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자보자 하니까 보자기"..한국식 대사에 빵 터진 관객

이용익 2022. 8. 2.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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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흥행 좌우하는 번역
브로드웨이작품 '킹키부츠'서
"5성호텔 요리로 나온 정어리"
장소에 안맞는 사람 뜻하지만
국내 관객 공감 어려워 개사
노래 발음과 발성 고려해
열린 모음·받침 없는 가사로
뮤지컬 `킹키부츠`는 영국 이야기를 다뤘지만 번역을 통해 한국 관객도 즐길 수 있는 장면을 만들었다. [사진 제공 = CJ ENM]
영국 실화를 토대로 미국에서 만들어진 뮤지컬 '킹키부츠'의 한국 공연. 구두 공장에서 일하는 호탕한 여성 노동자 트리시가 공장에 찾아온 드래그퀸 롤라에게 "보자 보자 하니까 보자기로 보여? 가만히 있으니까 가마니로 보여? 아임 낫 보자기 아임 낫 가마니 I'm MC 트리시"라며 랩으로 맞서자 충무아트센터 관객석에서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사실 이 장면의 원래 대사는 "네가 뭔데? 5성급 호텔 요리에 나온 정어리같이 생겨가지고는(Who do you think you are? Coming to our town lookin' like a penny sardine on a five-star plate)"이다. 어울리지 않는 곳에 찾아온 이를 비판하는 내용이지만 국내 관객들에게 잘 다가오지 않는 표현이라 고민 끝에 재기 넘치는 랩으로 바꾸는 시도를 한 것이다.

한국 뮤지컬 시장이 커지면서 해외 라이선스 뮤지컬 번역의 중요성 또한 높아지고 있지만 단순히 직역하는 것으로는 안 된다. 무대가 오르는 곳의 상황에 맞게 해야 공연의 맛을 살릴 수 있다. 올여름 각각 '킹키부츠'와 '미세스 다웃파이어'를 번역하며 뮤지컬 관객들과 만나는 이지혜 작곡가, 황석희 번역가 역시 "완벽한 번역은 있을 수 없고, 관객들의 마음이 열리도록 완성도를 높여가는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어차피 원문 그대로 살리는 게 목적이 아니라면 한국인 관객들을 위해 적절한 센스를 발휘해야 한다. 이지혜 작곡가는 초록색 피부의 마녀 엘파바가 등장하는 '위키드'를 번역할 때 "브로콜리가 화났나 보네?"라는 대사에서 브로콜리를 샤인머스캣으로 바꿔 웃음을 유도했고, 이번 '킹키부츠'에서도 "버건디색"을 "육포색", "비싼데 품질이 떨어지는 부츠"를 "비싸구려(비싼+싸구려)"라고 바꿨다. 주인공 찰리를 부를 때도 "찰 사장"이라는 한국식 호칭을 쓰기도 했다. 황석희 번역가가 맡은 '미세스 다웃파이어' 역시 원문에서 트럼프와 요다, 골룸, 보랏을 차례로 성대모사하는 부분이 있는데 한국 버전에서는 이경영과 최민식 등 관객들에게 더욱 익숙한 인물로 바뀌었다.

다만 과한 번역은 혹평이 나올 수 있기에 상황을 적절히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특정 시대의 인물이나 유행어 등을 섣불리 넣었다가는 다음 공연에서 빠지기도 한다. '킹키부츠'에서도 예전에는 "마돈나처럼 보이면 드래그퀸, 트럼프처럼 보이면 여장남자"라는 대사가 있었다가 미국 정권이 바뀌며 자연스럽게 사라지기도 했다.

게다가 뮤지컬에서는 노래를 부를 때 원어를 그대로 살리는 오페라와 달리 가사까지도 번역해야 하기에 말의 길이와 운율 역시 고려해야 한다. 그 자신이 번역뿐 아니라 뮤지컬 작곡도 경험해본 이지혜 작곡가는 "배우들이 노래를 잘 부를 수 있어야 하기에 열린 모음이나 받침이 없는 가사가 좋다. 'ㅏ' 'ㅣ'는 소리 내기 좋지만 'ㅡ' 'ㅜ'나 복모음은 고음을 내기 힘들다"고 말했다. 원래 영화와 드라마 번역으로 잘 알려졌지만 '썸씽로튼' 이후 뮤지컬 번역까지 영역을 넓힌 황석희 번역가 역시 뮤지컬 번역의 특수성을 느끼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는 "예전에 '하데스타운'을 번역할 때 솔(soul) 장르의 노래가 많았는데 악보에 일일이 가사를 붙이는 경험이 많지 않아서 리듬 때문에 굉장히 고생했다"고 말했다.

이렇다 보니 뮤지컬 번역은 혼자 책상 앞에 틀어박혀서 고민만 하기보다는 현장과의 소통이 필수적이다. 연습실에서 노래를 불러보다가 편한 가사로 바꾸자는 요구가 나오기도 해서다. 실제로 최근에는 가사 번역에 음악감독 이름도 같이 올라가는 경우도 잦다.

이뿐만이 아니다. 뮤지컬 팬덤이 커지면서 최근에는 아직 국내에 들어오지 않은 뮤지컬을 팬들이 아예 직접 번역해서 공유하는 경우가 있을 정도다. 미국에서 인기를 끈 '해밀턴'의 경우 미국 건국 역사를 다룬 내용이라 미국 외에는 영국, 호주 정도만 공연되고 있지만 국내에서도 이를 번역한 이들이 있다. 이런 현상에 대한 번역가들의 입장도 긍정적이다. 이지혜 작곡가는 "건강한 의미의 좋은 덕질"이라고 평가했고, 황석희 번역가는 "불가피한 축약, 누락이나 비속어 사용 제약 등 번역 과정의 애로들을 점점 더 잘 이해하실 것"이라고 말했다.

[이용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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