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년간 1달러도 받지 못한 노근리 사건 피해자들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정구도 노근리국제평화재단 이사장은 되풀이해서 말했다. 1950년 7월 벌어진 학살 이야기가 아니었다. 사건 후 72년간 한·미 양국의 행태에 그는 더 분개했다. 노근리 사건 피해자들이 사법을 통해 보상받을 길은 막혔다. 7월14일 대법원은 이들이 한국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고 패소를 선고했다. 피해자들은 고령이 되어 속속 세상을 뜬다. 남은 이들은 언제 제정될지 알 수 없는 법에 기댄다.
노근리 사건은 한국전쟁 기간 벌어진 가장 충격적인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동맹국 미국 군인들이 주민들을 모아놓고 발포해 200명 이상이 죽거나 다쳤다. 사건을 둘러싼 설은 여전히 분분하지만 분명한 것도 있다. 첫째, 교전은 없었다. 북한군과 전투하던 도중 발생한 피해가 아니다. 둘째, 오인 사격이 아니라 의도적 발포였다. 미군은 주민을 포위한 채, 오로지 그들을 죽이기 위한 목적으로 총격을 가했다.
피해자는 피란민이다. 1950년 7월23일부터 7월25일까지 미군은 충북 영동읍 주곡리와 임계리 주민, 피란민을 남쪽으로 인솔한다. 7월26일 정오께 황간면 서송원리에 도착한 피란민들은 공중폭격을 당한다. 이 과정에서 1차로 다수 주민이 사망했다. 주민들은 노근리 쌍굴다리로 피신했다. 이날 오후부터 7월29일까지 약 70시간 동안 미군은 주민을 포위한 채 사격을 가했다. 2004년과 2008년 심사 결과 인정된 희생자는 226명(사망 150명, 행방불명 13명, 후유장애 63명)이다. 피해자와 유가족은 ‘실제 희생자 수는 더 많다’고 주장한다.
72년 전 사건 현장에는 노근리평화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피란민들이 학살당한 쌍굴다리도 그대로 있다. 다만 역사적 장소로서 ‘보존’되었다고 보긴 어렵다. 자갈밭이었던 지표는 아스팔트로 덮여 통행로로 쓰이고 있다. 도로 아래에는 집중된 총격 흔적이 묻혀 있다. 탄흔이 도로 아래에만 숨겨져 있는 건 아니다. 쌍굴다리에는 동그라미, 세모, 네모 표시 수백 개가 있다. 사건 조사 중 사격 자국을 표기한 것이다. 그중 세모 표기한 곳은 모두 탄환이 박혀 있다.
적은 수이지만 굴다리 천장에도 사격 흔적이 있었다. 정구도 이사장은 ‘일부 미군의 양심’이 천장 사격을 불렀다고 해석한다. 명령을 따라야 했지만 차마 민간인을 죽일 수 없었던 군인들이 총구를 위로 향했다는 것이다. 사건이 70시간 동안 지속된 까닭 역시 같은 맥락이라고 그는 본다. “상대는 비무장 상태 민간인이었다. 더 빨리 몰살시킬 수도 있었다. 일부러 태만하게 사격한 병사들이 많았기에 오래 지속된 것이다.”
미군은 왜 이런 일을 벌였을까. 우발적 사건인지, 조직적 학살인지가 쟁점이다. ‘노근리에서 주민들을 죽여라’ 하는 구체적 명령이 하달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증언은 엇갈린다. 2001년 한·미 공동조사단은 공동발표문에서 “피란민을 향해 사격한 참전 장병 중 조사반에 증언한 모든 참전 장병들은 사격명령 없이 사격했다고 증언했다”라고 적는다.
다만 “사격하지 않은 참전 장병 중 일부는 소화기, 기관총, 박격포 및 야포 사격이 피란민에게 가해지는 것을 목격하였기 때문에 사격명령이 반드시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고 증언했다”라는 대목이 남았다. 일부 병사의 일탈이라기에는 지나치게 많은 화기가 동시다발로 동원됐다는 것이다. 정구도 이사장을 비롯한 피해자 다수는 증거를 찾지 못했을 뿐, 이 학살이 미군 상부의 명령이라고 믿는다.
“개인이 자료 모아 글 쓰는 상황이 옳은가?”
명령을 현장에서 과잉 해석했을 가능성도 있다. 1950년 7월25일 한국 정부 내무부 차관과 경찰국장, 미군 제8군 인사·정보 참모 등은 ‘미군 방어선을 넘는 피란민의 이동을 금지한다’는 내용의 ‘피란민 통제지침’에 합의한다. 바로 다음 날, 미8군 사령부는 예하 부대에 “어떤 순간에도 피란민들이 미군 방어선을 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라고 명령했다. 이날 주한 미국 대사 존 무초는 미국 국무부 딘 러스크 차관보에게 “이 시각부터 피란민들의 미군 방어선 통과를 금지한다. 방어선에 접근할 경우 경고 사격 후 총격을 가하라”는 서한을 보냈다. 한·미 공동발표문에는 7월 하순 노근리의 미군들이 ‘북한군의 침투전술’을 의식했다고 적혀 있다. 피란민에게 적대적인 상부 지침이 현장의 오판과 결합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지침’과 ‘오판’ 모두 비합리적이고 무도했다. 쌍굴다리에서 희생된 사람들 중 72%는 노인·여성·어린아이였다. 쌍굴다리에서 불과 1m 떨어진 우물로 물을 먹으러 가려던 사람도 총에 맞았다.
사건이 세계적으로 공론화된 계기는 외신 보도다. 1999년 AP통신이 노근리 사건을 폭로한 특집 기사를 냈다. 기사는 미국 안팎에서 큰 논란을 불렀고 이듬해 퓰리처상을 받았다. 그러나 AP통신이 아무도 모르던 이야기를 어느 날 갑자기 파헤친 것은 아니다. AP통신 기자는 국내 언론들의 보도로 사건을 처음 접했다. 국내 언론들은 정은용씨의 소설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를 보고 취재를 시작했다. 2014년 세상을 떠난 정은용씨는 정구도 이사장의 부친이다. 노근리에서 미군 총격에 아들과 딸을 잃은 피해자이기도 하다. 군사정권 시기인 1970년대부터 노근리 사건을 주제로 희곡·소설을 썼다. 문학을 통해 우회적으로 사건을 드러내려 한 것이다. 한편으로는 아들 정구도 이사장과 함께 자료를 모으고, 이를 바탕으로 한국과 미국 정부에 서한을 보냈다. 대부분 답이 없거나 부정적 반응뿐이었다. 부자는 AP통신 기자들에게 수십 년간 모은 자료를 제공했다. 정구도 이사장은 이 성과를 몹시 자랑스러워하지만, 한편으로는 한탄을 금치 못한다. “개인이, 피해 당사자가 자료를 모으고 글을 쓰는 상황이 옳은가? 언론과 정부가 할 일을 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했던 일이다.”
피해자들은 배·보상을 원한다. 2015년 시작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이들은 한국 정부의 책임을 물었다. 우선 경찰의 직무유기 문제를 제기했다. 노근리 사건이 벌어지기 전날인 7월24일, 이 일대 경찰은 주민들을 버려둔 채 기차로 피란을 떠났다. 주한미군 범죄 피해를 한국 정부가 배상토록 한 주한미군민사법 규정도 들었다. 교전 중 희생이 아니라 미군의 단순 범죄행위이므로 정부가 배상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7월14일 대법원은 둘 다 부정했다. 경찰 직무유기는 “6·25전쟁 중 극도로 혼란스러운 시대적 상황” 등을 들어 인정하지 않았다. 주한미군민사법은 적용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 법에는 ‘(서울 외 지역 기준) 1968년 2월10일부터 일어난 일에만 적용된다’는 구절이 있다.
정구도 이사장은 2001년 벌어진 일련의 일들을 두고두고 곱씹는다. “첫 단추를 잘못 끼워서 일이 여기까지 왔다”는 것이다. 2001년 1월 성명에서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은 노근리 사건에 ‘깊은 유감(deeply regret)’을 표명했다. 약 400만 달러를 들여 추모비를 건립하고 유가족 장학금을 지원하겠다고 했다. 노근리피해자대책위원회는 받지 않았다. 일부 언론은 “노근리뿐만 아니라 모든 미군 관련 사건 희생자까지 추모하는 사업이었기 때문”이라고 썼다. 사실이다. 그러나 ‘배상금을 독점하기 위해서’라는 해석은 오독이다. 정구도 이사장은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과 상황이 같다고 했다.
“그 돈을 받으면 당장은 좋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다른 민간인 학살 사건 피해자들이 배·보상을 요구하기 어렵게 만드는 ‘족쇄’가 될 수도 있다. 미국 정부가 ‘모든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사업이라고 밝혔기 때문이다.” 정 이사장은 당시 한국 정부가 피해자들의 의견을 받아 미국 정부와 협상하기는커녕, 피해자들에게 이 안의 수용을 강권하기에 급급했다고 말했다. 피해자들은 굽히지 않았고 72년간 “1달러도 받은 게 없다”. 미국은 제안했던 기금을 2006년 환수했다.
노근리 사건 피해자들이 돈을 받지 않은 다른 이유도 있다. 클린턴 대통령은 사과가 아니라 유감을 표명했고, 400만 달러는 배상금이 아니라 장학금이었다. 성과라면 성과다. 미국이 민간인 학살을 인정하고, 돈을 들여 추모하겠다고 나서는 일은 역사상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정구도 이사장을 비롯한 피해자들은 같은 돈이라도 배·보상금이란 이름으로 받길 원했다. ‘범죄’를 인정하고 사죄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정 이사장은 ‘노근리 피해자들이 돈을 밝힌다’는 온라인 악성 댓글을 종종 본다. 그는 “배상금·보상금 바라는 게 왜 나쁜가”라고 반문했다. “우리 형님, 누님을 도로 살려낼 수 있다면 돈 안 받아도 된다. 그게 안 되면 사죄와 반성을 의미하는 배·보상이라도 받아야 한다.”
“배·보상 요구가 왜 나쁜가”
배·보상 요구는 미국이란 국가에 대한 개인적 증오심의 발로가 아니다. 정 이사장은 미국 정부를 비판하면서도 “북한을 막아준 것은 고마워할 일이지만” “아무리 가까운 맹방, 우방이라지만”이라는 ‘단서’를 자꾸 달았다. 이유를 묻자 쓴웃음을 지으며 “자꾸 노근리 피해자들이 빨갱이라고 하니까…”라고 말했다.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1990년대 그는 기무사 관계자로부터 ‘무슨 일을 하고 있느냐’는 전화를 여러 차례 받았다. 부친인 정은용씨가 노근리 피해보상 운동에 앞장선 이유는 동네에서 몇 안 되는 대졸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운동을 하면서도 수사기관에서 고초를 당하지 않은 배경에는, 젊은 시절 경찰·반공연맹에 몸담았던 이력이 있다.
노근리 사건 피해자들은 이제 입법에 기댄다. 2004년 처음 제정된 ‘노근리사건법’은 희생자 심사 과정, 불이익 처우 금지, 위령사업 등만 규정한다. 입법 과정에서 빠진 배·보상이야말로 ‘알맹이’라고 피해자들은 여긴다. 지난 4월 시행된 ‘4·3사건법’은 보상을 규정한다. 정 이사장은 “4·3은 되고, 노근리는 안 될 이유가 무엇인가? 똑같은 법체계를 따오면 되고, 보상 액수는 훨씬 적다”라고 말했다.
노근리 사건은 무력하고 안타깝게 끝난 참사다. 그런데도 정구도 이사장은 ‘노근리 정신’이 있다고 했다. 이 정신은 전쟁 도중 일어난 학살 피해가 아니라, 그 후 72년간 정씨 부자를 비롯한 피해자들이 감행한 저항에서 비롯한다. “노근리 정신은 인권이다. 죽은 사람 목숨도 소중하다는 생각이다. 끝까지 진실을 규명하고 잘잘못을 가리는 것이다.” 가해국이 독재국가가 아닌 미국이기에 시작한 활동이라고 그는 말했다. 자유와 인권을 중시하는, ‘말 통하는 나라’에 호소하면 언젠가 결실을 거둘 수 있으리라 믿는다.
이것은 민주화 이후 우리 정부와 사회 각계에 바라던 바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직도 ‘부끄러운 자화상’만 보인다고 했다. 노근리 사건 5년 후 태어난 정구도 이사장은 올해 67세다. 노근리평화공원 위령탑 앞에는 그가 만나지 못한 다섯 살 형과 두 살 누나의 동상이 있다.
영동·이상원 기자 prode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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