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코 인사이드] 여준석, 한국 남자농구의 별이 될 남자

손동환 2022. 8. 1.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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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바스켓코리아 웹진 2022년 7월호에 게재됐다. 인터뷰는 6월 9일 오후에 이뤄졌다.(바스켓코리아 웹진 1년 정기 구독 링크)

2002년 3월 19일. 한국 농구의 새로운 별이 태어났다. 그 별은 어릴 때부터 반짝였고, 세상을 더 밝게 빛낼 존재로 주목받았다.
2022년. 한국 나이로 만 20세가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남자농구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됐다. 또, 많은 사람들이 그의 행보를 주시하고 있다. 그가 한국 남자농구를 더 빛나게 할 존재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별의 이름은 바로 ‘여준석’이다.

2016년 5월 31일
2m가 넘는 중학생 선수가 있었다. 체격 조건만으로도 주목 받았다. 그런 선수가 운동 능력도 있었다. 게다가 풍부한 에너지 레벨까지. 대한민국 농구계는 특급 유망주의 등장에 흥분했다.
2016년 5월 31일. 농구 팬들이 본격적으로 그 선수에게 흥분됐다. 삼일중 소속이었던 특급 유망주는 제45회 소년체전 결승전에서 화봉중을 상대로 50점 34리바운드를 기록했다. 한 팀이 할 수 있는 득점과 리바운드를 혼자서 해냈다.
그리고 약 1년 뒤인 2017년 7월 31일. 용산중으로 전학한 특급 유망주는 제72회 전국종별선수권대회에서 44점 31리바운드를 기록했다. 역시나 결승전이었다. 또 한 번 우승을 쟁취했다. 위에 언급된 두 개의 스토리 모두 여준석에 관련된 이야기였다.

농구는 언제부터 하셨나요?
아버지께서 농구를 하셨고, 형(고려대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인 여준형)이 농구에 먼저 흥미를 가졌어요. 그래서 저도 자연스럽게 농구를 했죠. 초등학교 4학년 때 클럽 팀에서 농구를 시작했고,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엘리트 농구를 본격적으로 했어요.
중학교 2학년 때 이름을 알렸습니다.
배재중학교에서 농구를 시작했어요. 그리고 중학교 1학년 후반에 삼일중학교로 전학 갔어요. 당시 김도완 선생님(현 부천 하나원큐 감독)과 이한권 선생님(현 부천 하나원큐 코치)께서 저를 많이 믿어주셨어요. 저에게 많은 걸 알려주려고 하셨고요. 팀 동료들도 저를 믿어줬고요. 그래서 좋은 활약을 했던 것 같아요.
중학교 3학년 때 용산중학교로 전학갔습니다. 삼일중학교 시절과는 어떤 게 달랐나요?
삼일중에 있을 때는 림과 가까운 곳에서 농구를 했어요. 외곽슛을 거의 안 던졌죠. 그렇지만 용산중학교로 전학간 후, 박민재 선생님께서 슛을 던져야 한다고 하셨어요.
박민재 선생님은 지금도 엄청 좋아하는 분입니다. 자주 찾아뵙기도 하고요. 제가 중학교 때만 2번을 전학해서 어려워했는데, 그 때 저를 많이 챙겨준 분이셨거든요.
그야말로 적수가 없었습니다. 흥미가 떨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다른 분들께서 생각하시는 만큼, (기량이) 엄청 올라왔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어요. 오히려 부족하다고 생각했죠. 농구를 잘하고 싶은 마음이 컸던 것 같아요.

범접할 수 없는 유망주, 범접하기 어려운 무대로!
중학생 때부터 독보적인 기록을 남긴 여준석. 용산고로 진학한 여준석은 1학년 때부터 고교 무대를 씹어먹었다. 1학년이라고는 하나, 고교 무대에서도 적수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런 여준석에게 동기 부여가 필요했다. 본인이 ‘발전’의 필요성을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발전’을 원했던 여준석은 호주에 있는 NBA 글로벌 아카데미로 향했다.
글로벌 아카데미에서 주최한 캠프에서도 경쟁력을 보여줬다. 어려움도 있었지만, 캠프 MVP를 차지했다. 기존의 강점인 골밑 플레이뿐만 아니라, 돌파와 3점슛 등 포워드로 전향하기 위한 플레이도 많이 했다.
여준석은 그렇게 업그레이드됐다. 더 큰 무대를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학업과 언어, 코로나19 등이 겹쳤고, 여준석은 한국으로 돌아왔다..

NBA 글로벌 아카데미로 떠났습니다.
농구를 시작한 이후, 가장 하고 싶었던 포지션은 포워드였습니다. 한국에서는 포워드를 하는 게 쉽지 않다고 판단했죠. 그러다가 우연찮게 중국 항저우에서 열린 NBA 캠프를 갔어요. 그 곳에서 NBA 글로벌 아카데미에 갈 수 있는 기회를 얻었죠. (이)현중이형도 거쳐간 캠프였기에, 저한테 익숙한 곳이기도 했고요.
글로벌 아카데미에서 주최한 캠프에서 MVP를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하던 대로 하려고 했고, 열심히 하려고 했습니다. 또, 캠프를 위해 특별히 신경을 쓴 것도 아니었어요. 다만, 함께 하는 선수들을 이기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그게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고 생각해요.
호주 생활을 통해 어떤 걸 많이 배우셨나요?
생활적인 부분은 아무래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농구적인 부분은 달랐어요. 물론, 외곽으로 나온 지 얼마 안 돼 시행착오도 겪었습니다. 슈팅 정확도나 기본적인 움직임이 어렵기는 했지만,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어요. 또, 다른 선수들의 영상을 보고 다른 선수들과 직접 부딪혀본 것도 저한테 도움이 됐고요.
여러 가지 문제가 해외 생활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특히, 학업이 그랬는데요.
해외에서 농구를 계속 하려면, 미국에 있는 대학교로 가야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전부터 공부를 했던 선수가 아니기 때문에, 쉽지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부모님께서도 안정적인 걸 원하셨고요. 그래서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KOREA NO.22
여준석은 어쩔 수 없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아쉬움이 컸다. 그러나 농구 선수로서의 본분만 생각했다. 호주에서 했던 경험과 선배들의 조언을 토대로, 업그레이드에 매진했다.
여준석이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기회가 찾아왔다. 2021년 여름 성인대표팀에 승선한 것. 여준석은 선배들과 함께 2021 FIBA 아시아컵 예선과 2020 도쿄 올림픽 최종 예선에 참가했다.
아시아의 강호로 불리는 필리핀을 상대했고, 도쿄 올림픽 최종예선에서는 리투아니아와 베네수엘라 등 더 강한 상대들과 맞붙었다.
그 후에는 라트비아로 건너갔다. 19세 이하 월드컵을 치르기 위해서였다. 에이스로서 많은 걸 짊어졌다. 비록 세계 강호들에 완패했지만, 경쟁력을 보여줬다. 빅터 웸반야마(프랑스)와 챗 홀그랜(미국) 등 2022 NBA 드래프트에서도 상위권 후보로 불리는 이들 앞에서 운동 능력과 과감함을 뽐냈다. 대한민국 남자농구 국가대표팀의 22번으로서 존재감을 과시했다.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아쉬움이 컸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아쉬움이 많았습니다. 기회가 오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외국으로 나가겠다는 생각도 그 때는 접었고요.
성인대표팀에도 승선했습니다. 아시아컵 예선과 도쿄 올림픽 최종 예선을 경험했는데요.
피지컬부터 달랐습니다. 하지만 어느 대회든 농구를 배웠다는 게 큰 의미인 것 같아요. 상대 팀의 피지컬이 좋아도, 어떻게 농구를 해야 하는지 배운 것 같아요.
특히, 도쿄 올림픽 최종 예선에서는 선수들의 피지컬과 선진국의 시스템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선수들의 개인 능력은 물론, 팀 운영 방식 같은 시스템도 많이 보고 배운 것 같아요.
성인대표팀 일정을 끝낸 후, 곧바로 19세 이하 월드컵에 참가했습니다. 이번 NBA 드래프트에서 상위권 후보로 꼽히는 이들과도 맞대결했고요.
경기 끝나고 나서야, (그 선수들이 NBA 드래프트 상위권 후보인 걸) 알았어요. 경기 때는 별 생각 없이 뛰었던 것 같아요. 세계선수권이라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즐기는 마음으로 했던 것 같아요. 편한 마음이기도 했고요.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여준석은 어릴 때부터 한국 농구를 짊어질 유망주로 평가받았다. 그래서 많은 관계자와 많은 팬들이 여준석의 행보에 관심을 보였다.
기자가 여준석과 인터뷰를 할 때만 해도, 여준석은 고려대학교 농구부에서 운동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여준석이 조만간 해외 진출이나 얼리 엔트리로 KBL에 갈 것이다’고 예측했다.
그래서 기자도 여준석의 행보를 물었다. 기자의 질문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깨달았고, 여준석의 말이 얼마나 정답인지도 알았다. 그의 대답은 “내가 앞으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린 것 같아요”였다.

고려대학교로 입학했습니다.
KBL에 얼리 엔트리로 가야한다는 판단은 서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리고 19세 월드컵을 치른 이후, 해외에서도 저에게 관심을 많이 주셨어요. 그래서 프로 팀에서 해외를 가는 것보다, 대학교에서 해외로 가는 게 수월하지 않을까 생각했죠. 또, 아버지께서 고려대학교를 나오셨기 때문에, 예전부터 고려대학교에 가고 싶다는 생각도 했고요.
성인대표팀에 또 한 번 승선했습니다. 필리핀과의 평가전 그리고 아시아컵을 치러야 합니다.
감독님께서도 달라지셨고, 형들이 많이 달라졌어요. 그래서 팀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 것 같아요. 감독님께서 주문하시는 패턴과 형들의 장단점이 다르기 때문에, 농구에 조금 더 신경을 쓰고 있는 것 같아요.
추일승 감독님께서는 여준석 선수에게 어떤 주문을 하셨나요?
모든 선수에게 말씀하셨지만, 저에게도 ‘수비를 해야 공격도 수월하게 풀린다’고 하셨어요. 수비할 때 더 압박해주길 원하시고요.
농구 선수로서 생각한 목표가 있을까요?
간결한 것 같아요. 먼저 초심을 잃지 않아야 하고, 하던 대로 열심히 하는 게 다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얼리 엔트리나 해외 진출 등 여준석 선수의 미래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여준석 선수의 솔직한 생각은 어떤가요?
제가 앞으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려있다고 생각해요.(웃음)
(그리고 여준석은 6월 20일 G리그 쇼케이스를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사진 제공 = 대한민국농구협회, FIBA, KB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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