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 뒤 성적 오른 국내 1위 트레일러너

이정규 기자 2022. 8. 2.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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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건 비긴]채식 지향 김지섭 선수 "어설프게 채식하면 독, 영양소 공부하고 꾸준히 관찰해야"
채식을 지향하는 운동선수 김지섭씨가 달리는 모습. 김지섭 제공

*초록색 글자는 <채식하는 운동선수: 경기력을 극대화하는 게임 체인저, 최강의 채식 식단>(맷 프레이저·로버트 치키 지음, 엄성수 옮김, 싸이프레스 펴냄, 2022)에서 인용했습니다.

나무로 우거진 산길을 달리는 사람의 몸에 선명한 근육이 새겨져 있다. 늘씬한 허벅지 위로 튀어나온 울퉁불퉁한 근육, 알이 꽉 찬 종아리, 팔뚝을 가르는 전완근까지. 채식을 지향하는 김지섭(34) 트레일러닝 선수의 모습이다. ‘산악마라톤’으로 불리기도 하는 트레일러닝은 오솔길과 달리기의 합성어로 아스팔트 대신 산길, 초원, 사막 등 자연의 길을 뛰는 스포츠다.

그는 강원도 원주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다양한 제철 채소를 먹으며 자랐고 동네 산을 벗 삼아 놀았다. 마라톤은 고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의 권유로 우연히 시작했다. 특전사 부사관 전역 후 2013년 고비사막 마라톤대회에서 3위를 하며 트레일러닝과 인연을 이어갔다. 채식을 시작한 2019년 이후 2022년 6월까지 국내 모든 대회에서 우승했다. 세계 최고 대회인 울트라 트레일 몽블랑(UTMB) 참가 심사에 쓰이는 점수를 기준으로, 아시아(20㎞ 부문)에서도 1위에 올랐다.

햄버거, 피자, 삼겹살 먹어서는 회복이 잘 안 돼

2022년 7월20일 강원도 원주 동화마을 수목원에서 김지섭 선수를 만났다.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된 것만큼 행복한 일은 없다. 그만큼 잘 하고 싶다. 부족하다. 단순히 1등만 하는 순위 경쟁을 넘어 더 잘하려 한다. 채식을 시작한 이유다.” 단단하지만 느린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트레일러너는 짧게는 20㎞에서 길게는 160㎞까지 산과 들을 달린다. 그만큼 체력 소모가 크다.

2019년 초, 그는 햄버거·피자·삼겹살 등 열량이 높은 음식을 먹으며 체력을 회복해온 습관을 의심하게 됐다. 많이 먹었어도 컨디션이 떨어지는 걸 느껴서다. 동물성 단백질을 과하게 먹으면 생기는 위험 때문이었을까.‘콜레스테롤과 동물성 지방으로 동맥 내에 플라크가 쌓이고 (중략) 혈류가 줄어들면 발기 부전, 심장병, 심장마비, 뇌졸중 같은 질환들이 생겨난다. 이는 운동선수에게 결코 좋을 리 없다. 지구력, 체력 그리고 회복력을 위해서는 적절한 혈액 순환과 혈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해 6월, 채식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며 블로그에 글을 올렸다. ‘어느 정도 수준에 올라서니 주어진 시간 내에서 훈련하는 것만으로는 엄청난 퍼포먼스 향상을 기대하기 힘들다. (채식 식단 같은) 훈련 외적인 부분에서 더 공부하려 신경을 쓴다.’ 거창하게 채식을 시작하지 않았다. 유청으로 만든 동물성 단백질 보충제와 우유부터 끊었다. 채식한 지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각종 대회에서 1위를 석권한 그는 2020년 전업 트레일러닝 선수가 됐다.

김지섭 선수의 아침 또는 점심은 다양한 식재료를 갈아 마시는 완전채식을 지향한다. 채식 스무디에 곁들이는 식물성 단백질 제품들. 김지섭 제공

요즘은 아침과 점심, 하루 두 끼는 채식한다. 달걀과 생선은 먹지만 우유, 유제품, 붉은 살코기는 먹지 않는 '채식 지향'이다. “윤리적 이유로 채식하지는 않았다. 아직도 고기를 좋아한다. 운동능력을 유지하려 좋아하는 음식을 먹지 못할 때 오는 스트레스는 여전히 크다.” 김지섭 선수가 말했다. 그런데도 왜 계속 채식하는 걸까. 채식이 익숙해진 뒤 생긴 변화를 물었다. “단순히 채식했다는 이유로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냈다고 말하기 어렵다. 따지고 보면 달리기 속도에서 큰 차이는 안 난다. 다만 몸을 더 오래 쓸 수 있다는 느낌이 확연히 든다. 축적된 에너지를 더 길게 쓰는 것 같다.” 채식과 지구력 사이에 과학적 근거도 밝혀진 바 있다. ‘모든 채식 기반의 음식이 항염증 효과를 갖고 있는데다 비타민, 미네랄, 항산화 물질, 파이토케미컬(식물성 화학물질), 섬유질, 수분까지 풍부하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 몸이 격한 신체활동 후 회복하는 데 도움을 주는 물질들이다.’ 지구력을 필요로 하는 스포츠에 채식으로 인한 퍼포먼스 향상을 연구한 논문의 내용이다.

소중한 사람에게 함부로 강요할 수 없어

물론 채식하는 운동선수에게 따라다니는 의문이 있다. 단백질을 육류 섭취 없이 충분히 얻을 수 있냐는 물음이다. “채소에는 무기질, 비타민 말고 단백질도 있다. 식물성 단백질은 콩뿐만 아니라 현미, 치아시드 등 곡류에도 많다. 단백질이 부족한 식사를 했다면 식물성 단백질 보충제를 귀리 음료에 타 먹으면 된다.” 그가 보여준 식사에는 병아리콩과 잡곡, 달걀프라이가 들어간 취나물비빔밥이 있다. 잡곡밥은 210g 기준 단백질 6g, 병아리콩 100g에 단백질은 5g, 취나물무침에 80g 기준 단백질 2.5g이 들어간다. 달걀프라이까지 합하면 20g에 가까운 단백질을 섭취하게 된다. 하루 권장 단백질량은 성인 남자 기준 몸무게 대비 1천 분의 1 정도로, 몸무게가 60㎏이면 한 끼에 섭취해야 할 단백질은 다 채운 셈이다. ‘많은 현대인들은 자신이 하루에 필요로 하는 단백질보다 3∼4배 많은 단백질을 섭취하고 있다. (중략) 필요 이상 단백질을 섭취하면 그냥 없어지거나 지방 형태로 저장될 뿐이다.’

김지섭 선수가 직접 만든 저녁 식단. 아내와 함께 하는 저녁식사에는 일상의 균형을 위해 난류 흰살 생선류는 식단에 곁들인다. 혹시나 생길 수 있는 영양 결핍 및 불균형에 대비하기 위한 식단이기도 하다. 김지섭 제공

채식의 이점을 말하던 김지섭 선수가 모았던 양손을 벌리며 말했다. “채식이 몸에 좋다지만 어설프게 접근하면 독이 되기 쉽다. 채식을 알리는 콘텐츠도 부정적인 면은 잘 보여주지 않는다. 채식으로 부족해질 수 있는 철분 같은 영양소도 공부해야 한다. 최소 채식 3개월 이상 해야 부작용을 알 수 있다. 처음부터 환상적인 변화를 기대하면 안 된다. 꾸준함이 중요하다.”

그는 일상의 균형도 중요시한다. 제철 채소를 중심으로 난류와 생선을 섞은 저녁 식사를 아내와 함께 한다. “영양 설계가 완벽하더라도 일상이 완전하지 못할 때를 경계한다. 채식이라는 개념에 갇히지 않으려 한다. 일상을 함께 보내는 소중한 사람에게 채식을 강요할 순 없다.”

10월 첫 유럽 무대 진출… 채식으로 최고 기록 다짐

고칼로리 음식을 먹으면 지친 몸이 회복된다고 믿었던 김지섭 선수. “이제는 먹는 음식으로 몸을 만들고 만들어진 몸으로 훈련한다고 생각한다. 훈련의 시작이 식단이다. 일찍 알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2022년 8월에는 처음으로 유럽 무대에 진출한다. 아직 아시아권 선수가 유럽에서 열린 메이저 트레일러닝 대회에서 우승한 전례는 없다. “잘해야 한다. 단순히 높은 성적을 바라기보다 채식으로 좋은 몸을 오래 유지하며 내가 세운 최고 기록을 계속 깨나갈 것이다.” 프랑스에서 열릴 울트라 트레일 몽블랑을 준비하는 그의 다짐이다.

원주(강원)=이정규 기자 j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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