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만의 표현 수단 있나요? [작가 이윤영의 오늘도 메모]

황계식 2022. 8. 1.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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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뮤지컬 ‘실비아, 살다’ 포스터
 
몇년 전 공존에 히트를 쳤던 드라마의 명대사가 있다.

“이 남자가 내 남자라고 왜 말을 못 해”

한 기업의 회장이었던 남자친구를 ‘내 남자’라고 당당하게 표현하지 못한 여자친구를 향한 과한 애정이 격한 ‘버럭 대사’로 표현되었지만, 이 대사는 그 후로도 박력 있는 애정 표현용 장면에서 대사로 수많은 패러디를 낳고 있다.

당시 남자의 과격한 애정 표현에 당황했지만 몰래 숨어서 했던 사랑이, 만천하에 공개되는, 싫지 않았던 상황을 맞이한 ‘놀란’ 여자의 표정이 오랫동안 잊히지 않았다.

그녀가 놀란 표정을 했던 이유는 두가지로 압축될 수 있다. 첫번째는 내내 말하지 못했던 ‘임금님 귀는 당나귀’에 버금가는 탑시크릿을 속시원하게 공기 중에 내뱉어 준 당사자에 대한 고마움,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감정이 언어로 표현된 것에 대한 시원함 내지는 통쾌함이었으리라

우리는 가끔 책을 읽다가 영화를 보다가 드라마를 보다가 이런 생각을 한다. ‘아, 나도 저런 감정을 느낀 적이 있었는데, 나도 저런 생각을 했었는데’라고 말이다.

그리고 다시 한번 그 문장과 장면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왜 저렇게 표현하지 못했을까’ 혹은 ‘앞으로 비슷한 상황이 도래하면 이렇게 표현해야지’라고 곱씹으며 장면과 문장에서 한참 서성이다 마음속에 ‘저장 버튼’을 꾸욱 누른다.

한 기관에서 ‘어른의 표현력 수업’이라는 주제로 글쓰기 수업을 진행했다. 글쓰기 수업에 참석한 이들에게 전하는 첫번째 질문은 이것이다.

‘당신은 왜 글을 쓰시나요?’

지금이야 이런 질문이 흔한 테마지만, 몇년 전만 해도 이 질문에 열명 중 열명은 대개 당황했다.

마치 그 질문은 글쓰기 수업에 왜 왔느냐고 직접 묻지 않았을 뿐이지 거의 동급의 문장이다. 말하자면 글쓰기 수업에 글쓰기 위해서 왔지, 딱히 왜 글을 쓰고 싶은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고 심도 있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이 그들의 한결같은 대답이었다.

내 이야기를 조금 듣고, 짧지만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주어지면 다들 크고 작은 글을 쓰는 이유에 대한 소회를 표현한다.

얼마 전까지 압도적인 부동의 1위는 ‘내 이름으로 된 책 한권을 내고 싶어서’였다. 요즘에는 점차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제대로 잘 표현하기 위해서 글을 쓴다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이런 현상은 이제 글이 말을 제치고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표현하는 ‘1등 수단’이 되어가고 있음을 웅변하는 지표가 아닐까.

지속적인 비대면 시대가 도래하면서 일상에서 ‘글을 써야만 하는 상황’에 내쳐지는 일이 허다하다. 원하지 않아도 말(전화 통화나 만남을 통한 대화)보다 글로 자기 생각과 감정을 전달해야만 하는 경우가 많다.

“제 표현이 그렇게 이상한가요?”

얼마 전 창작 뮤지컬 ‘실비아, 살다’(대학로 티오엠 2관, 오는 28일까지 공연)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미국의 시인이자 소설가였던 실비아 플라스(1932~63)의 삶을 다룬 뮤지컬로, 실비아는 영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시인(BBC 선정)이자 ‘야수적인 표현’, ‘거친 언어’로 자기 생각과 감정을 표현한 작가다. 그는 작품의 예술성을 평가받아 사후에 퓰리처상을 받은 유일한 작가이기도 하다.

“시는 왜 꼭 아름다워야만 할까
수학공식도 아닌데 왜 그렇게 운율을 고집스럽게 맞추어야 할까
그걸 어기면 왜 좋은 작품이 아닐 걸까“
 
“글은 나의 대체물이죠. 선택이 아닌, 꼭 해야 하는”
 
-뮤지컬 ‘실비아, 살다’ 중에서
 
그녀는 끊임없이 자기 생각과 감정을 시와 소설로 표현하고 싶어 했다.

당시 사회는 ‘시는 아름다워야 한다’며 ‘운율’을 강요했다. 아름다움과 운율, 정해진 규칙과 형식은 그녀의 생각과 감정을 억압하고 오히려 더 좋은 글쓰기를 방해하는 치명적인 오류였다.

더불어 여성으로서 육아와 살림뿐만 아니라 가계의 생계까지 책임지면서 ‘시간 나면 틈틈이 시를 쓰라’는 말은 그녀의 표현을 무참히 짓밟았지만, 실비아게 글은 그녀 자신이었고, ‘선택이 아닌 꼭 해야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더 솔직하게, 더 당당하게 써 내려갔다.
2003년 개봉한 영화 ‘실비아’ 포스터
 
표현력 글쓰기 수업을 하다 보면 더 근사한 표현, 더 멋있어 보이는 문장을 쓰는 방법은 무엇인지 질문하는 이들이 많다. 기왕 쓰는 글, 좀더 근사하게 내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것, 나쁘지 않다. 그래서 글쓰기를 배울지도 모른다.

실비아가 갈망했던 글쓰기는 진정한 자기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듣고 이를 드러내는 것이다. 자칫 우리는 ‘근사함’과 ‘멋있음’이라는 포장지에 글을 쓰는 진정한 의미를 잃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녀의 말처럼 우선은 자기의 감정과 생각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자. ‘이 남자가 내 남자’라고 거칠 게 외쳤던 한 드라마의 대사처럼 ‘이 생각이 내 생각이고 내 감정이 내 감정’이라고 말이다.

이윤영 작가

대중문화를 다정한 시선으로 읽고 씁니다. ‘글쓰기가 만만해지는 하루 10분 메모글쓰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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