어넣은 건 아니다. 자연스럽게 연결된 것 같다. (여러 텍스트를) 소처럼 되새김질해서 여러 맛을 끌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본> 참고 문헌도 괴테나 실러, 단테 같은 문학 텍스트가 많다. <성경>도 인용했다”고 말했다.
신학, 문학, 철학, 경제학 텍스트를 두루 녹인 <자본>은 고병권에겐 ‘고상한 책’이다. “ ‘고상하다’는 풍요롭게 삶을 보게 한다는 뜻이다. <자본>에 삶과 세계에 관한 이해가 녹아 있다. <자본>을 읽는 건 자본주의적인 상품과 부의 생산 양식뿐 아니라 삶의 양식을 이해하는 것이다. 출근하고 일하고, 아이들 교육하는 방식도 포함한다”고 했다.
<자본>은 정치경제학에 관한 ‘원론’이나 ‘개론’이 아니라 ‘비판’이다. 고병권은 <자본>을 “취업하지 않고 살길 없는 자본주의 현실, 당장 굶어 죽는 조건에서 돈을 벌려는 노동자와 자본가가 맺는 계약” 등을 두고 ‘착취에 입각한 과학에 대한 비판’이라고 규정한다. 그는 대우조선해양 노동자들의 임금 협상 타결 등을 예로 들며 이렇게 설명했다. “노동자들은 어마어마한 에너지와 능력을 발휘했다. 대통령도 모욕하는 굴욕적인 상황에서, 왜 삭감된 임금 30% 회복이 아니라 왜 4.5% 인상에 합의하고 나와야 했을까? 마르크스는 계약서만 보면 표면적으로 자유롭고 평등한 계약, 즉 임금을 정하는 법칙과 원칙 너머 비대칭성이 있다고 했다. ‘자본의 전제정’이라고 표현했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는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이 근거와 조건들이 왜 계속 생산되는지, 누구는 왜 계속 부유하고, 왜 누구는 가난한지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고 했다.
이 질문은 ‘가치’ 문제와도 이어진다. 소방관이나 청소부는 어떤 상품을 과장 광고해 돈을 많이 버는 사람보다 의미 있는 일을 한다. 고병권은 “ ‘어떤 일이 가치 있다’ 할 때 무엇을 더 또는 덜 생산할지,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나눠줄지와 연동된다”며 “지금은 가치 있는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한테 가치가 너무 많이 부여되고, 굉장히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가치가 거의 분배되지 않는다.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일을 하거나,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굉장히 놀라운 삶을 사는 사람들한테는 전혀 가치가 가지 않는다”고도 했다.
“<자본>은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자본주의 범죄 보고서”라는 분석과 연결된다. 고병권이 보기엔 과거에 국한된 범죄가 아니다. “<자본> 마지막은 기소문 형식이다. 마르크스는 ‘합법적인 범죄’를 지적하려 했다.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법이나 룰을 어긴 사람이 아니라 체제 자체의 범죄성 문제를 비판했다. 자본주의에선 쥐어짜는 방식은 다르지만 쥐어짜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바뀌지 않는다. 힘의 비대칭성 즉 노동력을 팔지 않고 살길이 없다는 사실도 바뀌지 않는다.” 이 말은 고병권이 1권 <다시 자본을 읽자> 서문에 쓴 “우리 시대의 고통받는 사람들, 그 고통이 우리 시대의 원칙의 불법적 적용이 아니라 합법적 적용에서 생겨난 사람들, 그 억울함을 우리 시대 법정에서는 풀 수 없고 오직 우리 시대를 법정에 세움으로써만 풀 수 있는 사람들, 이 책은 그들의 체험에 대한 요약이자 그들의 체험에서 나온 비판입니다”라는 글과 이어진다.
원고지 분량만 1만장이 넘었다. <자본>보다 두껍다. 고병권은 인간관계니, 사회적 관계니, 강의니 다 끊고 이 일만 했다. 강의와 강연을 병행한 집필, 인간관계 단절이 힘들지는 않았을까. 그는 “집에서 글 쓰고, 남산 산책하고, 밥 먹고, 다시 쓰기를 반복했다. 정말 행복한 때였다. 읽고 쓰기만 하면 됐다. 이 시기를 그리워할 것 같다”고 답했다.
새로운 저술 경험이었다고 한다. “많은 사람이 읽고 나서 쓴다고 하지만, 쓰는 것은 또 새로 읽는 방식이더라. <자본>의 언어로 제 삶을 돌아보고 정리한 듯하다. 다만 이 책은 사람들이 <자본>을 함께 읽고, 더 음미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썼다”고 했다.
인터뷰를 진행한 공간은 ‘읽기의 집’이다. 이반 일리치가 수도원에서 책을 어떻게 읽고, 만들었는지에 관해 쓴 <텍스트의 포도밭>(현암사) 서문에 나온 말을 따왔다. 고병권은 이곳에서 여러 사람과 함께 읽는 일을 한다. 그는 “세상 한구석에서 책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자기만의 읽기 방식을 만들어가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고 했다.
‘자신에게 읽기란 무엇인가’를 물었다. “세계 전체에 관한 물음이라 답하기 어렵다”며 이렇게 말했다. “세상을 알고 관계를 맺으며 공감하고 분노하는 모든 것들이 읽기에서 시작한다. 듣는 것도 읽는 것이다. 나는 읽기 속에 있다. 내 삶이다.” <고병권의 자본 강의> 중 <자본>에 관한 상세한 인터뷰 내용을 8월 중 경향신문 홈페이지에 싣는다.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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