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던 일' 된 대통령실 국민제안, '어뷰징'만의 문제였을까
국민제안 톱10 선정한 심사위원도 '비공개'.."위원들이 신상 공개 꺼려"
공론화 과정 패스, 투표 방식도 '일방통행'이란 지적도
(시사저널=구민주 기자)
'민의 수렴'을 위해 윤석열 정부가 추진한 '국민제안' 제도가 '어뷰징(중복·편법 전송)' 사태로 첫 투표부터 무효 처리됐다. 문재인 정부의 '청와대 국민청원'을 폐기하고 "국민과 직접 소통하겠다"는 윤 대통령의 의지를 반영해 출범한 국민제안이 첫발부터 체면을 구기게 됐다. 이를 두고 부실한 투표 시스템은 물론, 민감한 이슈들을 사회적 공론화 없이 심사·선정한 과정까지 국민제안을 둘러싸고 총체적인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당초 국민제안은 대국민 온라인 투표를 통해 '우수 제안' 3건을 선정, 정책화하겠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1일 대통령실은 돌연 "투표에 어뷰징 사태가 있어 선정하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후보로 올라왔던 안건 10건이 모두 56~57만 표를 얻어, 투표 변별력을 잃은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10건 중 최다 득표한 '대형마트 의무휴업 폐지'(57만7415표)와 최저 득표한 '외국인 가사도우미 취업비자 허용'(56만784표) 사이 표차는 단 1만6000여 표에 불과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해외 아이피(IP) 등을 거론하며 "어뷰징을 통해 우리가 하려는 제안 제도를 방해하려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이번 촌극을 두고 "예견된 결과였다"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국민제안을 신설할 당시 "매크로를 통해 여론을 만드는 걸 방지하기 위해 100% 실명제로 운영한다"고 밝혔던 것과 달리, 이번 투표 과정에선 실명인증은커녕 투표 홈페이지 로그인조차 불필요했다. 어뷰징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도 마련해놓지 않았던 것이다.
대통령실, '우수 제안' 선정한 '심사위원' 공개 요구 거부
그러나 어뷰징 사태보다 더 큰 문제는 '국민과의 직접 소통'을 강조하며 만들어진 국민제안의 절차가 다소 '일방향적'으로 이뤄졌다는 것이다. 이번에 투표에 부쳐진 10개 안건은 그동안 온·오프라인으로 접수된 제안 1만2000여건 가운데 선정된 '우수 제안'들이다. 이는 대통령실에서 임명한 국민제안심사위원 11인에 의해 지난 7월20일 낙점되었다.
선정된 10개 안건 중 윤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었던 동시에 사회적 갈등이 우려되는 '대형마트 의무휴업 폐지' '업종·직종별 최저임금 적용' 등이 포함되자 당장 '정부나 심사위원들 입맛에 따라 선정되는 것 아니냐'는 질문이 제기됐다. 이에 대통령실에선 "생활밀착과 시급성 등을 기준으로 제도 개선이 필요한 걸 전문가들이 뽑았다"며 "이들의 전문성과 진정성을 믿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전문성과 진정성을 갖춘 심사위원회는 누구로 구성돼 있을까. 시사저널은 우수제안 10개가 선정·발표된 7월20일, 대통령실에 '국민제안심사위원의 신분 및 이력에 대한 정보'를 요청했다. 이에 대통령실 관계자는 "심사위원들이 민간인들로 구성돼 있는 만큼 자신의 신상이 공개되는 데 부담을 느낄 수 있다"며 공개를 거부했다. 대통령실에선 "문재인 정부 청와대 국민청원의 정량 평가(20만명 이상 동의)에 편견과 비합리가 개입될 수 있어 '정성 평가'를 우선 실시하기로 했다"고 설명했지만 정성 평가의 주체가 베일에 가려져 있는 것이다.
'좋아요'만 허락된 투표 절차, 안건 설명도 부족
이렇게 선정돼 투표에 부쳐진 10개 안건에 대해 국민들이 표현할 수 있는 의사 방식은 '좋아요' 뿐이었다. 투표 시 '좋아요'를 누르는 기능만 있고, 안건에 대한 반대 의사를 표시하거나 이견을 개진할 댓글창 등의 기능은 갖춰져 있지 않았다. 각 안건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도 게재되지 않았고, 한 줄짜리 제목만 보고 투표를 해야 했다.
각 안건마다 추후 정책화될 경우 사회적 파급 효과가 상당한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앞선 사회적 공론화는 물론, 선정 및 투표 과정조차 '일방통행'에 가까웠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이번 어뷰징 사태 후 대통령실 관계자는 "SNS·이메일·문자 인증 또는 본인 실명제 중 어떤 수준에서 본인인증 제도를 도입할지 숙고해 제도 개선을 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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