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순 칼럼] 윤석열 대통령님, 휴가 기간 이 책을 권합니다

한겨레 2022. 8. 2.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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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순 칼럼]4차 산업혁명과 기후위기 속에서 비정규직과 실업자가 양산되고, 돈으로 돈을 버는 이들이 피땀 흘려 일하는 임금 생활자의 종종걸음을 멀찌감치 따돌리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낡은 산업화 시대의 통치 방식이 아닙니다.
대통령실은 지난달 3일 북대서양조약기구 정상회의에 참석한 윤석열 대통령이 당시 김건희 여사와 숙소 인근을 산책하는 사진을 공개했다. 대통령실 제공

이진순 | 재단법인 와글 이사장

여름휴가는 잘 보내고 계십니까? 안팎의 산적한 난제를 두고 한가하게 휴가나 갈 때냐고 마뜩잖아하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숨 가쁘게 달려왔던 지난 석 달을 돌아볼 수 있는 이번 휴가가 대통령님 개인뿐 아니라 국민 모두를 위해 더없이 소중하고 긴요한 시간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대통령 지지율이 20%대까지 떨어졌다는 보도를 봤습니다. 저는 대통령님을 찍지 않았지만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지지율 추락이 전혀 반갑지 않습니다. 신뢰를 바탕으로 민관이 똘똘 뭉쳐도 헤쳐 나가기 어려운 국제 인플레이션과 미-중 갈등의 퍼펙트 스톰 앞에서 이렇게 출렁거리는 구심력을 가지고 뭘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의 생존과 안전을 위해서 더 신망받는 대통령이 되어주시길 간구하는 마음으로 이 편지를 씁니다.

대통령님은 법과 원칙, 상식과 공정을 누구보다 강조하는 분입니다. “미국 같은 선진국”의 사례로 법치주의를 주장하셨으니 저도 미국 사례를 들어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전환기 미국의 위상을 반석 위에 올려놓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을 아시지요? 프랭클린 루스벨트(FDR)와 구분해서 이름 앞글자를 딴 티아르(TR), 혹은 ‘테디’라는 애칭으로 불리죠. 공화당 출신의 테디는 취임 직후부터 “스퀘어 딜”(공평 정책)을 내세워 공정을 강조했습니다. 그의 통치 리더십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게 1902년 미국 탄광노조 파업 때입니다.

당시 광부 중엔 영어가 서툰 이민자들도 많았는데 하루 10시간씩 일하면서도 곤궁한 생활을 면할 수 없었습니다. 1902년 5월 탄광노조는 임금 인상, 노동시간 단축, 노조 인정을 요구하며 탄광과 철도 카르텔에 맞서서 파업을 시작했지만 그해 가을까지도 협상엔 진전이 없었습니다. 테디는 백악관으로 노사 대표를 불러 직접 중재에 나섰습니다. 파업의 원인을 조사하고 해법을 모색할 중재위원회를 구성하겠다는 테디의 제안에 노조는 동의했지만 사용자 쪽은 “범법자들과 타협할 수 없다”며 거부했습니다. 공정과 원칙을 강조하던 테디가 그 파국을 어떻게 풀었는지 아십니까?

테디는 1만명의 연방군을 투입해 탄광을 몰수하고 노사 합의가 이뤄질 때까지 연방정부 관리하에 운영하겠다고 폭탄선언을 했습니다. 그의 단호한 태도에 놀란 사용자 쪽은 결국 무릎을 꿇었고 163일에 걸친 파업은 종결되었습니다. 위원회의 최종 결정은 10% 임금 인상, 9시간 노동이었고, 위원회의 활동 기록은 이후 다른 노사 갈등 해결의 지침서가 되었습니다.

테디의 유례없는 강경책에 대해 측근들의 반대도 극심했습니다. 최측근인 녹스 법무부 장관은 “대통령은 파업에 책임이 없고, 민간의 일에 끼어들 권한도 없으며, 끼어들어도 실익이 없다”며 대통령을 말렸습니다. 자본가와 척을 지면 다가올 중간선거에서 불리해질 거란 만류도 거셌습니다. 그러나 테디는 “대통령이 개입해 재앙의 확산을 막지 않는다면 정부가 무엇 때문에 존재하겠는가?”라며 “신분 고하, 빈부 격차를 막론하고 모두가 공정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소신을 기필코 관철했습니다.

테디는 당시의 시대적 변화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던 듯합니다. 거대 독점자본의 출현, 노동자들의 좌절과 불만 속에서 증폭되는 사회경제적 갈등을 방치하면 지속가능한 자본주의가 불가능할 것이고 대국의 꿈도 물 건너갈 것이란 점을 말이죠.

그로부터 120년이 지났습니다. 4차 산업혁명과 기후위기 속에서 비정규직과 실업자가 양산되고, 돈으로 돈을 버는 이들이 피땀 흘려 일하는 임금 생활자의 종종걸음을 멀찌감치 따돌리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낡은 산업화 시대의 통치 방식이 아닙니다. 전환적 리더십이 필요할 때, 가난한 노동자들을 쥐어짜고 부자감세를 하는 것으로 미래를 열 수 없습니다. 대통령님! 이번 휴가는 멀리 안 가시고 휴식과 재충전에 집중하신다 들었습니다. 그것도 좋겠습니다. 편안히 영화도 보고 산책도 즐기십시오. 그러다 혹 짬이 나면 수천억 손해배상소송의 위협을 받고 있는 대우조선해양 하청업체 노동자와 그 가족들 생각도 잠시 해주십시오. 지난 6월 정부가 인혁당 사건 피해자에 대해 초과지급 배상금의 이자를 면제하기로 결정한 것처럼, 정부가 왜 존재하는지 보여주는 정치력을 발휘해주시면 정말 좋겠습니다. 모쪼록 이번 휴가가 새로운 대통령 리더십을 세우는 감동적 전환점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국민들의 이런 마음을 부디 헤아려주시기를.

 추신: 제가 테디에 대해 인용한 내용은 퓰리처상을 받은 도리스 컨스 굿윈의 <혼돈의 시대 리더의 탄생>이란 책에 상세히 담겼습니다. 휴가 동안 일독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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