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대 국회 톺아보기 <하>] '입법 폭주' 막으려면.."쓸데없는 법 내지 마"
숫자 채우기 용·표절 법안 등…"입법 발의에 대한 검증 시스템 필요"
난항을 거듭했던 제21대 후반기 국회가 드디어 열렸다. 여야는 상임위원회 구성을 놓고 치열한 협상 끝에 극적 합의했다. 전반기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민생'은 없고 '정쟁'만 있는 입법부 국회라는 오명도 여전하다. 그래도 입법부 본연의 역할은 했을까? <더팩트>는 21대 전반기 국회 입법활동을 <상> <하>편으로 톺아보고, 의원들이 '국회의 본분'을 다하고 있는지 점검해 보았다. -편집자 주
[더팩트ㅣ국회=곽현서·송다영 기자] 국회미래연구원에 따르면, 21대 국회 개원 이후 첫 한 달 동안 접수된 법안은 △17대 93건 △18대 82건 △19대 327건 △20대 522건이다. 회를 거듭할 수록 국회의 입법 발의 개수는 늘고 있지만, '법이 얼마나 많이 발의됐느냐'가 아니라 '꼭 필요한 법안이 본회의를 통과했느냐'에 집중해야 한다고 전문가와 입법 종사자들은 입을 모은다.
<더팩트>는 21대 국회 후반기를 맞아 복수의 국회 관계자 및 입법 전문가들을 취재해 국회 입법과 관련한 문제점을 진단해 봤다.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21대 국회에 들어서도 입법 기관의 문제점은 개선되지 않고 있단 지적이 여전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의정 실적을 부풀리고자 의원들이 '법을 너무 많이 찍어낸다'는 게 공통된 문제의식이었다. 같은 내용을 골자로 하지만 몇몇 문구만 바꾼 유사 법안들이 떼로 제출돼 계류 상태에 머무는가 하면, 사회적으로 물의가 되는 사건·사고가 있을 때 의원이 이슈를 선점하기 위해 입법에 충분한 시간을 들이지 못하고 성급하게 부실한 법안을 발의하는 등의 문제도 거론됐다.
√ '일단 내고 보자'…이해도 부족한 '무성의' 법안 발의
첫 번째 문제로 제기된 것은 무성의한 법안 발의다. 법안의 필요성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한 채로 법안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보좌진 ㄱ씨는 "의원실에서 법을 만들고자 하는 목적과 취지, 법안 초안을 작성해서 국회 법제실에 넘기면, 법제실에서 검토를 거쳐 최종 법안인 '성안'이 돼서 다시 의원실에 넘어오게 된다. 그러면 의원실에서 세부적인 문구나 조항을 손보고 발의한다"며 입법 과정을 설명했다.
그는 "애초에 법을 만들기 위해선 법문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각종 시민단체와 이해 관계자들의 입장을 듣기 위해 공청회나 토론회도 진행하긴 하지만, 대부분이 형식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또 ㄱ씨는 법안 발의 과정에 있어 대표 발의자 외 최소 10명의 의원이 '공동발의자'로 동의를 하는 데 있어서도 허점이 있다고 했다. 공동발의자에 의원들의 이름을 올리는 본 취지는 '최소 10명의 의원이 이 법안 발의를 위해 검수를 거쳤다'는 건데, 실제로는 의원들이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도장을 찍어 공동발의자에 이름을 올리는 경우가 부지기수라는 것이다.
법안 발의 건수가 해를 거듭할수록 늘다보니, 사전 검토 뿐 아니라 공동발의자의 규모가 축소됐다는 지적도 나온다. 의원들끼리의 논의는 줄고, 필요 최소 인원만 갖춘 법안 발의 경쟁이 심화되고 있다는 방증인 셈이다. 국가미래원의 연구에 따르면, 13대 국회에서 평균 공동발의 인원은 73.2명이었던 데 반해 14대 66.6명·15대 59.4명·16대 39.0명·17대 21.3명·18대 19.9명·19대 13.6명·20대 12.5명 순으로 꾸준히 줄었다.
이에 대해 보좌진 ㄴ씨도 "도장을 찍어주는 공동 발의 의원 중에서 법안에 대한 깊은 이해와 논의를 하는 경우는 드물다"며 면밀한 검토 없이 입법 발의가 진행되는 것에 고충을 토로했다.
민선영 참여연대 의정감사센터 간사는 "(의원들이) 법을 많이 발의했다는 것을 손쉽게 이용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한국 의정활동에 있어서 절대 발전적인 요소가 될 수 없다"며 "법안을 하나 만들더라도 사회적으로 유의미하고 영향력 있거나, 사회 안전망을 메꾸는지 등 '발전적인 효과'가 있는지를 발의해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은 상황"이라고 꼬집었다.
√ 사회적 이슈 생기면 우르르 발의… 글자만 살짝 바꾼 '표절 법안'도
'정인이(가명) 아동학대 사망 사건' '쿠팡 물류창고 화재' 등 사회적 공분을 일으키는 사건이 생기는 경우, 며칠 지나지 않아 관련 법안들도 우수수 쏟아지는 것도 국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문제는 소속 상임위 사안이 아닌데도 의원들이 시선을 끌기 위해 너나 할 것 없이 법안을 발의하다 보니 표절로 의심되는 유사 법안도 중복발의 되는 상황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보좌진 ㄷ씨는 "사회적 이슈가 터지면 아무래도 (의원실 입장에서는) 관련 법을 빨리 만들어야 그 이슈를 의원이 선점하는 게 있다. '정인이 사건' 이후 아동학대 관련 법안들이 쏟아져 나왔지 않나"라며 "평소에는 발의해도 통과가 되지 않았던 법안들이 국민들의 관심이 많아지면 통과가 쉬워져서 그런 것도 있다"고 말했다.
지난 2년간 국회의 최대 관심사 중 하나는 '코로나 19'로 인한 민생 경제 살리기였다. 연이은 대통령 선거와 지방선거와 맞물려 국회의원들은 저마다 지역 소상공인들의 피해액 보상 챙기기에 적극적으로 나서며 '소상공인 보호 및 지원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했다.
21대 국회가 개원한 직후 이와 관련해 발의된 법률안은 약 60여 건이다. 일부 법안은 해당 상임위를 거쳐 본회의를 통과해 '법률'로서의 효력을 갖게 됐다. '원안·수정 가결' 혹은 '대안반영폐기' 처리된 것도 있지만, 이슈 선점을 위해 발의했던 탓에 제대로 된 검토가 이루어지지 않아 여전히 '계류' 상태로 남아있는 법안도 다수다.
법안 내용이 거의 유사한 경우도 있다. 지난 7일 경기도 평택의 한 초등학교 앞 횡단보도를 건너던 초등학생 두 명이 '굴착기'에 치여 한 명이 숨졌다. 이곳은 '어린이보호구역'(스쿨존)이었으나 신호를 어기고 달리는 굴착기에 초등생들이 피해를 입은 것이었다. 그런데 해당 사고가 '스쿨존'(학교 앞 어린이보호구역)에서 어린이 교통사고를 일으키면 가중 처벌을 받게 되는 △'특정범죄 가중 처벌 등에 관한 법률(민식이법)'에 적용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굴착기가 도로교통법에 규정된 '건설기계'에 포함되지 않아서다.
이에 국회에서는 건설기계가 어린이보호구역 안전사고와 음주 및 약물로 인해 사람을 사망 또는 상해에 이르게 한 경우 가중 처벌하도록 하는 '특정범죄 가중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안'을 발의했다.
관련해 비슷한 시기에 C와 D 의원이 낸 '특정범죄 가중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을 비교해봤다. 문구의 세밀한 내용이 다를 뿐, 두 안 다 처벌 차량에 '건설기계'와 '원동기장치자전거'를 포함하자는 내용이 동일한 것을 볼 수 있다.
이 외에 여야 간 쟁점으로 부딪혔던 '형사소송법 일부개정법률안', '언론중재 및 피해중재 일부개정법률안' 등도 의원들이 문구 일부만 수정한, 입법 취자가 같은 법안들이다.
의원들의 법률안 발의 건수가 입법 활동의 '성실성'을 평가하는 단적인 척도로 활용되는 탓에, 이를 의식한 의원들이 '숫자 부풀리기'용으로 입법을 남발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의원들의 법안 발의가 지역구에 입법 실정을 알리는 '의정보고서'에 기재할 내용에 지역구 현안 관련 입법을 얼마나 했다는 내용을 기재하거나, 한해 법안 발의 건수를 기재해 성과를 과시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시민 단체가 입법과 관련한 평가지표를 만들어 의원들에게 '의정 우수상' 등을 주기 때문에 , 상을 위해서 의무적으로 법안 개수를 채우는 의원실도 적지 않다는 전언이다.
그래서인지, 국회에선 기존 법 조문의 단어만 살짝 고쳐 법안을 발의하거나 여러 소관위에 같은 내용의 개정안을 대표발의하는 등의 '입법 부풀리기' 행태도 여전하다.
E 의원은 우리 현행 법률에 남아있는 '일본식 표현'을 우리말로 바꾸는 내용으로 개정안을 6건이나 냈다. '왜곡된 법률용어와 문장을 한글화해 이해하기 쉽게 표현하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는 취지에서다.
하지만 이를 두고 보좌진 ㄹ씨는 "사실 내용은 같은데 숫자 채우기용으로 낸 것 아니겠냐"며 "적용되는 법안 명이 다 다르기 때문에 일괄적으로 세네 개씩 고칠 수는 있지만, 의미있는 법안을 만들기보다 발의 수를 늘려야 하니 그런 사소안 법안들을 건드리는 것 아니겠나. 좋게 보이진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ㄹ씨는 "언론에서도 그 법을 발의했다는 것만으로 의원을 조명하고, 발의 개수 혹은 가결 건수 등을 가지고 기사를 쓴다. 그런데 사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법의 당위성과 내용이다"라며 "정부의 조치로 해결될 일이나, 정부 기관들이 제 역할을 하면 되는 경우에도 입법 발의를 남발하는 것은 또 하나의 규제를 낳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구조적 개선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밝혔다.
보좌진 ㅁ씨도 "법을 많이 만드는 것 자체도 규제일 수 있다"며 "발의만 많의했다고 무조건 의원의 실적으로만 평가해선 안 된다. 법조인 출신들이 의원이 되면 오히려 법을 잘 안 만드는 이유도 이와 비슷한 논리일 것"이라고 말했다.
√ 무분별한 '발의 남발' 안 하려면…"양적 성장 아닌 질적 성장하는 국회여야 해"
지난 2020년 10월 국회미래연구원에 발표된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회의원 1인당 검토해야 할 법안 건수는 미국의 2배, 프랑스의 23배, 일본의 62배, 영국의 91배인 것으로 드러났다.
관계자들에게 입법 과정에 있어 더 나은 국회가 되기 위한 방안을 묻자, 한마음으로 의원들의 입법 활동이 양이 아닌 질로 평가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들은 무더기 법안 발의는 △국회 부처에 과다한 입법 검토 업무를 부여하고 △정작 본회의를 통과해야 할 법을 지연시키는 등의 문제를 유발한다고 지적했다.
보좌진 ㅂ씨는 "법이 일단 발의되면, 상임위에서부터 검토가 시작되고, 법사위로 넘어가서 체계자구 심사를 한다. 법사위원을 지냈던 한 의원은 '제발 의원들이 쓸데없는 법안을 좀 발의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경우도 봤다"며 "법안의 필요성에 대한 충분한 검토 없이 하루에도 몇백 개씩 발의되는 법안들은 문제라고 본다"고 문제를 지적했다.
초선인 E 의원은 "의원들의 입법 평가를 양적이 아닌 질적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본다. 일부 의원들은 한 문장만 변경해서 개정안을 내는 등의 '꼼수'를 쓰는데도, 외부에서는 이걸 다 성과로 인정하니 아이러니한 부분"이라고 아쉬움을 표했다.
전삼현 바른사회시민회의 공동대표는 "우리 사회에 필요한 법들이 입법되고 있는지, 그 법안이 헌법에 부합하는지 등의 검토가 충분히 이뤄지는 '시스템'이 구축돼야 한다"며 "현재는 의원들이 법안을 발의하면, 그 법이 '발의될만 한 지를 검증할 수 있는 과정이 없다. 입법 거부가 불가하니 모두 발의 건수로 충족되는 것이다"라며 법안 정성평가 시스템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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