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연 사건'으로 번아웃.. 동물을 살리며 편안함을 찾았죠"[플랫]
“대학원에서 여성학을 전공하고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활동하며 행복하고 가슴뛰고 즐거운 순간도 많았어요. 하지만 소진되고 힘들어지는 순간이 왔어요. ‘고 장자연씨 사건’이 유독 떠올라요. 엄정한 수사를 촉구하고 기자회견도 하고 활동을 했는데, 피의자로 지목된 사람들이 모두 무혐의로 기소조차 되지 않았어요. 무기력해지면서 번아웃이 왔어요. 그러다 한 여성 수의사가 ‘동물병원에선 말 할 필요가 없는데’라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살면 행복할 것 같았어요. 어렸을 때 수의사가 되고 싶었던 꿈이 떠오른거죠.
허은주씨(45)는 그렇게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에서 수의사가 됐다. 정말 말 없이 동물만 치료할 수 있었을까? 답은 “아니요”다. 동물은 아파도 스스로 말을 할 수 없다. 치료비를 감당하며 아픈 동물을 치료할지 말지도 전적으로 보호자에게 달렸다. 동물을 데려온 보호자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
“동물병원에서 만나는 분들은 다 동물을 아끼고 좋아하는 분들이 많아요. 동물을 치료하기 위해 병원을 찾은 분들이니까요. 고통을 줄이면서 최대한 나은 조건으로 동물을 돌보기 위해 상의해야 하는 관계이니 안정감과 따뜻함이 있습니다. ‘고 장자연씨 사건’ 등으로 활동을 할 땐 상대방이 성차별적·여성혐오적 발언을 할지도 모른다는 데서 오는 방어의식이 항상 있었어요. 그런데 동물병원에선 동물을 살리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니 일부러 방어할 필요가 없죠. 편안함이 생겼어요.”
서울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전북대학교 수의대를 졸업한 뒤 전라북도 정읍에 동물병원을 열었다. 이제 병원 문을 연지 7년째다. 허 수의사가 동물병원에서 만난 동물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집 <꽃비 내리는 날 다시 만나>(수오서재)를 펴냈다. 지난달 25일, 휴진일인 월요일을 맞아 서울을 찾은 허 수의사를 서울역 인근 광장에서 만났다.
책 제목의 ‘꽃비’는 허 수의사가 임시보호했던 작은 강아지다. 꽃비의 ‘엄마’가 갑자기 쓰러져 세상을 떠나자 장례식장에서 꽃비를 보고 ‘엄마’의 친한 친구가 입양을 결정한다. “자기 강아지를 얼마나 사랑했으면 ‘꽃비’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을까. 하늘에서 비처럼 내리는 꽃. 웬만한 애정으로는 짓지 못할 이름이다.”
세상엔 꽃비처럼 사랑받는 동물들만 있는 건 아니다. 동물병원엔 다양한 보호자들이 찾아온다. 최선을 다해 동물을 치료할 의지를 가진 보호자, 아직 살 수 있는 동물인데 치료비 감당이 힘들어 안락사를 시키려는 보호자, 병원 문 앞에 아픈 동물을 버려놓고 가는 사람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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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안타까운 것은 번식용 농장에서 태어나 펫숍에서 판매되는 동물들이다. 시뻘겋게 부어 피고름이 흐르는 귀 때문에 병원을 찾은 불도그를 데려온 사람은 불도그 생산업자였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날렵한 귓바퀴를 위해 마취도 없이 귀를 자르고 솜이불을 꿰매는 명주실로 귀를 봉합했다. 그는 “2개월된 강아지는 통증을 못 느껴서 마취를 안 해도 된다고 들었다”고 변명한다. 한 펫숍 사장은 그가 탈장이라고 진단한 치와와에 대한 환불 요구가 들어오자 병원에 항의 전화를 하며 “시골에서 그렇게 병원 해서는 오래가기 힘들텐데!”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택배상자에 실려 고속버스로 배송된 아기 고양이에게 범백혈구감소증이 있다고 하자, 데려온 사람은 업체에 이야기해 ‘교환’하기로 했다고 말한다.
“최소 비용으로 최대 이윤을 창출해야 하는 펫 산업의 상품으로 유통되는 동물들은 가장 열악한 환경에 노출된다. 펫숍의 투명창에 전시되는 동물들은 대부분 이런 개 농장에서 태어나 판매되는 상품이다. 누구나 자신이 입양하고 함께 살 작은 강아지가 개 농장에서 겪어야 했던 일을 알게 된다면 펫숍에서 동물을 구입하지 못할 것이다.” “동물이 상품으로 유통된다는 것은 환불·교환·반품의 대상이 된다는 걸 의미한다. 반려나는 이름을 붙인 가족 구성원으로 불리는 있는 한편에서는 폐기처분이 가능한 상품으로 유통된다.”
허 수의사의 반려새 사랑이는 매력적이다. 눈부신 하얀색 깃털에 신비한 푸른색 눈주름을 지닌 사랑이는 코카투(유황앵무)다. 사랑이는 그가 수의대 시절 실습하던 동물병원에서 만났다. 8차선 대로변에서 날개가 꺾인 채 구조된 사랑이. 유독 경계심이 많던 사랑이가 허 수의사에게 마음을 열고 한 식구가 되기까지의 과정은 아름답다.
“사랑이는 제멋대로에다 좋고 싫고가 확실해요. 날지 못해서 높은 곳은 부리와 발톱을 이용해 오르고 내리고 뛰어 다녀요. 마음이 급할 땐 몸을 웅크리고 바닥으로 툭 떨어져요. 아마 아파트에서 기르던 코카투가 창문이 열리자 밖으로 날아가 달려오는 차에 부딪힌 것 같아요. 아마 사랑이가 멀리 비행한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닐까요.”
어린 시절 한쪽 날개를 잃은 사랑이는 오랜 입원생활 속에 생긴 습관이 있다. 부리로 깃털을 정리하다가 상처가 생기면 상처를 파고드는 ‘자해행동’이다. 상처가 깊을 땐 ‘넥카라’를 씌워 보호한다. 어린시절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시작된 자해행동이라 고치기가 어렵다고 했다.
“처음엔 사랑이를 고쳐보려고 노력했지만, 불가능했어요. 저는 사랑이를 좋아해 함께 살기로 했을 뿐 바꿀 순 없으니까요. 이제 일상으로 받아들이고 있어요. 기쁘고 행복한 순간도 많아요. 사랑이가 나무 가지에 앉아 바람이 불어오면 한쪽 날개를 활짝 피고 펄럭이는데, 그땐 자기가 날고 있다고 느끼는 것 같아요.”
📌싸움소, “보이나요 나의 눈물이, 들리나요 나의 울음이”
허 수의사의 동물에 대한 관심은 반려동물을 넘어 닭·소와 같은 산업동물, 야생동물에게까지 확대된다. 사람에 지쳐 수의사가 됐지만, 활동가였던 그는 변하지 않았다. 우연히 소싸움 경기장을 발견하고 들어가 하기 싫은 싸움을 주인손에 이끌려 강제로 하는 소, 부상을 입고 피를 흘리는 소를 보며 충격을 받는다. 정읍에서 소경기장을 짓는 사업에 반대하는 활동에 적극 나서며 1인 시위를 하기도 했다. 또 트럭 짐칸에 박스채로 층층이 쌓인채 실려가는 닭들의 비명을 듣고 사랑이를 떠올린다. 그는 “이런 수송 방식은 고문이다. 사랑이가 겪지 않아도 될 고통을 닭들이 겪는 것은 당연한가?”라고 질문한다.
허 수의사의 인생은 한 번 크게 바뀌었다. 그러나 그가 세상의 다른 존재의 고통에 반응하고, 부당함을 바로잡기 위해 행동한다는 점에서 그의 삶은 변하지 않았다.
“페미니즘은 답답함과 부조리함을 설명할 언어를 주고 해방감을 주었어요. 동물에 대해 알게 되면서 페미니즘과 비슷한 느낌이 들어요. 당연해 보이는 것에 문제제기 하는 힘이 생겨요. 펫숍이나 소싸움에 대한 문제의식도 마찬가지죠. ‘원래 그렇다’는 말을 사용하면서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그런 걸 볼 수 있는 힘을 얻었어요.”
허 수의사는 쥐를 상대로 한 동물실험, 사망한 군견으로 해부실습을 하면서 떠올랐던 ‘윤리적 질문’들을 공부에 쫓겨 직면하지 못했던 수의대 시절을 회상하며 말한다.
“질문을 미뤄두는 관성은 삶을 다른 국면으로 이동시킬 뿐이다.…마음 깊은 곳에서 울리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된다. 답을 찾지 못할 수 있겠지만 자기 자신만의 질문을 품고 답을 찾는 매일의 삶은 우리를 행복 쪽으로 데려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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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경 기자 samemind@khan.kr
플랫팀 twitter.com/flatflat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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