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원식 남양유업 회장, 회사 팔겠다더니 법정다툼 왜
● 지난해 9월 한앤코와의 매매계약 해제 통보
● 재판 쟁점, ‘백미당 매각 제외’ 합의 여부
● 김앤장의 쌍방대리 문제도 쟁점
● 홍 회장 vs 한앤코, 주장 엇갈려 재판 장기화
3~4년 전까지만 해도 국내 식품업계는 남양유업의 '반등'을 의심하지 않았다. 유례없이 오랜 기간 불매운동이 이어지긴 했지만, 탄탄한 기술력과 유통 네트워크가 완전히 무너지지도 않았고, 기업에 대한 부정적 여론도 충분한 시간이 지나면 잦아들 거라고 전망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지난해 5월 업계의 '전망'대로, 드디어 반등의 계기가 마련됐다. 끝을 모르고 추락하던 남양유업의 오너가 직접 나서서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특히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오너 일가가 지난 50여 년간 키워(?)온 회사 자체를 팔겠다고 발표하면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불과 1년 전까지 부활 가능성 높게 점쳐져
당시 홍원식 남양유업 회장 측은 오너 일가 지분 53%를 사모펀드(PEF) 운용사인 한앤컴퍼니(한앤코)에 3100억 원가량에 팔기로 했다고 밝혔다. 업계에서는 새 주인이 불매운동의 대명사가 된 '남양유업'의 강도 높은 체질 개선과 함께 사명 변경 등을 통해 이미지 쇄신을 할 경우 '부활'이 충분히 가능할 거라는 전망이 많았다.남양유업 내부에서도 그간 뒷걸음질만 하던 회사가 이제 드디어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됐다며 들썩이는 분위기였다. 오너는 기업 전반의 조직 문화와 경영 방식을 결정한다는 점에서 회사를 매각하는 건 그간의 부정적 여론을 한 번에 뒤집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카드로 여겨졌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 기대는 사실상 수포가 됐다. 지난해 7월 30일, 거래 종결 예정일을 하루 앞두고 열린 남양유업 임시주주총회에 홍 회장이 나타나지 않았다. 시장 안팎에서는 홍 회장이 '노쇼'를 했다는 비아냥 섞인 비판이 나왔다.
이후 홍 회장 측은 지난해 9월 한앤코와의 매매계약 해제를 통보했다. 지금까지 양측은 법정다툼을 벌이고 있다. 이 탓에 남양유업에 대한 부정적 여론은 사그라들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
특히 최근 양측의 공판이 열리면서 지난해 벌어진 계약 파기의 전말이 속속 공개돼 여론의 관심이 더욱 커지고 있다. 회사를 매각하겠다며 고개를 숙였던 홍 회장은 도대체 왜 계약을 파기하면서까지 소송을 벌이고 있을까.
지난 6월 7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0부는 한앤컴퍼니가 홍 회장 등을 상대로 제기한 주식양도 소송 6차 변론기일을 진행했다. 이날 주목받은 건 홍 회장과 한앤코를 연결해 준 함춘승 피에이치컴퍼니 사장이 증인으로 참석한다는 점이었다. 그는 이번 매각 거래의 '키맨'으로 불린 인물이다.
그는 홍 회장에게 남양유업 매수자로 한앤코를 추천했고, 또 김앤장 법률사무소를 법률자문사로 추천하기도 했다.
이번 재판의 주요 쟁점 중 하나는 남양유업 계열사인 백미당을 매각 대상에서 제외하자는 합의가 있었는지 여부다. 홍 회장 측은 별도의 합의가 있었는데 한앤코가 이를 어겨 계약을 해제했다는 입장이다.
도대체 백미당이 뭐기에 계약 결렬의 빌미가 된 걸까. 백미당은 홍 회장의 부인인 이운경 남양유업 고문이 차남인 홍범석 외식사업본부장(상무)과 함께 이끌고 있는 남양유업 내 카페 프랜차이즈 사업이다.
적자 백미당, 매각 논의 당시엔 논외
함 사장의 증언은 홍 회장에게는 달갑지 않은 내용이었다. 함 사장에 따르면 홍 회장은 백미당과 관련한 협상에 대해 '필요 없다'고 했다. 그래서 더는 논의하지 않았고, 실제 계약에도 분사 등의 내용을 반영하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계약 체결 직전에도 홍 회장에게 "백미당은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지만, 홍 회장은 "백미당은 적자가 나는 구조고, 자신이 없다"고 했다는 게 함 사장의 주장이다.
결국 홍 회장이 계약 체결 전에는 백미당을 포기하겠다고 해놓고, 체결 후에는 갑자기 백미당을 걸고넘어지며 계약을 파기했다는 주장인 셈이다.
또 다른 쟁점은 김앤장의 쌍방대리 문제다. 홍 회장 측은 김앤장이 이번 계약 과정에서 홍 회장 가족뿐 아니라 거래 상대방인 한앤코의 대리까지 양쪽을 중복해서 맡아 계약이 무효라는 입장이다.
하지만 함 사장은 이와 관련해 홍 회장에게 김앤장이 한앤코와 남양유업 모두를 대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렸고, 홍 회장도 알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반면 홍 회장 측은 홍 회장 본인 의사와 달리 김앤장이 배임적 대리권을 행사해 계약이 체결돼 주식매매계약이 무효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밖에 홍 회장은 이번 매각의 조건 중 하나로 오너 일가에 대한 예우를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회사를 팔더라도 홍 회장과 이운경 고문, 그리고 자녀들에 대해 고문 계약 및 임원 예우 등을 해달라는 것.
여기에 더해 현재 홍 회장이 사용하고 있는 남양유업 사옥 15층 사무실을 매각 이후에도 자신이 계속 사용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홍 회장은 이와 관련, 지난 6월 21일 열린 7차 변론기일에서 입장을 밝혔다. 홍 회장은 '남편으로서의 도리' '부모로서의 도리'를 언급했다. 지난해 대국민 사과 당시 "가슴이 찢어졌다"고 호소했다. 가업을 갑자기 매각하는 것이라 아내와 아들에게 죄책감이 있다는 설명이다.
이에 따라 백미당 분사와 자녀에 대한 예우 등이 사전에 협의됐다는 전제하에 한앤코를 만났다는 게 홍 회장의 주장이다.
또 홍 회장 측은 계약 전 약속했던 백미당 사업권 보장과 홍 회장 가족들에 대한 예우 등이 계약서에 빠져 있어 문제를 제기했지만, 당시 소송 대리를 맡았던 김앤장 측이 "추후 보완하면 된다"고 말해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는 주장도 했다.
아울러 7일 공판에서는 '별도 합의서'가 등장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 홍 회장의 소송 대리인 엘케이비앤(LKB&)파트너스는 함춘승 사장을 심문하던 중 '주식매매계약서 별도 합의서'라는 문서를 공개했다.
이 합의서에는 오너 일가에 대한 예우와 관련한 내용과 함께 한앤코가 남양유업을 인수한 뒤 투자금 회수를 위해 매각에 나설 경우 홍 회장이 우선매수권을 갖는다는 내용 등이 담겼다.
하지만 함 사장은 해당 문서를 본 적이 없다고 밝혔다. 계약 협상 과정에서 우선협상권 얘기는 한 번도 나온 적이 없다는 주장이다.
주목할 점은 홍 회장 측이 공개한 별도 합의서에는 한앤코 측의 날인은 없다는 점이다. 홍 회장은 이와 관련한 언급도 했다. 도장을 받으려 했지만 한앤코 측에서 거절했고, 그러면 계약을 못 하겠다고 하니 '다른 대안이 있으니까 될 수 있다'고 해서 '조건부 날인'을 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반면 한상원 한앤코 사장은 "별도 합의서 얘기를 들은 적도 없고, 본 적도 없다"는 입장을 내놨다. 이렇듯 양측의 주장은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법정 다툼이 진행되고 있는 사안이라 결론이 어떻게 날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매각 지지부진, 11분기 연속 영업적자
남양유업 임직원이나 주주들에게 중요한 것은 결론이 어떻든 홍 회장이 지난해 약속했던 대로 남양유업을 팔아 부활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지 여부다.업계 안팎에서는 일단 홍 회장의 매각 의지 자체는 바뀌지 않았다는 해석이 많다. 실제 홍 회장은 한앤코와 다툼을 벌이는 와중에 대유위니아그룹과 지분 매각 계열을 체결하기도 했다. 남양유업의 법적 분쟁이 해결되면 회사를 매각하겠다는 조건이다.
다만 한앤코가 이에 대해 계약이행금지 가처분 소송을 제기했고, 법원이 한앤코의 손을 들어주면서 없던 일이 됐다.
문제는 홍 회장이 남양유업을 끝내 매각하더라도 이번 재판 과정에서 드러났듯 오너 일가가 회사에서 완전히 손을 떼는 방식은 아닐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가족이 아끼던 사업인 백미당의 경우 사업권을 보장받으려 한 데다가, 가족들이 앞으로도 남양유업에서 역할을 하길 바란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 경우 남양유업의 '주인'이 바뀌더라도 여론의 부정적인 시선이 극적으로 뒤바뀔 가능성은 크지 않을 수 있다.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남양유업의 실적은 악화 일로를 걷고 있다. 남양유업의 올해 1분기 연결기준 매출액은 2343억 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1.47% 늘었지만, 같은 기간 영업손실은 222억 원으로 전년 1분기보다 확대됐다. 이에 따라 남양유업은 11분기 연속 영업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남양유업이 적자 수렁에 빠진 것은 국내시장 자체가 침체한 탓도 있다. 저출산과 인구 감소 등으로 분유, 우유 소비가 감소하면서 산업 전반의 전망이 밝지만은 않다. 하지만 여기에 더해 남양유업이 지속해 사회적 논란을 일으키며 기업 이미지가 악화한 영향이 더욱 크다는 게 업계 안팎의 대체적 분석이다.
최근에는 업계의 시선도 점차 달라지는 분위기다. 남양유업이 불매운동의 대명사가 되기 시작한 건 지난 2013년 이후로 여겨진다. 당시 남양유업의 한 영업사원이 대리점주에게 욕설을 한 녹취록이 공개되면서다. 이후 남양유업이 이 사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서 여론은 더욱 악화한 바 있다.
"체질 개선 필요한 시점"
하지만 이 사건만으로 남양유업의 '몰락'을 설명할 수는 없다. 남양유업이 개선 노력을 제대로 했으면 지금까지 이어져올 만한 일은 아니었다. 실제 남양유업에는 '갑질 사태' 이후에도 크고 작은 사건이 줄줄이 이어졌고, 지난해에는 급기야 남양유업의 발효유 제품인 불가리스가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예방 효과가 있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으면서 부정적 여론은 정점을 찍었다.업계에서는 세월이 흐르면 언젠간 '기회'가 있을 거라고 봤다. 하지만 최근 재판 과정에서도 보듯 오너 일가가 사실은 남양유업에서 제대로 손을 뗄 생각이 없다는 점이 알려지면서 여론을 되돌리기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는 분석이 많다. '오너리스크'의 경우 과거 갑질 사태와는 다르게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해소되는 '단순 사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남양유업의 조직 문화와 경영 방식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뿌리 깊게 박힐 수 있다는 지적이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남양유업이 그간 여러 구설에 오르면서도 제대로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는 점 등을 보면 여론의 질타를 받아 마땅한 기업은 맞다"면서도 "다만 산업적 측면에서 보면 남양유업이 국내 유업계를 이끌어온 토종 기업인 만큼 근본적인 체질 개선 등으로 반등의 계기를 마련했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지적했다.
나원식 비즈니스워치 기자 setisoul@bizwatch.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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