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에서] ‘1주 3건’ 담합 방조한 대법원

양은경 사회부 법조전문기자 2022. 8. 2.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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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심당 세 건’이 제일 문제죠. 사건이 그만큼만 들어오는 게 아닌데, 법원이 굴러가겠습니까.”

재판 지연 현상에 대한 원인을 판사들에게 묻자 가장 많이 돌아온 답변이었다. ‘주심당 세 건’은 2019년 무렵 전국 민사합의부 배석 판사들이 각자 주심을 맡은 사건 기준으로 일주일에 판결문 세 건만 쓰겠다고 암묵적으로 합의한 원칙이라고 한다. 현재는 다른 재판부로도 확대되고 있다.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 모습./뉴스1

이는 들어오는 사건은 모두 처리한다는 과거 원칙과는 정반대다. 한 부장판사는 “처리 건수를 정해놓고 그 이하로만 일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고 했다. 게다가 단순한 권고 수준이 아닌 사실상 강제력도 지녔다. 일선 법원의 한 수석부장판사는 “세 건 이상으로 사건 처리를 독려하던 재판장들이 곳곳에서 배석들과 마찰을 빚었다”고 전했다.

사실 부장판사들도 굳이 배석에게 싫은 소리를 들으며 사건 처리를 독려할 이유가 없다. 김명수 대법원장 취임 후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제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법원의 대표적인 ‘선발 인사’였던 고법부장 승진제는 사건 처리에 상당한 역할을 했다. 승진 후보군이 대거 배치된 서울중앙지법은 밤늦게까지 판사실에 불이 켜진 날이 많았다. 한 판사는 “부장님이 판결문을 검토하고 돌려주셨는데 시계를 보니 새벽 2시였다”고 기억했다.

고법부장 승진제는 판사를 승진에 목매는 관료로 만드는 부작용도 있다. 워라밸이 일상화된 MZ세대 판사들은 새벽까지 일하며 부장판사의 승진을 뒷받침하던 그 판사들이 아니다. 게다가 2018년엔 워킹맘 판사가 과로사하는 안타까운 일도 있었다.

문제는 김명수 대법원이 시대 변화에 발맞추는 것을 넘어 판사들이 열심히 일할 동기마저 아예 없애버렸다는 것이다. ‘재판 독립’을 명분으로 일체의 평가와 선발제도를 무력화했다. 법원장마저 판사들의 추천을 바탕으로 임명하는 ‘법원장 후보추천제’가 내년까지 전국 지방법원으로 확대될 예정이다. 한 부장판사는 “법원장을 ‘인기투표’로 뽑는데 누가 감히 사건 처리를 독려하겠나”고 했다. 판사들의 근무 평정 또한 신상필벌 원칙과 멀어진 지 오래다. 한 단독판사는 “휴직을 밥 먹듯이 하고도 해외연수 대상자로 선발되는 동료를 보며 열심히 일하는 게 바보처럼 느껴졌다”고 했다. 그러니 ‘주심당 세 건’을 지키며 워라밸을 하는 게 판사들로서는 합리적 선택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는 사이 장기 미제 사건은 5년 전보다 두 배, 세 배씩 늘어나고 당사자들은 판사 얼굴이라도 한 번 보려면 다섯 달 이상을 기다리게 됐다.

헌법 103조는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해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고 정했다. 여기에 현실에서 필요한 요소를 하나 더 보탠다면 ‘동기 부여’다. ‘신상필벌’을 모두 부활할 수 없다면, 열심히 일하는 판사들을 위한 보상체계라도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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