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이드 통해 인생을 더 깨닫게 되었습니다"

김종수 2022. 8. 2. 09:0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김종수의 농구人터뷰(47)] '강페니' 강병현

 

 

‘뜨거웠던 5시즌, 평범했던 9시즌’ 지난 5월 프로 무대를 은퇴한 강병현(37‧193cm)을 나타내는 말이다. KGC, LG 시절의 강병현은 그야말로 평범 그 자체였다. 기량이나 성적 등에서 특출한 부분도, 눈에 띄는 캐릭터적 개성도 없이 잘생기고 키 큰 가드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팬에 따라서는 ‘출장 시간에 비해 공헌도가 적은 선수’로 혹평을 내리기도 했다.


하지만 KCC팬들 사이에서는 평가가 완전히 다르다. ‘전주의 심장’, ‘KCC의 이동국’, ‘프랜차이즈 스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존재’ 등 최고 중의 최고로 인정받고 있다. 상당한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강병현을 뜻하는 ‘강뱅’을 닉네임으로 쓰는 팬들이 적지 않을 정도다. 역대 KCC 인기순위를 매겨도 이상민, 추승균, 조성원, 이정현, 송교창 등과 함께 상위권에 들 것이 확실하다.


상황을 잘 모르는 이들 사이에서도 고개가 갸우뚱거려질 수도 있다. 강병현은 14시즌간 519경기를 소화하며 평균 7.3점, 2.4리바운드, 1.7 어시스트를 기록했다. 반면 KCC 시절에는 5시즌간 모두 두자릿수 득점을 기록했으며 리바운드, 어시스트, 스틸 등 세부기록 또한 가장 좋았다. 하지만 그런 부분을 감안하더라도 압도적인 수치는 아니고 불과 5시즌에 그쳤는데 ‘그 정도까지…?’라고 의구심을 드러낼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5시즌 동안 KCC의 전천후 엔진으로 활약했고 3년 연속 챔피언결정전 진출, 2회 우승을 이룬 시기에 주전 2번으로 뛰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높은 점수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다. 대외적으로는 국내 최장신센터 하승진이 많은 주목을 받았겠지만 팀의 에너지 레벨과 활동량, 투지 등을 책임지던 강병현의 존재감은 팀내에서 절대적이었다. 당연히 KCC팬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도 많았고 간판스타로 큰 사랑을 받았다. 이상민 이후 KCC의 얼굴이자 상징이었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강병현은 수려한 외모와 달리 플레이 스타일은 지극히 투박했다. 슛이나 돌파가 특별히 빼어난 것도, 송곳같은 패싱능력이 돋보이는 타입도 아니었다. 하나하나 기술적인 부분만 따져보면 어떻게 KCC에서 중심축으로 활약했는지 신기할 정도다. 이는 강병현을 대표하는 단어인 에너지, 열정, 허슬 등을 대입해보면 알 수 있다.


그는 수비 등 궂은일에서부터 플레이를 찾아가는 유형이었다. 장신 2번으로서 1번을 도와 리딩을 돕는 것은 물론 3~4번 자리에 구멍이 생기면 직접 해당 포지션에 뛰어들어 빈자리를 채워냈다. 팀 사정에 따라 발 빠른 가드부터 힘 좋은 파워포워드까지 모두 상대했다. 엄청난 활동량과 팀을 먼저 생각하는 마인드가 없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거기에 BQ 또한 우수했다. KCC 팬들 사이에서 ‘강병현은 늘 고맙고 미안한 선수였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그렇다고 강병현이 늘 궂은 일만 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워낙 배포가 두둑해서 중요한 순간에는 ‘에이스’로 빙의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폭발적인 돌파에서 이어지는 드라이브인과 스탑 점프슛에 한번 터지면 못말리는 3점슛까지…, 특히 클러치 상황에서 슛 성공률이 갑자기 상승하는 경우가 많아 상대팀 팬들에게 얄미운 존재였다. 2010~11 챔피언결정전에서는 5차전, 6차전 결승골을 잇따라 터트리며 경기 분위기를 완전히 장악해버렸다.


농구만화 ‘슬램덩크’에서 능남 팬들이 윤대협을 바라보는 시선이 그렇듯, 당시 KCC 팬들에게는 어려운 상황이 와도 ‘강병현, 강병현만 있다면!’, ‘강병현이라면 분명 무엇인가를 해줄거야’는 등의 믿음이 절로 묻어나올 수밖에 없었다. 궂은 일과 팀 플레이에 집중하는 스타일상 세부기록에서는 손해 볼 수밖에 없었겠지만 당시 현장 지도자와 외국인 코치들 사이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유럽에서 선수와 지도자로서 높은 명성을 쌓았던 스티브 영이 “대한민국 NO.1 슈팅가드는 강병현이다”고 말했던 것이 대표적 예다.


강병현은 어떤 팀, 어떤 멤버와도 융화가 잘 될 수 있는 스타일이다. 만약 몸 상태만 좋았더라면 KGC, LG에서도 큰 공헌을 했을 것이 분명하다. 한창때 강병현과 양희종이 함께하는 압박수비는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힌다. 아쉽게도 고질적인 허리부상을 안고 살았던 강병현은 이후 아킬레스건 부상까지 겹치며 특유의 활동량을 살린 농구를 제대로 펼치지 못했다. 기세나 자신감도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모든 선수에게 마찬가지로 해당되는 사항이겠지만 전성기를 일찍 앗아간 부상이 안타까울 뿐이다.

 

 

 

Q.요새 어떻게 지내세요?
하핫…, 불과 얼마 전까지만해도 선수로 뛰었던지라 근황을 물어오시는 자체가 아직은 낯서네요.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익숙해지겠죠. 선수로서는 올해 은퇴하고 현재는 마지막 소속팀이었던 LG에서 스카우터 겸 전력분석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MBC배 전국대학농구대회가 끝났잖아요. 거기도 보고 오고 그랬어요. 곧 신인드래프트도 앞두고 있는지라 대학선수들에 대해서 좀 더 디테일하게 알 필요가 있잖아요. 시즌이 시작되면 각 팀들 전력을 분석해서 감독, 코치님들께서 원하시는 자료도 만들어드리고, 또 미션이 주어지면 거기에 맞게 움직이고 그럴 것 같습니다. 아직은 미숙한 것 투성이라 많이 배워야 되겠죠. 막 은퇴하고 한동안 쉬는 선수들도 많은데 저는 운이 좋았다고 봅니다. 이제 제2의 인생이 시작됐다고 보는게 맞을 듯 싶어요. 현재 아들 둘이 있는데 9살, 6살입니다. 선수 은퇴했다고 가장으로서의 삶이 끝나는 것은 아니니 신인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Q.부상으로 한참 고생했는데 몸 상태는 어때요?
이제 선수로서 은퇴했으니 크게 다가오는 부분은 없어요. 몸이야 지긋지긋할 정도로 꾸준히 아팠죠.(웃음) 고질적인 허리부상에 이후 아킬레스건 부상을 당한게 너무 컸어요. 아시다시피 제가 디테일보다는 활동량으로 승부하는 스타일이었잖아요. 허리야 그렇다 쳐도 아킬레스건까지 다치고 나니까 제대로 뛸 수가 없더라고요. 마음은 예전처럼 뛰고 싶어도 몸이 안 받쳐주는 거죠. 하지만 그것은 선수일 때나 해당되는 사항이고 일상 생활하고 현재 일하는 데는 별다른 지장은 없습니다.

Q.LG가 최근 성적이 좋지 않아요. 다음 시즌 전망을 예상해 볼 수 있을까요?
최근 3년간 성적이 9위, 10위, 7위 그럴거에요. 특히 올 시즌 같은 경우 몇 승만 더했으면 플레이오프도 나갈 수 있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죠. 선수 시절의 저도 거기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울수 없겠고요. 팬들에게도 많이 미안합니다. 더 잘하고 싶었는데요. 사실 이제 막 은퇴하고 새롭게 배워나가는 중인 제가 시즌 전망 이런 것을 한다는 자체도 주제넘지 않나싶기도 해요. 하지만 저도 LG식구인지라 느낀 점만 말해보라면…, 새 시즌은 확실히 더 나아지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습니다. 새로 부임하신 조상현 감독님은 따뜻하고 배려가 넘치는 분이시지만 농구에 임하는 진지한 자세를 중시하시는 등 본인만의 철학이 확고하신 분입니다. 선수단 분위기도 바뀌었고 너도나도 해보자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는 상황인지라 부상 악재 등만 없다면 충분히 해볼만 하다고 생각됩니다. 송골매의 날개는 더 튼튼해지고 부리와 발톱은 더 날카로워지고 있습니다.

 

 

 


“갑자기 사이즈가 좋아지면서 플레이 방향도 바뀌게 되었습니다”

Q.농구는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요?

초등학교 3학년 때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놀고 있는데 코치 선생님께서 부르시더니 ‘농구 할 생각 없냐?’고 물으시더라고요. 일단 스타트는 거기서부터였죠. 또래들 중에서 키가 큰 편이었고 달리기도 잘해서 좋게 보셨나 봐요. 사실 그 나이대에 뭘 알았겠어요. 그냥 뛰어노는 것 좋아하고 그러니 얼떨결에 시작하게 된거죠. 어쨌거나 그냥 평범하게 학교를 다닐 때는 제가 상당히 크다고 생각했었거든요. 한데 농구를 시작하고 나니까 그것도 아니더라고요. 정말이지 어디서 왔는지 정말 크고 다부진 친구들이 계속 들어오는 것 있죠. 그런 것을 보면서 내가 지금 농구를 하고 있구나라는 사실을 더욱 실감했던 것 같아요.(웃음)

Q.처음에는 어떤 포지션을 맡으셨나요? 혹시 빅맨?
아니요. 그럴 사이즈는 되지 못했습니다. 앞서도 언급했다시피 농구부에 들어오니 저의 사이즈는 더 이상 강점이 되지 못하더라고요. 사실 당시에는 포지션에 대한 세세한 개념은 없었습니다. 그저 지금 생각해보면 앞선에서 뛰면서 1번 혹은 2번을 번갈아가면서 맡았던 것 같아요. 학년이 올라갈수록 키 때문에 스트레스도 좀 받고 그랬어요. 다른 친구들은 나날이 쑥쑥 크는데 저는 좀처럼 신장이 안자랐거든요.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는 1번으로 뛸 때가 많았습니다. 적성의 문제라기보다는 그냥 키가 자라지 않았으니까요. 그러다가 그 무렵부터 키가 훌쩍 커지면서 2번에서 뛰는 경우가 늘어나는 등 스윙맨 역할을 맡게 되었어요.

Q.키가 커지면서 플레이 스타일 등에서도 변화가 생겼을 듯 싶어요.
맞습니다. 신장이 갑자기 커지니까 변하는 것도 많았어요. 이전까지는 작은 체구의 1번에 불과했는데 이후에는 2번까지 포함해도 장신 축에 속하는 입장이 되어버렸으니까요. 거기에 더해 몸까지 좋아지면서 사이즈에서 이점이 많이 생기더라고요. 높이, 힘 등에서 유리해진 면도 많았어요. 작을 때는 상대 수비를 벗어나기 위해 온갖 잔기술을 쓰면서 요리조리 피해가야 했다면 신체적으로 좋아진 후에는 그냥 툭 부딪혀도 상대가 밀리는 경우가 생겼고 이른바 닥돌도 가능하게 됐죠. 가드답지 않게 골밑에서 리바운드 경합도 적극적으로 하는 등 할 일도 많아지더라고요. 결국 그런 점을 살려 농구를 하다보니 제가 생각했던 플레이 스타일과는 다른 방향으로 성장하게 된 것 같아요. 어쨌거나 농구 인생의 전환점이 된 것은 분명하죠.

 

 


Q.중앙대학교를 선택한 배경이 궁금합니다.
제 마음대로 될 일은 아니었겠지만 어린 시절부터 농구를 잘하게 되면 중앙대를 가고 싶었어요. 다행스럽게도 고등학교 1학년 가을 정도에 스카우트 제의가 와서 중앙대와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당시 저희 아버님께서도 중앙대 장일 감독님과 만나서 얘기도 나누셨고 일찍부터 중앙대 쪽으로 마음이 기울게 됐죠. 제가 부산중앙고를 나왔는데 추승균, 박훈근, 박규헌 등 쟁쟁한 선배님들이 많아요. 얼마 전 박훈근 선배님편 ‘농구人터뷰’를 봤는데 중앙고는 포지션을 딱히 구분하지 않고 전체적으로 자유롭게 농구하는 전통이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정말 그런 것 같아요. 각자 포지션별로 해야 할 역할을 확실히 가져가면서도 빅맨도 외곽을 쏘고 가드도 리바운드에 적극 참여하는 등 전 선수가 올 어라운드 플레이어로서 성장할 수 있는 배경을 깔고 있다고 할까요. 덕분에 이것저것 다채롭게 배울 수 있었죠.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중앙대 역시 비슷한 부분이 많은 듯 싶고 그래서 더 선호하는 마음이 생겼지 않나 싶어요.

Q.당시 중앙대 성적이 역대급으로 좋았어요. 농구를 한다는 자체가 되게 신났을 듯 싶어요
멤버도 좋았고 성적도 좋았죠. 운 좋게 저도 한자리 끼어서 열심히 뛸 수 있었고요. 성적 좋은 팀에서 나 역시 한몫을 하는 것! 농구선수에게 그보다 더 행복한 일이 어디 있겠어요. 중앙대 가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거듭거듭 들었던 시절입니다. 하지만 훈련도 정말 많이 하고 혼도 나고 그랬던 시절이기도 해요. 1학년, 2학년 때는 훈련량 쫓아가기도 바빴어요. 그렇게 적응하다 보니 학년이 올라갈수록 기량도 함께 성장 할 수 있었고요.

Q.대학교 시절부터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좋았어요. 실감했나요?
아 그랬나요? 좋게 봐주시는 팬분들도 있었겠지만 솔직히 대학교 때는 크게 와닿고 그러지는 않았어요. 인기를 실감하고 관심이 느껴지고 그런 것은 전자랜드에서 KCC로 왔을 때였던 것 같아요. 전주 팬들이 워낙 열성적이시잖아요. 성적도 잘 나오고 나름 그 안에서 제 역할도 찾아가니까 많이들 좋아해 주시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어요. 왜 KCC가 전국구 인기팀인지 알 수 있겠더라고요. KCC 프리미엄까지 받던 너무너무 행복한 시절이었죠.


 

 


“제2의 허재요? 어릴 때 아주 잠깐이었죠. 말도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Q.제2의 허재라는 별명으로도 불렸어요.

아주 잠깐이었지만 언론에서 그렇게 써주신 적이 있었죠. 지금 생각해도 너무 과분하고…, 개인적으로 말도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 역대 최고 테크니션으로 불리는 분인데 잠깐이라도 근처까지 간 적도 없었습니다. 농구인으로서 그 말이 주는 무게감과 상징성을 잘 알기에 더욱 그렇게 느껴집니다. 고3 신입생 시절에 허재 감독님께서 원주에 계실 때 중앙고에 오셔서 함께 사진도 찍고 그랬던 것이 기사화되면서 이후 그렇게 불린 듯 싶어요. 당시 어린 마음에는 마냥 좋았죠. 최고의 선수의 뒤를 이을 후보 중 하나로 거론되는 것만으로도 설레잖아요. 하지만 나이를 먹어가면서 현실을 알게 됐고 점점 부담스러운 마음도 크더라고요. 적어도 그런 별명을 책임지려면 이른 나이부터 동 나이대를 완전 평정하고 국제대회에서도 맹활약하고 그래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도 될까 말까인데요.

Q.전자랜드에 4순위로 뽑혔는데, 순위에 대한 아쉬움은 없었나요?
잠깐은 들었지만 금세 잊어버리고 4순위라도 다행이다고 생각이 바뀌더라고요. 그때가 정말 황금드래프트였잖아요. 저보다 먼저 뽑힌 선수들이 무려 하승진, 김민수, 윤호영이었어요. 누구를 제치고 저를 뽑아야 할까요. 제가 지도자라고 해도 그들이 먼저였을 것 같아요. 4순위도 높은 순위였죠. 순위에 맞게 프로가서 잘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던 기억이 나요. 솔직히 프로 무대에 들어서자마자 순위에 대한 생각은 싹 잊어버렸어요. 팀에 적응하는게 먼저였거든요. 하지만 아쉽게도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스타트가 좋지 않았죠. 지금도 전자랜드 팬분들께는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Q.그러게요. 전자랜드에서는 뜻대로 잘되지 않았던 듯 싶어요.
잘하고 싶었는데 쉽지 않더라고요. 뽑힐 때는 제가 어느 포지션에서 뛸지 몰랐어요. 팀 훈련에 합류하고 나니 당시 최희암 감독님께서 1번으로 중용할 것이다고 말씀 주시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나름 포인트가드에 대한 준비도 하고 그랬는데 마음만큼 플레이가 잘 되지 않았습니다. 어서 잘해야 하는데 하고 마음이 급해지다 보니 더 그랬던 듯 싶기도 하고요. 일부에서는 최감독님께서는 철저한 분업농구 스타일을 선호하고 저는 틀에 맞춘 것보다 풀어놓을 때 경기력이 살아나서 서로 잘 안맞는 궁합이었다는 평가도 있던데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제 스타일이라는 것도 있기는 하겠지만 선수는 어떤 지도자, 팀 색깔에도 자신을 맞출 수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모로 제가 부족했던 탓이죠. 심적으로 많이 힘들었던 시기입니다.

 

 


Q.KCC로 트레이드 될 때 충격이 컸었나요?
착찹한 기분 반, 새로운 환경에서의 기대 반해서 반반이었던 것 같아요. 어쨌든 맨 처음 저를 선택해줬던 팀에서 못해서 그렇게 된 영향도 컸잖아요. 트레이드 상대도 무려 서장훈 선배님이셨고요. 하지만 KCC는 전자랜드와는 또 색깔이 다른 팀인지라 여기서 다른 농구를 하면 부진을 탈출 할 수 있을까라는 기대감도 있었습니다. 솔직히 더 물러날 곳도 없었죠. 아무리 루키 시즌에 4순위 출신이라지만 처음부터 못한다는 인식을 줘버리면 앞으로 농구 인생도 힘들어질 수 있거든요. 트레이드 자체보다는 진짜 잘해야 된다는 각오가 더 컸습니다. 보여주고 싶었어요. 내가 이 정도로 바보는 아니다는 것을.

Q.KCC로 가자마자 확 달라진 기량을 선보였습니다.
출장시간 탓도 컸던 것 같아요. 허재 감독님에게 혼도 많이 났지만 매 경기 25~30분 가량을 꾸준히 뛰니까 한창 좋았을 때의 감각도 되살아나고 무엇보다 자신감이 많이 붙더라고요. 감독님께서 잘 안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혹독하게 뭐라고 하시지만 한번 믿어주시면 정말 화끈하게 밀어주시는 성격이시거든요. 운 좋게도 주 전력으로 저를 키우실 생각을 하셨고 출장시간 하나는 확실하게 보장해줬어요. 제가 득점력이 막 폭발적인 유형은 아니잖아요. 경기를 하다보면 무득점에 그친 경우도 있었어요. 그래도 다음날 또 출장을 시켜주셨어요. 그러다 보니까 좋은 컨디션이 유지되고 플레이의 기복도 점점 줄어들더라고요. 특히 SK전으로 기억하는데요. 그 경기에서 결승 득점인가를 제가 레이업슛으로 넣은 적이 있어요. 그 다음부터는 막 자신감이 붙으면서 경기력이 확 좋아지는게 스스로도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어린 나이였으니까 심리적으로 흔들리는 것도, 기세가 타는 것도 종이 한장 차이였던 듯 싶어요.

Q.화려한 외모(?)와 달리 궂은 일을 열심히 하는 등 플레이 자체는 마당쇠 같았습니다.
하핫…, 제가 좀 투박하기는 했죠. 거기에 여기저기 열심히 뛰어다녔고요. 마당쇠라는 표현이 잘 어울리는 듯 하네요. 대학 시절에도 비슷하게 플레이했거든요. 제가 기술적으로 아주 탁월한 편은 아닌지라 사이즈적인 장점, 이런저런 플레이에 두루 참여할 수 있는 부분 등을 살려서 플레이하려고 노력했죠. 뭘 하든 팀에 도움이 되는 선수가 되어야 경기출장도 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화려함 그런 것은 생각하지도 않았고 무조건 팀이 이길 때 한몫할 수 있는 선수가 목표였어요. 그게 꼭 득점, 어시스트가 아닌 수비, 리바운드 등 궂은일이라고 해도요. 기록지는 허전할지 몰라도 감독님과 팀 동료들은 알거든요. 이 선수가 얼마나 열심히 하고 팀에 필요한지를.

 

 


“클러치 상황에서 더 집중력과 자신감이 높아졌습니다”

Q.슛이 아주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공격시 자신감은 넘쳐보였어요. 클러치에도 강했고요.

클러치 상황 등이 찾아오면 부담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찬스가 나면 자신있게 던져보겠다는 평소의 마인드가 영향을 끼치지 않았나 싶어요. 사실 농구선수로서 당연한 자세잖아요. 평소에도 이미지 트레이닝 등을 통해서 그 순간을 즐기는 선수가 되어 보자라는 자기암시를 걸고는 했었죠. 슛이 그리 정교한 편도 아닌데 중요한 순간에도 역할을 못해주면 가드로서 치명적이잖아요. 양적으로는 어려움이 있어도 질적으로라도 도움이 됐다 싶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그런 순간에도 슛이 안 들어갔다면 저는 슛을 안 던지는게 더 낫지 않았을까요.(웃음)

Q.신명호와 함께 엄청난 앞선에서 굉장한 압박수비를 보였어요.
그러게요. (신)명호형이야 워낙 수비력을 타고난 선배인데 저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열심히 뛰어다니다 보니 결과가 좋게 나온 것 같아요. 막 대학교 졸업했던 시기라 몸 상태도 좋았고 두려울게 뭐 있었겠어요. 체력도 자신있고 그냥 죽어라 뛰어다니는 거죠. 나이 먹은 노장에게 경험, 노련미 등이 경쟁력이라면 루키급 선수는 체력, 활동량 등이 무기잖아요. 허재 감독님께서 저희의 장점을 잘 알고 적절하게 잘 써주셨죠. (임)재현이형까지 돌아가면서 다들 미친 듯이 뛰어다녔죠. 특히 재현이형같은 경우는 슬슬 베테랑으로 들어가는 급이었는데도 저나 명호형 이상으로 뛰어다니셨어요. 진짜 존경할만한 선배라고 생각합니다. 옆에서 많이 배웠어요. 선수라면 정도의 차이만 있지 기록에 대한 욕심이라는게 있잖아요. 남는 것 기록 밖에 없다는 얘기도 있고요. 하지만 당시에 재현이형, 명호형은 그런게 일절 없었어요. 그냥 팀을 위해 헌신한다는 마인드로 경기하던 선배들인지라 저도 자연스럽게 묻어가지 않았나 싶어요. 제 복이었죠. 그런 좋은 형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Q.옆에서 본 허재 감독은 어떤 지도자였나요?
당시 제가 옆에서 느낀 감독님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웃음) 그랬습니다. 워낙 혼도 많이 나고 그러다 보니 정말 호랑이같이 보였어요. 그때는 어린 마음에 ‘나한테만 유독 왜 그러실까?’라는 생각도 했지만 지금와서 돌아보면 그만큼 기대가 크셨고 선수답게 만들어 낼려고 그러셨구나 싶어요. 실제로 재현이 형도 당시에 ‘아무한테나 관심주고 레이저 쏘시는 분 아니다. 그만큼 너에게 거는 기대가 있으셔서 그렇다’고 말해주었던 기억도 나요. 선수로서 고마운 일이죠. 대한민국 최고 전설의 관심을 받았으니까요.

Q.제가 감독이라고해도 강병현을 더 많이 혼냈을 것 같아요. 하승진은 예민해서 막 삐지고 그럴 것 같아서 달래줘야 하는데 강병현은 나름 쿨해서 돌아서면 잊어버릴 것 같거든요. 맞춤형 사용법이라고 해야할까요?
그런면도 있겠네요.(웃음) 실제로 정말 많이 깨졌고요. 주변에서는 ‘그렇게 혼나고도 주눅이 안드네’라는 말도 들었지만 실제로는 안 그랬어요. 어린 나이라 주눅도 많이 들고 의기소침해지는 경우도 있었죠. 하지만 어느 정도는 감독님 의도를 알고 있었고 또 선수가 심적으로 주눅 들었다고 경기력까지 다운되면 안되잖아요. 일단 코트에 들어서면 최대한 잊으려 했고 티도 안 내려고 노력했어요. 그러다 보니 쌓이고 쌓여서 멘탈도 조금씩 강해지더라고요.

Q.허재 감독 성대묘사에도 능했어요. 본래 목소리가 비슷한 것도 같고요.
그냥 한번 해본건데 얼떨결에 개인기 비슷하게 되어 버리더라고요. 언론사와의 인터뷰 때도 여러차례 했었고요.(웃음) 제가 비염이 있어서 그런지 평소 목소리도 비슷한 부분이 좀 있어요. 주변에서 얼굴하고 목소리가 매치가 안된다는 얘기도 하고 그랬던 기억이 나요.

Q.이적하자마자 우승의 감격을 맛보았죠. 그때 기분은 어땠나요?
말로 설명할 수 없었죠. 운동선수들의 최종목표는 우승이잖아요. 그 우승을 하기 위해서 다들 피나는 훈련을 하고 정규리그 장기레이스를 거쳐서 플레이오프 혈전을 거치고요. 아쉽게도 선수 생활내내 우승을 경험하지 못하는 선수들도 많아요. 그런 점에서 첫 시즌부터 우승의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는 것은 엄청난 영광이고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사진들만 봐도 제가 너무 좋아하고 있더라고요. 말해 무엇하겠어요. 진짜 진짜 좋았습니다. 여기에는 당시 팀 캐미도 영향이 컸던 것 같아요. 허재 감독님이 평소에는 무섭지만 풀어줄 때는 화끈하게 풀어주시고 (추)승균이형, (조)우현이형, (임)재현이형, (정)선규형 등 고참급 선배님들께서 중심을 잘 잡아주셔서 선수단 분위기가 정말 끈끈하고 좋았어요.

 

 


Q.동기인 하승진과 ‘한국판 샤크와 페니’로 불렸어요. 몸을 부딪히는 세레머니는 당초 계획했던 것인가요?
아뇨(웃음) 그냥 아무 생각없이 그렇게 나온 것 같아요. 경기가 잘 풀리고 흥이 난 상태에서 (하)승진이가 몸을 날려오니까 함께 부딪혔어요. 서로 알잖아요. 말하지 않아도. 또 그렇게 하다보니 분위기도 저희 쪽으로 더 기우는 것 같고 팬분들도 좋아해 주시고, 참 괜찮은 세레머니였다고 생각합니다.

“트레이드…,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구나 싶었습니다”

Q.2013~14시즌 당시 동료였던 외국인선수 타일러 윌커슨과 경기중 말다툼을 벌였어요. 그때 무슨 상황이었던 것이죠?

본래는 윌커슨이랑 투맨게임을 하기로 했었어요. 하지만 경기중에는 돌발변수가 워낙 많잖아요. 당초 무엇인가를 하기로 약속하고 나와도 뜻대로 안되는 경우가 허다해요. 모 감독님께서는 작전타임 때 약속된 패턴을 몇 개씩 들고나와도 실제로 딱 그 장면에서 써먹는 경우는 열에 한둘이라고 하더라고요. 맞아요. 상대편에서도 예측을 하고 나오니까 패턴을 써먹기가 쉽지 않아요. 그래서 그런 것까지 예상해서 제2, 제3 패턴을 추가로 준비하던가 아니면 선수들이 알아서 센스를 발휘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어쨌든 당시 상황에서 투맨게임을 하기가 쉽지않았어요. 오른쪽으로 돌파를 시도하다가 트랩에 갇히고 말았거든요. 안되겠다 싶어서 타임을 불렀죠. 어쩔 수 없는 상황이잖아요. 한데 윌커슨의 반응이 너무 예민했어요. 투맨게임을 정상적으로 안해줘서 기분이 상했나 봐요. 그래서 볼을 잡으려는 시늉조차 안하더라고요. 때문에 저도 기분이 상해있었는데 벤치로 들어가면서 ‘F’로 시작하는 욕을 하는거에요. 그래서 말다툼이 시작된거죠. 윌커슨의 이전 경기 언행까지 물어보시는 분들도 계셨지만 거기까지는 언급하고 싶지 않아요. 너무 제 합리화만 시키는 것 같고 한때 동료였던 선수인데 나쁜 놈으로 몰아가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서로 실수한거라고 생각합니다. 허재 감독님께는 용인숙소로 가서 죄송하다고 말씀드렸는데 딱히 거기에 대해 특별한 말씀은 안하셨어요.

Q.2008~09시즌 DB와의 경기 도중 고 표명일의 위협적인 행동에 자신도 모르게 발끈했어요. 이에 중앙대 선배인 김주성까지 나서서 거기에 대해 나무랬습니다. 억울하기도 하고 이래저래 감정이 복잡했을 듯 싶어요.
경기하다보면 이런저런 일이 발생할 수 있죠. 아무래도 농구라는 종목이 신체를 부딪히는 경우가 많아서 더욱 그럴거에요. 리바운드 경합 과정에서 팔이 엉켰고 거기서 빼내려다가 얼굴 쪽을 맞았는데 선배님도 일부러 그러시지는 않았을거에요. 하지만 순간적으로 일어난 거친 상황에 저는 상기될 수밖에 없었고 순간적으로 여러 가지 감정이 겹치더라고요. 그때 김주성 선배님이 나서서 흥분하지 말고 참으라고 진정시켜줬습니다.

Q.좋게 순화해서 말을 한 것 같은데 그때 분위기나 김주성의 표정 등을 봐서는 그 정도가 아닌 위협으로까지 보여졌습니다.
아닙니다. 어쨌거나 다들 웃으면서 말을 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잖아요. 격렬한 경기를 치르던 중이라 다들 지쳐있었고 그래서 더 그렇게 보였을거에요. 수훈선수 인터뷰까지 하는데 표정이 상기되어있어서 다들 걱정을 많이 하셨어요. 잊을 것은 빨리 잊고 감정 정리를 했어야 하는데 한참 어릴 때라 그게 쉽게 안되더라고요. 선배님들께서 위협하고 그런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김주성 선배님은 마음이 아주 넓은 분이세요. 설사 후배들이 잘못해도 너그럽게 봐주시고 항상 웃는 얼굴로 대해주시죠. 배려도 많이 해주시고요. 저도 그런 여유를 가지려고 노력 중입니다.

Q.프랜차이즈 스타로 남을 듯 싶었지만 KGC로 트레이드 되었어요.
솔직히 말해서 충격이 컸습니다. 전자랜드 시절과 달리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해서 향후에도 계속 KCC에 남을 것이다고 생각했거든요. 영광의 순간을 함께한 KCC를 떠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죠. 그런 상황에서 트레이드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제 귀를 의심했어요. 그때 새삼 느꼈죠.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구나’라는 것을요. 어쨌든 낙담만 하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새로운 팀에 가서 다시금 잘해보자며 마음을 다잡았던 기억이 납니다.

Q.이후 팀에서는 KCC에서 만큼의 기량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아무래도 부상이 가장 큰 영향을 끼쳤겠죠? 활동량과 허슬로 에너지를 끌어올리는 타입이었잖아요.

그렇죠. 많이 움직이면서 공헌도를 가져가는 유형인데 부상으로 그렇게 되지 못하면서 잘할 수 있는 부분이 봉인되었다고 보는게 맞을 듯 싶습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허리부상이야 워낙 고질적으로 달고 다녀서 그러려니 했어요. 하지만 안양 시절 아킬레스건 부상까지 당하자 정말 방법이 없더라고요. 저는 사자도, 늑대도, 독수리도 아니에요. 열심히 달리면서 컨디션을 끌어올리는 야생마죠. 제대로 달리지 못하는 말이 어떻겠어요. KCC시절처럼 팀에 도움도 못되고, 상대 팀에서 봤을 때는 큰 위협을 받지 못했을거에요. 아쉽죠.

 

 


Q.다른 포지션도 잠깐씩 오가기는 했지만 주로 2번으로 뛰었잖아요. 전성기 때 기량으로 지금 리그에 뛰어들면 포인트가드도 가능할 듯 싶어요. 보조리딩도 잘했고 BQ나 시야도 나쁘지 않았으니까요.
저도 궁금하기는 해요. 예전 같으면 쉽지 않은 도전이었겠지만 최근 추세는 듀얼가드들이 이끌고 있잖아요. 포인트가드의 리딩 부담이 많이 줄어들기도 했고요. 팀 자체적으로 시스템이 돌아가기도 하고 최준용, 대릴 먼로같이 다른 포지션에서 리딩에 관여하는 경우도 늘어나는 추세같아요. 하지만 그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제가 1번을 맡으려면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아요. 당장 당시 기량으로는 어려움이 많을거에요. 포인트가드는 단순히 발 빠르고 패스 센스 있다고 되는게 아니니까요. 일단 저는 메인 볼 핸들러를 할 만큼의 볼 컨트롤은 되지 않았습니다. 상대의 압박 수비에도 견디면서 안정적으로 볼을 운반할 정도는 되어야 주전 1번의 자격이 있죠. 더불어 설명하기 애매하기는 한데 포인트가드는 오랫동안 1번으로 뛴 선수들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리듬이 있어요. 2번으로서 수준급 보조리딩 능력을 보여준 선수들이 쉽게 1번으로 넘어가지 못한 이유죠. 저 역시 그런 부분이 많이 부족했던지라 포인트가드에 도전한다면 그것부터 보강해야 되지 않을까 싶어요.

Q.함께한 외국인선수 중 가장 인상 깊은 선수로는 누가 있을까요?
전주, 안양, 창원 등에서 선수 생활을 하면서 정말 다양한 외국인선수들과 많이 뛰었죠. 실력이 탁월했던 선수, 개성이 돋보였던 선수 등 나름대로 다 색깔을 가지고 있었던 듯 싶어요. 누구 한사람을 꼽기가 참 어렵지만 그래도 한명 선택해야 된다면 은퇴 시즌 함께 했던 아셈 마레이를 지목하고 싶어요. 올 시즌에도 재계약을 했으니 이제는 프런트와 선수로 만나게 됐네요.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겠죠. 마레이는 개인기록보다는 팀을 먼저 생각하는 드문 유형의 외국인선수에요. 공격보다 수비, 리바운드 등 궂은 일을 먼저 하고 허슬플레이도 서슴치 않습니다. 매우 성실하고 마인드도 좋은지라 애정이 갑니다.

Q.어찌보면 빅맨 버전 외국인 강병현이네요. 그래서 좋아하는 것 아니에요?
아…, 하하핫. 말씀을 듣고나니까 닮은 부분이 있네요. 그래서 더 정이 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웃음)

Q.마지막으로 여전히 농구인 강병현을 응원해주는 팬들에게 인사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동안 선수 생활하면서 팬 분들에게 과분한 관심과 격려,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힘든 시기도 있었지만 좋은 날이 훨씬 많았고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팬 분들에게는 항상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선수가 아닌 LG 스탭으로서의 농구 인생 제 2막도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앞으로도 변함없이 노력하는 강병현 약속드립니다. 저에게도, 팀에게도 많은 응원 부탁드리겠습니다.

#글_김종수 칼럼니스트​

​#사진_본인제공, KBL 제공

Copyright © 점프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