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쇄적인 '정책논의의 장' 조선업 난맥상을 키우다

이창곤 2022. 8. 1.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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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곤의 정담][이창곤의 정담] 04 _정책생태계1

민주화와 외환위기 이후 한국 정책생태계는 큰 변동을 겪었다. 권위주의 시대와 달리, 힘 있는 정책행위자가 일방으로 밀어붙여서는 기대하는 성과를 내기 어려운 시대로 변했다. 하지만 한국 조선 산업에서는 그런 시대적 흐름을 외면한 채, 생태계의 최상위 포식자가 울타리를 만들어놓고 가장 약한 종을 제물로 삼아 잡아먹는 방식의 일방적인 문제 대응이 이뤄져왔다.

대우조선해양 하청 노사협상이 극적으로 타결된 지난달 22일 경남 거제시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에서 협력사 대표들과 하청노조 조합원들이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대우조선해양 파업이 마무리되고 열흘이 지났다. 모두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농성에 나섰던 하청노동자들은 타결 직후 1도크에 다시 물을 채우는 진수 작업을 벌였다. 사내협력사 관계자들과 원청인 대우조선해양 임직원들도 선박 납기 일정을 맞추느라 분주하다. 내내 ‘법과 원칙’을 강조한 윤석열 정부, 경남 거제를 찾아 협상 타결을 외치던 여야 정치권, 그리고 천문학적 피해액을 강조하던 보수언론에 파업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지난 사건’이 된 듯하다.

거친 고성이 오가고 일촉즉발의 긴장이 높았던 거제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 1도크는 지금 평화롭다. 하지만 모두 안다. 애초 파업의 불을 댕겼던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을. 뿌리 깊은 다단계 원·하청 시스템은 그대로다. 하청노동자의 저임금 현실 또한 별로 나아진 게 없다. 오히려 파업 과정에서 타결하지 못한 손해배상 가압류 문제가 새 불씨로 더해진 상황이다. 무엇보다 “이대로는 살 수 없지 않습니까”라며 절규하던 하청노동자들의 삶은 파업 이후에도 여전히 열악하고 위태롭다.

그럼에도 대우조선해양에서 벌어진 51일간의 파업이 시사하는 바는 적지 않다. 한국 조선업의 구조적 문제를 더는 이대로 둬서는 안 된다는, 우리 사회에 의미 있는 과제를 던졌기 때문이다.

당장 선행돼야 할 것은 이런 질문이다. 왜 가장 취약하고 불안정한 노동자에게 고통을 전가하는 시스템이 지금껏 지속돼왔는가, 그동안 정부와 정치권은 문제 해결을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가, 우리 사회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궁극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질문이라기보다 실은 성찰에 가깝다. 그래서 이른 시일 안에 실질적인 종합처방책이 나와야 한다. 하여, 파업이 마무리된 지금부터가 문제 해결의 시작이다. 문제는 “누가, 그리고 어떻게”다.

전문가들의 연구를 살펴보니, 조선업의 사내하청 생산시스템은 불황과 호황이 주기적으로 오가는 조선업의 특성에 사용자들의 노동시장 유연화 요구가 결합해 1990년대 이후 확산됐다. 조선소 사내하청은 통상 업체에서 직접 고용한 이른바 ‘1차 본공’과 1차 업체가 직접 고용하지 않은 채 재하도급 방식으로 일하는 ‘2~3차 물량팀’으로 구분된다. 노동자들은 때로는 자신이 정확히 어느 업체 소속인지도 모를 정도로 하청에 재하청이 이뤄지는 다단계 착취 구조다.

2009년 이후 불황기에도 이 규모는 지속해서 증가했다. 조선 ‘빅3’(현대중공업, 대우조선해양, 삼성중공업) 해양플랜트의 경우, 하청 규모는 2008년 1만1753명에서 2015년 5만5166명으로 무려 4만3천여명이 늘었다. 그러다 2016년에는 1만5천명이 감소하는 등 급격한 부침을 보였다. 더욱이 불황기 구조조정을 거치며 중소형 조선업체들이 대거 몰락했다. 이는 대형업체→중소형업체→기자재업체로 서로 잇대어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던 조선산업 생태계를 파괴했다.

조선업은 대표적인 수주산업이자 경기민감산업이다. 막대한 금융자금이 필요한 금융밀착산업이기도 하다. 기후위기 시대를 맞아 친환경 선박에 대한 요구도 크다. 이런 특성과 국내외 상황은 개별 업체만으로는 제대로 된 대응이 어렵다. 국가 차원의 업종 전체의 전략적 대응이 불가피하다는 뜻이다.

한국 조선업의 시작과 초기 성장이 그랬다. 한국 조선업은 1973년 포항제철이 철강 생산을 개시하는 시점에 맞춰 현대, 삼성 등 재벌기업이 조선업에 진출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재벌총수를 반강제적으로 설득해 신규 조선소 건설을 독려했다고 한다. 민주화 이후 산업정책 패러다임이 바뀌면서 1994년을 기점으로 조선업은 국가 주도에서 민간 주도로 바뀌었다.

사내하청 시스템의 틀이 짜인 것도 이 시기였다. 이후 조선업은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기점으로 10여년간 불황과 구조조정기를 맞았다가 다행히 다시 호황을 맞고 있다. 하지만 구인난에 원자재값 상승, 다단계 원하청 구조 등에 따른 고용불안 등으로 인해 마냥 웃을 수만 없는 상황이다.

전문가들의 이런 진단에서 실은 중요한 질문이 빠져 있다. 대우조선해양을 비롯한 조선업종의 구조적 문제와 관련해 정부와 정치권 등 정책·정치주체들이 어떤 처방을, 어떤 대응을 했느냐는 것이다. 조선업 전문가인 박종식 한국노동연구원 부연구위원은 한국 조선업 당면과제와 발전전략에 관한 한 보고서에서 정부와 사용자 등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 바 있다.

“왜 체질 개선을 위한 경쟁력 향상이란 구체적 성과는 거의 없고, 설비와 인력 축소, 중견 조선업체 퇴출을 위한 구조조정만이 전개됐고, 또 왜 중장기적 전망에 근거해 양질의 일자리들을 유지하고 확대하는 방안은 찾지 않고, 단기적인 손실을 이유로 기존 일자리를 없애거나 줄이기에 급급했는가.” “왜 조선업의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같은 사업장 안에서 정규직 노동자들과 함께 일하면서도 임금은 대체로 직영의 60% 수준만 받고 각종 기업복지에서 배제되고 원청과 사내하청 업체의 재계약 속에서 항시적인 고용불안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는가.”

이런 질문은 한국 조선업의 구조적 문제는 긴 안목에서의 정책과 전략적 대응이 없었던 점과 무관하지 않다는, 정부와 사용자 쪽에 대한 문제 제기다. 불황기 정부와 사용자는 일자리를 유지하는 방안을 찾기에 앞서 단기적인 손실을 이유로 사내하청을 오히려 조장·방치하고 기존 일자리를 없애거나 줄이기에 급급했다.

기실 조선업과 관련한 여러 중요한 결정 과정에서 하청노동자와 노동조합은 구조조정 및 고용조정을 둘러싼 협의 당사자로 제대로 인정된 적이 거의 없었다. 2013년 고용위기 지역 선정 때도, 2016년 고용위기 업종 선정 과정에서도 노동자와 노동조합은 하나의 동등한 정책결정 과정의 주체가 아닌 그저 시혜의 대상이었다. 2018년 11월 ‘조선산업 활력 제고 방안’, 2021년 9월 ‘케이(K)-조선 재도약 전략’이 잇따라 발표됐으나 변한 것은 없었다.

필자는 대우조선해양 파업 과정과 한국 조선업의 궤적을 보면서 조선업을 둘러싼 우리 사회의 ‘정책생태계’가 매우 오랫동안 강고하게 닫혀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이슈 제기에서 정책 형성·결정 과정이 사용자와 정부에 의해 너무나 오랫동안 지속해서 일방적으로 이뤄졌다는 얘기다.

정책생태계는 정책 형성과 결정 과정이 다양한 종이 복잡한 먹이사슬로 얽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자연생태계와 닮았다는 점에서 착안한 개념이다. 이는 “한 사회가 직면하는 문제에 대한 처방인 정책이 형성되고 집행되는 과정까지 해당 정책에 영향을 끼치는 여러 행위자 간의 권력자원과 권력관계, 그리고 그에 기초한 상호작용의 총체”(신광영 중앙대 교수)다. 여기서 정책행위자란 대통령과 행정부, 국회와 정당, 노사 및 시민·사회단체와 언론, 국제기구 등 주요 정책과정에 영향을 끼치는 다양한 정책행위자와 집단을 가리킨다.

정책의 성공과 실패는 이 정책생태계가 얼마나 열려 있고, 원활히 작동하느냐와 직결된다. 민주화와 외환위기 이후 한국 정책생태계는 큰 변동을 겪었다. 권위주의 시대와 달리, 힘 있는 정책행위자가 일방으로 밀어붙여서는 기대하는 성과를 내기 어려운 시대로 변했다. 하지만 한국 조선 산업에서는 그런 시대적 흐름을 외면한 채, 생태계의 최상위 포식자가 울타리를 만들어놓고 가장 약한 종을 제물로 삼아 잡아먹는 방식의 일방적인 문제 대응이 이뤄져왔다.

이번에 하청업체 대표들과 하청노동자들은 “조선산업의 경쟁력 강화와 노동자 임금체계 개편 등 노사 간 신뢰 회복을 위한 제반 후속 조처를 마련하기 위해 가칭 상생협력 태스크포스(TF)팀을 운영”하기로 합의했다. 하청노동자들의 절규가 이뤄낸 구체적 성과다. 하지만 상생의 후속 조처는 결코 하청업체 노사만으로 마련할 수 없다. 원청 노사와 하청 노사, 때로는 정부도 참여하는 ‘중층적 교섭’이 법적으로 보장돼야 가능하다.

나아가 노사는 물론 정부와 국회, 지역사회 등 조선업과 관련한 여러 주체가 참여하는 ‘지속가능한 조선업 미래를 위한 범정책협의체’가 조속히 구성돼야 한다. 대우조선해양 파업이 주는 가장 명확한 메시지는 조선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어떤 논의와 대책에서도 핵심 당사자인 하청노동자를 배제하면 정당성도 실효성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물론, 이런 상황과 진단은 비단 조선업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닐 테다.



이창곤 |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사회정책 박사. 복지를 중심으로 노동, 주거, 환경 등 사회정책 이슈에 관심이 많다. 기동취재팀장, 지역편집장(전국부장), 부국장,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장 등을 지냈다. 특히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장을 역임하면서 불평등, 복지국가, 생태위기 등을 우리 시대 핵심 이슈로 의제화하고자 했다. 지은 책으로는 <복지국가를 만든 사람들>, <불평등 한국, 복지국가를 꿈꾸다>(공저), <성공한 나라 불안한 시민>(공저) 등이 있다.

go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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