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석의 언어탐방] 포퓰리즘: 포풀루스 그리고 포퓰러리즘

한겨레 2022. 8. 2.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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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석의 언어탐방]혹자는 포퓰리즘은 인기영합주의(포퓰러리즘)가 아니라고 강변하기도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현대 정치에서 선거를 통한 집권 전략으로 자기만이 국민을 대표하고 대변한다는 정치 리더는 인기영합주의로부터 자유롭기 힘들다.
오늘날 포퓰리즘은 포퓰러리즘을 쉽게 포함할 뿐만 아니라, 민중선동적 요소까지 활용한다. 포퓰리즘은 오지랖이 넓다.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김용석 | 철학자

“포퓰리즘은 21세기에 유행하는 주요 정치 용어 가운데 하나다.” 정치학자 카스 무데는 저서 <포퓰리즘>을 이렇게 시작한다. 하지만 이어서 용어의 문제점을 바로 지적한다. “이 용어는, 다수의 저널리스트에게나 독자에게나 크게 호소하기는 해도, 워낙 폭넓게 쓰이다 보니 혼란과 불만을 낳고 있다.”

포퓰리즘은 2017년에 케임브리지 사전이 ‘올해의 단어’로 선정하기도 했지만, 우리 시대에 가장 넓게 사용되면서도 가장 오해받는 정치 개념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학술적으로 그 사용을 거부하자는 제안이 있을 정도다. 그 말을 정의하고자 하는 정치학자들을 심리적 좌절에 이르게까지 했다는 말도 있다. 그런데도 무데는 이 용어를 간단히 폐기할 수는 없다고 한다. 그것이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정치 논쟁의 중심에 깊숙이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정치 무대에서 정치 용어는 화려하게 춤추는 배우와 같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정치 용어들은 가변적이고 유동적이며 때론 현혹적이다. 예를 들어, 누구나 다 알 것 같은 ‘자유주의’도 발화자와 맥락에 따라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고 있으며 의미의 혼동을 일으키게 한다. 정치 무대는 수많은 사람들의 다양하고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정치에서 말을 한다는 것,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 자체가 이런 복잡성을 전제하고 있다. 포퓰리즘의 경우는 최근 몇십년 동안 폭넓은 활용에도 그 말의 역사가 짧기 때문에, 용어 자체에 대한 담론과 개념화 작업이 두텁게 이루어지지 않아서 더 혼란스럽다.

그럼에도 보통사람들이 포퓰리즘(populism)을 이해하기 위한 열쇠는 그 말 자체에 있다. 말 자체가 ‘피플’(people)의 라틴어 어원 ‘포풀루스’(populus)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피플은 민중, 인민, 국민 등 우리말로 다양하게 옮겨 쓰이고 있다. 심지어 대중이란 말과 혼용되기도 한다. 포풀루스는 ‘태어나서 자란다’는 자연적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다. 그러므로 생명체로서 사람을 의미한다. 따라서 피플의 번역어로는 사람이란 말이 들어 있는 ‘인민’(人民)이 더 적합해 보이나, 잘 알려진 정치적 이유로 우리나라에서는 인민을 선호하지 않는다. 저 유명한 링컨의 연설문에서도 피플은 통상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으로 번역된다. 또는 민중으로 옮기기도 한다. 나는 피플의 번역어로 ‘사람들’이 좋다고 생각한다. 국가보다 ‘나라’를, 국민보다 ‘나라 사람들’을 선호한다.

‘사람들’은 소중하다. 사람에게 함께 공동체를 이루는 ‘사람들’보다 더 소중한 게 있을까. 포퓰리즘은 다수의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는지에 관한 문제이다. 포퓰리즘의 이해를 위해서는 로마 공화정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볼 수도 있다. 당시 포풀루스라는 말은 모든 나라 사람들은 아니지만 다수의 사람들을 가리켰다. 그 말은 평민 또는 서민이란 의미에 가까웠다. 로마 공화정은 귀족들로 구성되고 그들을 대변하는 원로원과 평민들의 민회 활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들 사이에는 각자의 이해에 따라 당연히 충돌과 갈등이 있었다.

로마사 해석에서 일찍이 ‘이해관계의 정치’라는 탁월한 식견을 가졌던 마키아벨리는 로마 공화정이 수백년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갈등을 조정하고 해결하는 ‘제도화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구체적인 제도는 평민을 대변하고 그들의 이익을 보호하는 호민관의 권위와 권한이었다. 오늘의 언어를 소급해서 적용하면 호민관은 긍정적인 의미의 포퓰리즘을 실천했다. 다른 한편 호민관이 자신의 권력을 확장하기 위해 갈등 조정이 아니라 편파적으로 평민을 위한 정책을 펼치거나 귀족과 결탁했을 때, 그는 부정적 포퓰리스트가 되었던 것이다.

다시 21세기로 돌아오자. 카스 무데는 “어떤 형태의 포퓰리즘이든 일종의 ‘민중’에 대한 호소와 ‘엘리트’에 대한 비난을 포함한다는 데에” 학자들은 대체로 동의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포퓰리즘이 언제나 기득권층에 대한 비판과 보통사람들에 대한 과찬을 포함한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현대의 포퓰리스트도 다수의 사람들을 위한 정치를 지향한다고 볼 수 있다. 적어도 기득권 정치 엘리트에 대해 상대적으로 ‘피지배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정치를 표방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무데도 말했듯이 왜 오늘날 포퓰리즘은 주로 부정적인 의미로 쓰일까? 이에 대해서도 전문 학자들은 꽤 복잡한 이론을 내놓는 것 같은데, 나는 우선 두가지 관점에서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첫째, 19세기 말 포퓰리즘이라는 말이 처음으로 현대 정치 무대에서 사용되기 시작했을 때, 그것은 민중이 행위 주체로서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민주적 공론의 장에 개진하는 긍정적인 정치 행위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20세기에서 21세기 초까지 부상했던 포퓰리즘은 주로 각 나라에서 ‘집권과 통치를 목표로 하는 정치 리더’들이 행위 주체로 나서는 정략적인 활동이기 때문이다.

이제 왜 일부 학자들이 언론 매체에서 사용하는 포퓰리즘은 엄밀히 말해 대중인기영합주의를 의미하는 ‘포퓰러리즘’(popularism)이라고 비판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혹자는 포퓰리즘은 인기영합주의가 아니라고 강변하기도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현대 정치에서 선거를 통한 집권 전략으로 자기만이 국민을 대표하고 대변한다는 정치 리더는 인기영합주의로부터 자유롭기 힘들다. 물론 그 둘은 등치되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날 포퓰리즘은 포퓰러리즘을 쉽게 포함할 뿐만 아니라, 민중선동(demagogy)적 요소까지 활용하기도 한다. 포퓰리즘은 오지랖이 넓다.

그렇기 때문에 포퓰리스트 지도자들은 온 국민이 수용한다는 ‘상식을 내세우고’ 민중과의 ‘직접 소통’을 강조하며 대의민주주의를 우회하는 정치를 시도할 가능성이 크다. 그들이 기존 정치 엘리트들을 공격하기 위해 ‘도덕성을 무기로’ 사용하는 것도, 그만큼 민중의 인기를 얻기에 효과적인 것도 없기 때문이다.

둘째, 언어 사용의 관점에서 오늘날 대부분의 포퓰리즘은 전적으로 ‘주장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자신은 소명감을 갖고 오로지 국민 편에 선다는 주장의 언어가 실행의 언어로 발전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주장이 거창하면 쉽게 배신의 언어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대부분의 포퓰리즘은 국민의 이름을 ‘내세운’ 정략적 언동일 가능성이 크지만, 국민의 이익을 ‘위한’ 정책 실행과 제도화를 위한 정치일 가능성은 작다. 다시 말해, 현대의 포퓰리스트가 다수의 사람들을 보호하는 성실한 호민관이 될 가능성은 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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