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자본잠식에 빠진 재계, 총수 일가 밀어주다 허리 휜다
100개 회사 중 8개꼴로 자본잠식..차입금과 내부거래로 수명 연장
(시사저널=박창민 기자)
자본잠식에 빠진 국내 30대 재벌그룹의 계열사 중 상당수가 총수 일가의 개인 회사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기업은 수년간 적자에 허덕인 탓에 자본금이 바닥난 상태다. 자본잠식 기업은 대체로 모기업의 차입금과 내부거래 등에 의존하고 있다. 일부 대기업은 공격적인 인수·합병(M&A)으로 몸집을 불렸다가 되레 자본잠식 기업들까지 떠안으면서 골머리를 앓고 있는 모습이다.
자본잠식이란 기업의 누적 적자가 커져 그동안 발생했던 이익잉여금이 바닥나고 투자한 원금(자본금)까지 까먹은 상황을 말한다. 쉽게 말해 곳간이 텅텅 비어 사실상 부실기업으로 전락했다는 의미다. 기업으로서는 회사 문을 닫아야 하는 심각한 상황일 수도 있다.
30대 재벌기업, 계열사 126곳 자본잠식
시사저널이 2022년 공정거래위원회가 지정한 30대 기업집단 소속 1650개 계열사를 전수조사한 결과, 자본잠식 상태에 빠진 회사가 126곳에 달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100개 중 8개꼴로 출자한 자본금을 까먹고 있는 것이다. 30대 기업집단 전체 계열사의 7.63%에 해당하는 수치다.
기업집단별로 자본잠식 계열사를 보면 재계 서열 25위 중흥건설이 19곳으로 가장 많았다. 이는 전체 계열사 55곳 가운데 34.54%에 달하는 수치다. 이어 카카오 18곳(전체 계열사 136개·비율 13.23%), 네이버 11곳(54개·20.37%), 현대자동차 10곳(57개·17.5%) 등이 자본잠식 상태에 빠진 것으로 조사됐다.
반면, 자본잠식 계열사가 한 곳도 없는 기업집단도 있다. 현대중공업, 농협, KT, 두산, 미래에셋, S-OIL, 현대백화점 등 7개 기업집단은 자본잠식 기업이 전혀 없는 것으로 조사되어 다른 대기업들과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 외에 삼성과 롯데, 포스코, 한진 등 대기업 8곳은 자본잠식 계열사가 1개인 것으로 나타났다.
물론 자본잠식에 빠졌다고 모두 부실기업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일시적으로 자본잠식이 됐다가 다시 회복할 수 있으며, 현재는 적자지만 미래에 큰 이익이 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직 투자 단계로 사업이 본격화하지 않은 기업들도 있다. 하지만 수년 동안 자본잠식 상태라면 부실기업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이 같은 상황이 지속된다면 기업은 결국 문을 닫아야 한다. 돈을 벌어 곳간을 채워야 하는 기업들 입장에서 자본잠식은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이와 관련해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재벌개혁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자본잠식 상태에 빠졌다는 것 자체가 손실이 누적되고 있다는 의미다. 계속되는 영업손실로 이자 비용을 갚지 못하는 한계기업보다 더 안 좋은 상황이다"며 "재벌기업 중 어떤 계열사가 자본잠식에 빠졌고 어떤 업종이 많은지, 상장 유무 등을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30대 기업집단 계열사들을 분석한 결과, 총수 일가의 개인 회사들이 자본잠식에 빠진 경우가 많았다. 이들 기업 대부분은 총수 일가가 20% 이상 지분을 보유하면서, 일감 몰아주기와 부당 내부거래 등을 감시받는 '사익편취 규제 대상'으로 분류됐다.
현대차·GS·효성 오너 일가 회사, 경영난에 '허덕허덕'
대표적인 사례가 현대차그룹과 GS그룹이다. 먼저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지분 100%를 소유하고 있는 서림개발은 2018년부터 4년 연속 자본잠식 상태에 빠져 있다. 수년간 매출 부진으로 손실이 누적된 것이다. 정 회장이 2013년, 2016년, 2018년에 걸쳐 20억원의 유상증자를 단행한 덕분에 겨우 연명하고 있는 실정이다. 부동산, 축산업을 하는 서림개발은 2009년 현대차그룹에 편입됐다. 정 부회장이 애물단지에 가까운 서림개발에 집착한 이유는 막대한 부동산 때문이다. 서림개발은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에 수십만 평에 달하는 토지를 보유하고 있는데, 그 가치가 수백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 때문에 한때 서림개발이 정 회장의 경영권 승계 자금줄 역할을 하는 게 아니냐는 추측도 나왔다.
정 회장 사촌동생 정문선 현대비앤지스틸 부사장이 2020년 창업한 경영컨설팅업체 현대엔터프라이즈도 자본잠식 상태다. 정 부사장은 현대엔터프라이즈를 통해 신사업 및 지분 투자 등으로 홀로서기에 나섰다는 시각이 많았다. 하지만 현대엔터프라이즈는 지난해 특수관계자와의 내부거래를 통해 매출 5억6100만원의 실적을 올린 게 전부였다. 이마저도 영업손실 1600만원과 당기순손실 2000만원을 기록하면서 자본금을 까먹고 있다.
GS그룹은 93개 계열사 중 5곳(5.73%)이 자본잠식에 빠졌다. GS그룹의 자본잠식 계열사 중에서 주목되는 곳은 2019년 설립된 인아츠프로덕션이다. 방송 프로그램 제작업을 하는 인아츠프로덕션은 지난해 매출액 5억2400만원, 영업손실 8억3800만원, 당기순손실 9억1800만원을 기록했다. 지난해 부채총계가 18억원인 반면, 자본총계는 -4억8400만원으로 경영난에 허덕이고 있다.
허인영 인아츠프로덕션 대표는 허만정 GS그룹 창업주 5남 허완구 승산그룹 회장의 딸이다. 인아츠프로덕션 지분 100%를 보유한 승산은 오랫동안 GS그룹의 대표적인 일감 몰아주기 기업으로 공정거래위원회 내부거래 혐의조사 대상으로 꼽혔다. 이 때문에 인아츠프로덕션은 올해 공정위로부터 사익편취 규제 대상 기업으로 지정됐다. 자본잠식에 빠진 인아츠프로덕션은 승산의 단기차입금으로 근근이 버티고 있는 모습이다. 올해만 8차례에 걸쳐 단기운용자금 명목으로 승산에서 총 32억원을 빌렸다.
이 외에 이중근 부영그룹 회장의 개인 회사인 남광건설산업과 남양개발도 자본잠식 상태다. 이번에 금호그룹에 편입된 걸로 보이는 동서여행사와 동서개발도 경영난을 겪고 있다. 두 회사는 박삼구 금호그룹 회장의 첫째 누나 박경애씨 남편인 배영환 삼화고속 회장이 지배하고 있다. 동서개발의 경우 자본총계가 -4억2100만원인 반면 부채총계는 33억원에 달한다. 부채비율로 따졌을 때 -785%에 달하는 수치다.
이렇듯 총수 일가 회사가 경영난에 처할 경우 계열사 부당 지원 유혹에 빠질 수도 있다. 조현준 효성그룹 회장이 지배하고 있는 갤럭시아일렉트로닉스가 그 반면교사다. 조 회장은 2014년부터 자본잠식에 허덕인 갤럭시아일렉트로닉스를 부당하게 지원한 혐의로 기소됐다. 당시 조 회장의 개인 회사를 살리기 위해 효성그룹이 계열사를 동원해 지원했다는 것이다. 올해 3월5일 조 회장은 1심 재판에서 계열사 부당 지원으로 공정거래법을 위반한 혐의로 2억원의 벌금형을 선고받는 등 해당 사건으로 곤욕을 치렀다. 갤럭시아일렉트로닉스는 올해도 자본잠식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중흥건설, M&A 하면서 부실기업도 떠안았나
중흥건설은 공격적인 인수·합병으로 재계 서열이 수직 상승했지만, 몸집이 커진 만큼 자본잠식 기업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다. 2019년만 해도 중흥건설의 계열사 수는 29개에 불과했다. 하지만 최근 언론사 헤럴드와 대우건설 인수에 성공하면서 계열사 수가 55개로 불어났다. 그런데 두 기업을 인수하며 실적이 좋지 못한 계열사들까지 떠안으면서 도리어 자본잠식 비율이 올라간 것으로 분석된다.
헤럴드 계열 기업 6개 중 4곳(66.6%)이 경영난에 시달리고 있다. 헤럴드에듀, 부산글로벌빌리지, 바이오타, 헤럴드팝이 그것이다. 플라스틱 제조업체 바이오타와 교육사업을 하는 헤럴드에듀는 중흥건설이 인수할 당시에도 이미 자본잠식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2020년 중흥건설 계열사로 처음 편입될 당시 바이오타의 전년도 영업손실과 당기순손실은 각각 5억7200만원과 12억8300만원으로 적자를 면치 못했으며, 자본잠식 비율은 -158%였다. 헤럴드에듀의 자본잠식 비율은 무려 -351.18%에 달했다.
대우건설 계열의 기업 17개 중 8곳(47.05%)도 자본잠식에 빠진 것으로 나타났다. 대우송도호텔과 세중이엔씨, 경산지식산업개발 등 계열사들이 경영난을 겪고 있다. 송도대우호텔은 지난 10년간 적자를 지속해 왔다. 오래전부터 대우건설 측은 송도대우호텔을 팔기 위해 애썼지만, 번번이 매각에 실패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반면, 올해 중흥건설 계열 기업 29개 중에서 자본잠식 기업은 7곳(24%)이다. 헤럴드(66%)와 대우건설(47.05%) 계열 전체 기업의 자본잠식 비율을 비교했을 때 중흥건설 계열 기업들의 자본잠식 비율은 확연히 낮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중흥건설이 공격적으로 인수·합병을 하는 과정에서 부실기업까지 떠안은 게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재계 2위 SK그룹은 중간지주사 SKC의 자회사 SK텔레시스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186개 계열사를 보유한 SK그룹은 자본잠식 기업이 7곳(3.70%)밖에 없다. 다른 기업집단과 비교했을 때 계열사들의 경영 상태가 준수한 편이다. 하지만 자본잠식에 빠진 SK텔리시스의 오랜 경영난은 SK그룹에는 그 어떤 것보다 뼈아픈 대목이다.
SK텔레시스는 2011년 처음으로 자본총계가 마이너스로 돌아선 뒤 11년 연속 자본총계가 마이너스인 완전 자본잠식에 빠져 있다. 2009년 휴대폰 단말기 사업에 뛰어든 게 수익성 악화의 시발점이었다. 아이폰 등 스마트폰 열풍에 밀려 빛을 보지 못했다. 결국 2009년부터 6년간 영업적자 448억원에 당기순손실 2282억원을 기록하면서 SKC 지분법 손실에 영향을 미쳤다. 이 때문에 SK텔레시스가 SKC의 기업가치를 갉아먹고 있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SKC는 2012년과 2015년 자본잠식에 빠진 SK텔레시스의 주주배정 유상증자에 약 900억원을 출자했다. 회생 가능성이 없는 SK텔레시스에 출자하면서 상장사 SKC가 손해를 봤다는 검찰 주장이 제기됐고, 최신원 전 회장과 안승윤 SK텔레시스 대표 등이 올해 초 재판을 받았다. 안 대표는 지난 1월 1심에서 무죄를 받았고, 최신원 전 회장은 SK텔레시스 자금을 개인 용도로 사용한 횡령·배임 혐의에 대해 유죄 선고를 받았다.
"실질적 이익 창출 없으면 문 닫는 게 맞다"
SK텔레시스는 여전히 벼랑 끝에 놓여 있다. 2020년 329억원의 당기순손실을 내면서 지난해 말 자본총계가 -386억원으로 자본잠식 상태를 이어가고 있다. 재무구조 개선을 위해 SK텔레시스는 지난해 8월 팬택C&I에 통신장비 사업체인 SKC인프라서비스를 789억원에 매각했다. 여기에 지난 6월 판교연구소도 820억원에 처분하면서 누적된 적자 해소와 회사 운영자금 등에 보탰다. 이 때문에 SKC가 SK텔레시스를 완전 흡수합병하거나 다른 자회사와 합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전문가들은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 기업은 하루빨리 문을 닫아 손실을 줄여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김근수 글로벌컨설팅 회계사는 "재벌기업 중에서 아무런 보장 없이 적자 기업에 돈을 쏟아붓는 경우가 있다. 경영진들은 '경영상의 판단'이라고 정당화하지만, 이는 옳은 대답이 아니다"며 "실질적으로 이익을 창출하지 못하는 기업은 문을 닫는 게 맞다. 그 리스크가 기업 전체에 미쳐, 주주들에게 피해를 준다면 그 책임은 더 무겁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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