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로시 리스크' 현실화, 대만해협 1996년 이후 최대 위기..미·중 갈등 관리 시험대 올라

베이징 | 이종섭 특파원 2022. 8. 2. 17:15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아시아를 순방 중인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왼쪽)이 2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아즈하 아지잔 하룬 말레이시아 하원의장과 악수하고 있다. 펠로시 의장은 말레이시아 방문을 마치고 이날 저녁 대만으로 이동할 예정이다. 로이터연합뉴스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의 대만 방문으로 대만해협이 20여 년 만에 최대 위기에 봉착했다. 우려했던 ‘펠로시 리스크’가 가시화되면서 미·중 관계도 새로운 격랑에 휩싸일 것으로 보인다. 군사적 충돌까지 우려되는 상황에서 양국이 대만해협 위기와 갈등 상황을 어떻게 관리해 나갈지가 큰 숙제로 남게 됐다.

TVBS 방송 등 대만 현지매체들은 펠로시 의장과 일행을 태운 C-40C 전용기가 2일 오후 10시45분쯤 타이베이 쑹산공항에 도착했다고 보도했다. 앞서 펠로시 의장은 이날 오후 아시아 순방 두 번째 기착지인 말레이시아의 군 기지를 떠나 대만으로 향했다. 이 비행기는 단거리인 남중국해를 통하지 않고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을 경유하는 우회 경로로 대만으로 비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펠로시 의장은 타이베이 시내 호텔에 묵은 뒤 다음날 오전 차이잉원(蔡英文) 대만 총통을 면담하고 입법원(의회)을 방문한 후 대만을 떠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펠로시 의장의 대만 방문은 중국의 군사적 위협 속에서 극비에 가깝게 추진됐다. 그는 지난달 29일 아시아 순방 일정에 나서면서도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한국, 일본 방문 계획만을 밝혔을 뿐 대만 방문에 대해서는 “보안상 절대 말하지 않겠다”며 확인을 거부했다. 방문이 임박해 현지 언론을 통해 구체적 방문 시점이 알려졌지만 대만 정부도 끝까지 공식적으로 펠로시 의장의 정확한 방문 일정을 공개하지 않았다.

이 같은 방문 추진 과정은 미·중 관계에서 펠로시 의장의 대만 방문이 갖는 민감성을 반영한다. 미 하원의장의 대만 방문은 1997년 뉴트 깅그리치 하원의장 방문 이후 25년 만에 처음이다. 미국 내 권력 서열 3위인 하원의장의 대만 방문은 그 자체로서 갖는 상징성이 크다. 중국은 미 고위급 인사의 대만 방문이 1979년 수교 당시 합의한 ‘하나의 중국’ 원칙을 위배하는 것으로 본다. 중국은 깅그리치 의장이 야당 소속이었던 것과 달리 펠로시 의장은 여당 소속이라는 점에서 이번 방문을 미국 정부가 허용한 도발 행위로 간주하고 있다.

왕이 중국 외교담당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은 이날 기자들과 만나 “대만 문제에서 신의를 저버리고 멸시하는 것은 미국의 국가신용을 더욱 파탄나게 할 뿐”이라며 미국을 “평화의 파괴자”라고 비난했다. 그는 펠로시 의장을 겨냥해 “미국의 일부 정치인들은 오로지 자신의 이익만 생각해 공공연히 대만 문제에서 불장난을 하고 있다”며 “14억 중국 인민과 적이 되면 결코 좋은 결말이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화춘잉(華春瑩)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이날 정례 브리핑에서 “미국 의회는 미 정부의 구성 부분으로 미국 정부가 승인하고 약속한 외교 정책을 엄격히 준수해야 한다”며 “미 하원의장이 군용기를 타고 대만을 방문하는 것은 결코 비공식적 행위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펠로시의 대만 방문은 어쩌다 미·중 ‘치킨게임’으로 흘렀나?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의 대만 방문을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첨예한 갈등은 대만 문제가 미...
https://www.khan.co.kr/politics/defense-diplomacy/article/202208021347001

펠로시 의장이 대만 방문을 강행하면서 미·중 관계와 대만해협의 긴장감은 더욱 고조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그동안 펠로시 의장의 대만 방문을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고 경고해 온 중국은 실제 이를 실행에 옮길 태세다. 화 대변인은 이날 “우리는 이미 미국을 향해 여러 차례 원칙적 입장을 밝히고 엄중한 교섭을 제기했다”며 “미국이 이 문제의 중요성과 민감성, 일단 발생했을 때의 위험성을 명확히 이해하길 바란다 ”고 말했다. 이어 “미국·대만의 유착과 도발이 먼저고 중국 측의 정당방위는 나중”이라며 “미국 측이 제멋대로 행동한다면 어떤 반격 조치도 정당하고 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로이터통신은 펠로시 의장의 대만 방문 일정이 알려진 이날 중국 군용기 여러 대가 대만해협 중간선을 근접 비행했으며 군함 여러 척도 인근에 머물고 있다고 보도했다. 중국은 또 대만과 마주 보고 있는 푸젠(福建)성 일대의 항공 교통을 부분적으로 통제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대만 지역을 담당하는 중국 인민해방군 동부전구는 전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상륙 군사훈련 동영상을 공개하며 “진지를 정비하고 적을 기다리며 명령 즉시 싸우겠다. 침범하는 모든 적을 매장하겠다”는 비장한 글을 올리기도 했다.

미국과 대만도 대응 태세를 갖추고 있다. 존 커비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전략소통조정관은 이날 브리핑에서 “중국의 행동은 긴장을 증대시키는 의도치 않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며 “우리는 매우 면밀하게 주시하고 하원의장이 안전한 방문을 할 수 있도록 확실히 할 것”이라고 밝혔다. 대만 중앙통신사는 대만군이 이날부터 오는 4일까지 인민해방군에 대응한 군사적 대비태세의 단계를 높일 것이라고 보도했다.

다만 펠로시 의장의 대만 방문 기간에 중국이 직접적 충돌을 초래할 수 있는 위험한 군사적 행동을 감행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분석이 많다. 미 입법부 수장을 상대로 직접적인 군사적 도발을 감행할 경우 미·중 양측이 모두 원치 않는 걷잡을 수 없는 파문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펠로시 의장의 대만 방문 이후에도 한동안 대만해협의 군사적 긴장감 고조가 불가피해 보인다. 중국은 펠로시 의장의 대만행과 관련해 노골적으로 1996년의 대만해협 위기 상황을 언급하고 있다. 1995년 당시 리덩후이(李登輝) 대만 총통이 모교인 코넬대 강연을 위해 미국을 방문하자 중국은 이듬해 3월 미 항공모함이 인근에 집결하기 전까지 여러 차례 대만해협에 미사일을 발사하며 위협했다. 당시와 같은 상황이 재현되고 이전보다 군사력을 강화한 중국의 위협이 더 거세질 수 있다는 것이다. 커비 조정관은 이날 “중국은 장단기적으로 추가 조치를 취하려는 것으로 보인다”며 “잠재적 조치로는 대만해협 내에서 대만 밖으로 미사일을 발사하는 것과 같은 군사적 도발이나 대만 방공식별구역에 대규모 항공기가 진입하는 작전 등이 포함될 수 있다”고 말했다.

대만해협의 긴장 고조는 미·중관계 악화로 직결되는 사안이다. 이번 위기 해결 과정은 향후 양국 간 위기 관리에 있어 중요한 시금석이 될 전망이다. 장쥔(張軍) 유엔 주재 중국대사는 이날 “대만 문제는 중국의 핵심 이익과 관련된 문제”라며 “펠로시 의장의 대만 방문은 명백히 도발적인 것이며 하나의 중국 원칙을 위반하는 것으로 중·미관계를 심각하게 파괴할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커비 조정관은 “우리는 미끼를 물거나 무력 과시에 동참하지 않겠지만 동시에 두려워하지도 않을 것”이라며 “서부 태평양 바다와 상공에서 수십 년간 해온 대로 작전을 계속하고 대만과 대만해협의 평화·안정을 계속 지원할 것”이라고 밝혔다.

베이징 | 이종섭 특파원 nomad@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