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도생의 시대에 던지는 물음

김경욱 2022. 8. 1.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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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영화 <다크 워터스> 스틸컷. 이수씨앤이 제공

[편집국에서] 김경욱 | 스페셜콘텐츠부장

1800명에 가까운 이들을 잃은 참사를 겪고도 왜 우린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했을까. 최근 엘지(LG)생활건강의 어린이용 물티슈 일부 제품(베비언스 온리7 에센셜55)에서 가습기살균제의 원료로 쓰인 성분(CMIT, MIT)이 검출됐다. 이 기업은 식품의약품안전처의 판매중지·회수 폐기 명령에 따라 문제가 된 제조번호(1LQ) 제품은 물론, 해당 물티슈 모든 제품을 교환·환불해주겠다고 발표했고 현재 관련 절차가 진행 중이다.

이 물티슈는 대형마트와 온라인 쇼핑몰에서 약 8개월 동안 팔려나갔다. 이미 수많은 이들이 이 제품을 썼다는 얘기다. 어린이용이니까, 어른이 쓰는 것보다는 안전한 방식으로 만들어졌을 거라고 믿으면서 부모들은 이 물티슈로 아이의 코와 입, 손 등을 닦아줬을 것이다. 십수년 전 ‘아이에게도 안심’ ‘산림욕 효과’ 등 광고를 믿고 가습기살균제를 썼던 이들도 다르지 않았다.

엘지생활건강은 “검출된 가습기살균제 성분이 호흡기를 통해 흡입될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했지만,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가습기살균제 참사를 통해 기업과 국가에 대한 신뢰가 일찌감치 흔들렸기 때문이다. 그럴 일은 없어야겠지만, 혹시라도 아이가 호흡기질환을 앓는다면 이 제품을 쓴 부모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신뢰가 깨지면 의심이 자랄 수밖에 없다.

가습기살균제 참사는 현재진행형이다. 7월29일 기준, 환경부 산하 한국환경산업기술원 가습기살균제피해지원센터에 접수된 피해자는 7768명, 사망자는 1784명에 이른다. 정부가 공식 인정한 피해자는 4350명(7월13일 기준)이다. 대한민국 최악의 화학참사라고 불리는 이유다. 사망자와 피해자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어린이용 물티슈에서 가습기살균제 원료 물질이 검출된 것이다.

이번 사태의 가장 큰 문제는 8개월 동안 상품이 팔리는 과정에서 ‘안전장치’가 작동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엘지생활건강은 가습기살균제 성분이 미량 검출됐다고 했으나, 다량이든 미량이든 가습기살균제 참사 이후 이 원료는 생활 화학제품에 사용이 금지됐다. 사용금지 물질이 쓰였는데도 내·외부 통제가 이뤄지지 않았다.

해당 성분이 발견되는 과정에 우연이 작동했다는 점도 불안을 키운다. 언론 보도를 보면, 식약처의 의뢰를 받은 보건환경연구원의 무작위 검사에서 이 물티슈의 가습기살균제 성분이 확인됐다. 무작위 검사였기에 이 상품은 검사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안전을 대하는 정부의 태도는 우려를 더욱 부추긴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달 26일 한동훈 법무부 장관에게 “기업 활동을 위축시키는 과도한 형벌규정을 개선하라”고 지시했다. 이는 중대재해처벌법 완화를 염두에 둔 발언으로 풀이된다. 윤 대통령은 대선 과정에서 중대재해처벌법은 “경영 의지를 위축시키는 메시지를 강하게 주는 법”이라며 부정적인 인식을 드러낸 바 있다.

가습기살균제 참사가 우리에게 전하는 교훈은 이윤추구에 혈안이 된 기업도, 국민 보호 책임을 방기한 국가도 다 같은 공범이라는 점이다. 기업이 1994년부터 2011년까지 인체에 유해한 가습기살균제 약 1000만개를 팔아 돈벌이를 하는 동안, 국민의 건강을 보호해야 할 국가는 없었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때도 그랬고, 세월호 참사 때도 다르지 않았다. 기업 활동의 자유도 존중돼야겠지만, 그 자유가 누군가의 존엄성을 파괴한다면 정부는 시장의 탈선을 시정하기 위해 개입해야 한다. 사람 목숨이 걸린 일이기 때문이다. 규제를 하지 않는데 어느 기업이 돈 써가며 안전장치를 마련하겠는가.

미국판 가습기살균제 참사로 꼽을 수 있는 화학기업 듀폰의 독성폐기물질 유출 사건이라는 실화를 다룬 영화 <다크 워터스>(2020년)는 우리 현실과 여러모로 닮았다. 실존 인물이자 극 중 주인공인 변호사 롭 빌럿(마크 러펄로)은 말한다. “국가가 우릴 보호해줄 것 같지만 거짓말이야. 우리는 우리가 보호해야 해. 기업도 정부도 못 해줘.” 역사가 전하는 가르침 가운데 하나는 ‘우리는 지난 역사에서 아무 교훈도 얻지 못했다’는 경고다. 우린 언제까지 이런 각자도생의 삶을 살아야 하는 건가. 이런 나라의 미래엔 무엇이 남게 될까.

das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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