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 전멸' 위험 경고 속에 개막한 NPT 평가회의.."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NPT 3대 축 흔들어"
핵확산금지조약(NPT) 평가회의가 1일(현지시간) ‘핵무기에 의한 인류 절멸’ 위험에 대한 경고와 성토 속에 개막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 가속화, 불투명한 이란핵합의(JCPOA) 복귀 전망 등 일련의 사태는 NPT 체제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을 뿐 아니라 핵전쟁 가능성을 가중하고 있다는 우려가 쏟아졌다. 핵확산과 핵전쟁에 대한 높은 우려에도 불구하고 오는 26일까지 열리는 이번 회의가 유의미한 결론을 도출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는 전망도 나왔다.
뉴욕 유엔본부에서 이날 열린 NPT 평가회의 개막식의 최대 화두는 우크라이나 전쟁이었다. 핵보유국인 러시아가 지난 2월 핵을 보유하지 않은 우크라이나를 침공함으로써 핵보유국의 핵군축, 비핵보유국의 핵비확산,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등 NPT의 3대 축을 위협했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전쟁 개전 초기 핵무기 부대의 준비 태세 강화를 명령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군사적 개입을 차단하기 위해 핵무기 사용 가능성을 시사한 것이다. 또한 러시아군은 최악의 사고가 발생했던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를 한때 점령함으로써 방사능 누출 우려를 키웠고, 유럽 최대 규모인 자포리자 원전을 점령한 상태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 대표들은 핵보유국으로서 1970년 출범한 NPT를 떠받칠 책임이 있는 러시아가 NPT를 정면으로 위협했다고 비판했다.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러시아의 행동은 그들이 1994년 우크라이나에 제공한 보장과 상반된다”면서 “주권과 독립을 지키고 침공을 막으려면 핵무기를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다른 나라들에 최악의 메시지를 줄 것”이라고 말했다. 핵보유국인 미국·영국·러시아는 1994년 우크라이나와 핵무기를 포기하는 대가로 영토보전과 주권을 보장하는 ‘부다페스트 각서’를 체결했는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함으로써 다른 나라들에 ‘안보를 지키려면 핵무기가 필요하다’는 잘못된 신호를 보냈다는 것이다.
반면 러시아는 NPT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고 반박했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회의에 보낸 서한에서 “러시아는 NPT 조약국으로서 조약의 정신과 내용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면서 “미국과의 핵무기 감축 협정 역시 완전히 지켜지고 있다”고 밝혔다. 푸틴 대통령은 “핵전쟁에 승자는 있을 수 없으며, 그런 전쟁은 절대 시작돼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북한 핵 개발 역시 중대한 문제로 지적됐다. 블링컨 장관은 “우리가 오늘 모인 가운데 북한은 7차 핵실험을 준비하고 있다”고 비판했고, 함상욱 외교부 다자외교조정관도 “북한은 NPT 체제를 악용해 공개적으로 핵무기를 개발하는 유일한 나라”라고 말했다. 미국·영국·프랑스·북아일랜드는 회의 개막에 앞서 발표한 공동성명을 통해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 중단을 촉구하면서 “우리는 여전히 북한이 가진 모든 핵무기의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해체에 전념하고 있다”고 말했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중동, 한반도에서부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이르기까지 핵 위기가 곪아가는 이 시기에 거의 1만3000개의 핵무기가 전 세계 무기고에 보관돼 있다”면서 “인류는 한 번의 오해, 한 번의 계산 착오로 ‘핵 전멸’에 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미국은 NPT 평가회의 개막에 즈음해 미·러 사이의 유일한 핵군비통제 협정인 신전략무기감축협정(뉴스타트)을 대체할 새로운 협정을 추진할 뜻을 밝히는 등 핵보유국으로서 책임 있는 자세를 과시하기 위한 제스처도 취했다. 뉴스타트 협정은 미·러 양국의 실전배치 핵탄두를 1550기 이하로 제한하고, 핵탄두 운반수단도 제한하는 내용으로 바이든 대통령과 푸틴 대통령은 지난해 이 협정을 5년 연장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성명에서 “미국 정부는 2026년 만료하는 뉴스타트를 대체할 새로운 무기 억제의 틀을 신속히 협의할 준비가 돼 있다”면서 중국도 이 협상에 참여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블링컨 장관도 회의에서 미국은 비핵보유국에 대해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고 핵무기 사용 위협을 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지키고 있다면서 “핵무기가 존재하는 한 미국 핵무기의 근본적인 역할은 미국과 우리의 동맹국 및 우방국들에 대한 핵 공격을 억제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미국과 동맹국, 우방국들의 중대한 이익을 방어하기 위한 극단적인 상황에서만 핵무기 사용을 검토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미국은 북한의 핵 위협에 맞서 한국에 대해 핵우산을 제공하고 있다.
NPT는 1970년 발효된 이후 5년마다 평가회의를 열고 있다. 10번째 평가회의는 2020년 열릴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연기돼 이번에 7년만에 열리게 됐다. 군비통제 전문가인 패트리샤 루이스는 AP통신에 “핵무기를 사용할 수도 있다는 푸틴 대통령의 위협은 전 세계를 충격에 빠트렸다”면서도 이번 평가회의에 큰 기대를 걸기는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현재의 NPT 체제를 평가하고 강화하려면 러시아의 행동과 위협을 지적할 수 밖에 없는데 러시아의 강력한 반대 때문에 공동성명에 이를 포함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2015년 열린 평가회의도 공동성명을 채택하지 못하고 끝났다.
워싱턴 | 김재중 특파원 herme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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