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와 우영우는 귀엽지만 귀여움이 전부는 아니야[김유진의 구체적인 어린이]

김유진 2022. 8. 1.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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⑪ 유년 동화가 그리는 귀여운 세계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아래 사진)는 드라마 속 장애인의 재현 문제를 제기한다. 유년 동화 <꼬마 너구리 요요>는 어린이를 ‘귀여움’의 틀에 가두지 않는다.
엉뚱한 어린이와 무해한 우영우를
비장애 어른들은 ‘귀여움’으로 소비
‘제어가 가능한 타자’라는 인식 투영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두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오가는 여러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여 듣고 있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인을 드라마에서 어떻게 그릴 것인가’ 하는 문제는 ‘어린이를 문학작품에서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 하는 아동문학의 오랜 고민과 맞닿아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장애인과 어린이는 소수자라는 정체성을 공유한다. 비장애인과 어른이 기준이자 중심인 세계에서 기준 바깥에, 그리고 중심에서 멀리 있는 사람이다. 기준과 중심으로 살아온 사람은 아무리 애를 써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지점이 있을 거다. 그러니 어린이 독자가 읽는 문학을 어른 작가가 쓰는 경우 과연 그들의 이야기를 잘 담아낼 수 있을지 고민스럽기 마련이다.

여성 장애인 주인공이, 세상의 가장 중요한 기준인 사법제도 한가운데서 약자를 돕는 이 이야기는 우선 몹시 반갑다. 지금까지 우영우가 변호한 인물은 가정폭력 피해 여성, 자폐 스펙트럼 장애인, 도시 개발에 반대하며 삶의 터전을 지키는 지역민 등이었다. 소수자가 주인공인 데서 끝나지 않고 소수자의 연대가 가져온 승리를 산뜻하면서도 따뜻하게 보여준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이야기하듯 우영우라는 캐릭터가 지닌 ‘무해’하고 ‘능력’ 있는 장애인상은 우려의 지점이 있다. 분명 우영우는 매우 예외적이기에, 시청자는 장애를 판타지로 즐기면서 정작 바로 내 옆의 장애인을 소외시키는 위험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드라마 속 우영우를 사랑한다고 해서 이동권 시위를 하는 장애인과 연대하는 일로 곧장 나아가지는 않는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무해함’이 점점 중요해지고 더구나 소수자가 끼치는 불편이 민폐로 취급되는 사회 분위기에서 장애인은 무해함을 강요받는다. ‘무해함’에 대한 우리의 강박은 우영우를 귀여운 캐릭터로 만들었다. 귀여움을 지닌 존재에게 쉽게 마음의 빗장을 열게 되는 까닭은 귀여움이 안기는 잔잔한 기쁨과 미소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귀여움은 무해해 보인다. 제어가 가능한 타자, 자신을 침범하지 않는 타자로 여기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아동문학 작품이 어린이를 귀엽게만 그릴 때 잠시 멈춰 귀여움의 근원이 어디서 왔으며 무엇을 생산하는지 따지고 의심해본다. 물론 어린이는 귀엽지만 귀여워야 어린이인 건 아니다. 귀엽지 않은 어린이도, 귀엽지 않은 때의 어린이도, 어린이는 어린이다. 어른이 귀엽다고 만든 틀 밖에서 그냥 존재할 뿐이다. 우영우가 무해해서 사랑받듯 어린이가 귀여워야 사랑받는다면 그건 슬픈 일이다. 아니, 잘못된 일이다. 하지만 어른이 어린이를 두고 사랑스럽다며 찬탄하는 지점은 오래도록 귀여움에 있었다. 인지 능력과 지식 정도가 어른과 똑같지 않은 어린이가 세상을 엉뚱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신선하고 재미있을 때 역시 어린이는 순수하다며 박수를 쳤다. 그걸 어린이다움이라고 불렀다.

꼬마 너구리 요요 이반디 지음 | 홍그림 그림 | 창비 | 2018

유년 동화가 그리는 귀여움과 그 너머

아동문학 중 귀엽기로 치면 유년 동화 장르가 최고일 거다. 학령 기준으로 저학년 동화라고도 부르는 유년 동화는 어린 연령의 어린이가 처음 읽는 동화다. 그림책을 읽던 어린이가 글자를 배우고 이미지가 아닌 텍스트 중심으로 읽는 첫 아동문학 장르다. 그러니 높은 연령의 어린이가 읽는 동화보다는 문장이 짧고, 구성이 명쾌하다. ‘동화’라고 하면 흔히 떠오르는 환상성이 중요시되며, 의인 동화가 많다.

<꼬마 너구리 요요>(이반디·창비·2018) 역시 유년 동화의 특징을 갖고 있다. 80여쪽인 얇은 책에는 동화 ‘내가 더 잘할게’ ‘새해’ ‘정어리 아홉 마리’ 3편이 실려 있다. 그중 가장 귀여운 동화는 ‘정어리 아홉 마리’다. 산쥐 왕자가 더하기를 배워 축하하는 잔치에 숲속 동물들이 초대받는다. 초대에는 감사를 표시해야 하니 동물들은 산쥐 왕에게 인사하며 ‘쓸모없는’ 선물들을 전달한다(여기까지만도 귀여운 게 세 개나 된다. 덧셈 성공 기념 축하 잔치, 작은 산쥐 왕에게 아기 동물들이 인사하는 광경, 구두 한 짝과 열쇠가 없는 자물쇠 등 하나같이 쓸모없는 선물까지). 인사하는 아기 오소리에게 산쥐 왕이 엄마 오소리의 안부를 묻는다.

“많이들 컸구나. 어머니는 잘 계시냐?”

산쥐 왕이 물었어요.

“엄마는 정신이 없어요.”

“아니, 왜?”

“동생을 낳아서 바쁘거든요.”

“오, 그래? 여자아이인가?”

“아니요.”

아기 오소리들이 도리질을 쳤어요.

“그럼 아들이로군.”

그러자 아기 오소리들이 놀란 눈을 끔벅이며 머리를 갸웃거렸어요.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정어리 아홉 마리’, <꼬마 너구리 요요> 71쪽

어린이의 무지가 귀여움으로, 귀여움이 사랑스러움으로 데굴데굴 번져간다. 어린이와 가까이 지내는 어른이라면 사실 날마다 마주치는 귀여움이다. 어떤 귀여움은 견고한 세계를 무너뜨리기도 한다. 덧셈이라는 작은 성취도 온 힘으로 기뻐하고, 가장 작은 산쥐가 왕이 되고, 값비싸거나 유용한 선물이 아니어도 나무람을 받지 않듯이 말이다.

이제 다시 잔치의 목적으로 돌아가, 산쥐 왕은 산쥐 왕자의 덧셈 실력을 자랑하려고 문제를 낸다. “푸른 정어리가 네 마리, 노란 정어리가 다섯 마리나 되는구나. 자, 여기 계신 손님들께 정어리가 모두 몇 마리인지 말해 드리렴”(<꼬마 너구리 요요> 80쪽). 앞서 ‘2+3=5’를 멋지게 답한 산쥐 왕자는 갑자기 난감해한다. 산쥐의 손가락은 네 개씩 모두 여덟 개였던 것.

산쥐 왕자처럼 손가락으로 셈을 하는 나이일 법한 어린 독자는 마치 자기가 수많은 눈동자에 둘러싸인 양 조마조마해질 것 같다. 하지만 유년 동화는 어린이를 혼내거나 난처하게 만들고 끝내는 세계가 아니니 안심해도 좋다. 자식을 사방에 자랑하고 싶은 부모의 욕심 때문에 결코 어린이를 상처받게 하지 않는다. 산쥐 왕이 고함치고 왕자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던 순간 슬그머니 왕자 옆에 선 너구리 요요는 자기 손가락 하나를 펼치고, 왕자는 정답을 맞힌다. 이렇듯 유년 동화는 언제든 다정한 손이 나타나 도와주는 세계이다.

‘정어리 아홉 마리’는 마냥 귀여운 데 비해 ‘내가 더 잘할게’는 귀엽고도 슬프다. 동화는 이렇게 시작한다.

엄마가 아기 늑대를 데리고 왔어요. 집을 잃은 아기 늑대요.

아기 늑대는 온몸이 그늘진 하얀색이었어요. 뾰족하게 선 두 귀가 귀여웠어요. 적당히 나와 꼭 다문 입은 새침해 보였고요. 무심한 듯 스쳐보는 두 눈에는 숨길 수 없는 도도함이 있었답니다.

‘이렇게 특별한 아기는 없을 거야!’

꼬마 너구리 요요는 가슴이 뛰었어요.

요요는 늘 이런 동생이 갖고 싶었거든요.

-<꼬마 너구리 요요> 7~8쪽

처음 두 문장은 하나로 합쳐 ‘엄마가 집을 잃은 아기 늑대를 데리고 왔어요’라고 쓸 수도 있겠다. 그게 경제적이고 효율적이다. 하지만 이 책의 독자는 이제 막 한글을 떼고 그림책에서 읽기책으로 넘어간 어린이다. 그러니 간결한 문장에, 정보는 하나씩. 문장을 나누니 두 문장 사이에 리듬이 생기고, ‘아기 늑대’에게로 시선이 쏠린다. 아기 늑대의 털색이 “그늘진 하얀색”이라는 표현은 시적이면서도 선명하다. ‘옅은 회색’이라고 했다면 색깔을 묘사하는 데서 끝났을 거다. ‘순백’이었다면 집을 잃은 아기의 슬픔에 어울리지 않는다. “그늘진 하얀색”은 아기의 불안과 함께 아기 늑대도 늑대라는 사실까지 연상케 한다. 동생을 바랐던 요요는 단박에 아기 늑대 ‘후우’에게 빠진다. 이처럼 인용문에서는 어려운 단어 하나 없이 짧고 유연한 몇 문장이 흐르는 중에 인물이 소개되고 사건이 등장한다. 유년 동화의 매력이다.

요요는 후우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갖은 애를 쓴다. 엄마가 준 미음을 먹지 않고 축 처져 있는 후우에게(후우는 젖을 먹는 포유류 아기이자, 육식성 늑대니까 안 먹는 게 당연하다!)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정어리를 잘게 조각내 먹인다. 하지만 후우는 먹은 걸 다 토해내고, 요요는 “아기한테 아무거나 막 먹이면 안 돼!”(<꼬마 너구리 요요> 15쪽)라고 엄마에게 혼이 난다. 자기가 제일 아끼는 걸 주었는데 이런 억울할 데가. 다른 사람이 내 맘을 몰라주는 섭섭함과 억울함, 그러나 자신의 언어로는 또렷이 따질 수도 없는 답답함. 낮은 연령의 어린이 독자라면 몇 배 더 공감할 것 같다.

귀엽지 않아도, 귀엽지 않은 때도
어린이는 어린이, 우영우는 우영우
귀여워야 사랑받는다면 잘못된 일

후우는 요요의 정성에도 불구하고 끝내 마음을 열지 않는다. 하지만 요요의 친구인 곰 포실이를 보자마자 얼른 다가가 안긴다. 까르르 소리를 내어 함빡 웃기까지 한다. 이때 요요의 슬픔은 “요요의 어두운 눈가가 더 어두워지는 것 같았어요”(<꼬마 너구리 요요> 28쪽)라고 유머러스하게 표현될 따름이지만 정말이지 너무나 안타깝다. 산비둘기 아저씨가 후우네 집을 찾고 이제 곧 후우의 부모님이 오시기로 했는데 요요는 후우를 포실이네 집에 보낸다. 후우를 위해 큰 마음을 먹은 셈이지만 후우와 친구들이 떠나자 엄마 앞에서 결국 울음을 터뜨린다. “왜 나는 아니야?”(<꼬마 너구리 요요> 32쪽)

왜 나는 아니야? 다른 애는 아무 이유 없이 좋아하면서 왜 나는 좋아하지 않아? 나는 너를 이렇게 좋아하는데 도대체 왜.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슬프고 절망적이다. 제목처럼 ‘내가 더 잘할게’라고 애원해봤자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다. 서로 마음의 크기와 방향이 달라 상심하게 되는 일은 어린이에게도 어른과 마찬가지로 벌어진다. 내가 좋아하고 함께 놀고 싶은 친구는 내게 관심이 없다. 선생님은 다른 아이들을 나보다 더 예뻐한다. 부모님의 사랑을 잃을까봐 끝없이 사랑받기 위해 무의식중에 애쓴다.

그럼에도 요요는 눈물을 그친다. 슬픔이 사라져서가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 울음은 잦아드는 법이고, 그건 요요도 마찬가지”(<꼬마 너구리 요요> 33쪽)이기 때문이다. 엄마가 끓여준 따듯하고 하얀 감자 수프를 먹고 나자 요요는 ‘그건 후우의 마음’이라는 답을 찾는다. 슬픔은 여전하지만 이제 후우가 밉지는 않다.

좋은 유년 동화는 귀여움에 가두지 않아
시간이 지나야 절로 잦아드는 슬픔도
어린이에게 있다는 걸 알고 위로해줘

귀여워도, 안 귀여워도

유년 동화는 귀엽다. 낮은 연령 어린이 독자의 귀여움을 조목조목 담고 있다. 어린이의 귀여움을 섬세하게 관찰해 빼곡히 적어두었다가 진짜배기 귀여움을 잃어버린 세상에 널리 풀어놓는다.

좋은 유년 동화는 귀여움에 어린이를 가두지 않는다. 귀엽게 봐주다가, 다그치다가, 외면하다가… 변덕 부리지 않고, 필요한 일을 옆에서 조용히 해주겠다고 약속한다. 귀여움만이 아니라 절로 잦아들어야 잔잔해지는 슬픔 또한 어린이에게도 있다는 걸 알고 슬픔을 위로한다. 그런 유년 동화 한 편을 오늘도 찾아본다. 어린이는 귀엽지만 귀여운 게 전부가 아니라 말하는 동화들이 있다면 설령 어린이의 귀여움만 소비하고 불편함은 외면하는 현실이 우리에게 있다 해도 너무 많이 상심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김유진



아동문학평론가·동시인. 동시집 <나는 보라> <뽀뽀의 힘>, 청소년시집 <그때부터 사랑>, 아동문학평론집 <언젠가는 어린이가 되겠지>를 출간했고, ‘토닥토닥 잠자리 그림책’ 시리즈를 썼다.

아동문학 작품 속에서 어른과 어린이가 좀 더 자주 만나고, 좀 더 가깝게 이어지는 날이 올 수 있기를 바란다.

김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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