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합성수지→나무·대리석.. 가격·시공기간 따라 '실용적 변신'
■ 지식카페 - 기술이 지나간 자리 : 장판
한옥은 종이를 풀칠한 뒤 여러 겹 덧대 바닥에 깔아… 20세기 중반 이후엔 니스칠로 한번에 마감
2000년대 이후 아파트 늘며 싸고 간편한 합판·압축목 인기… 거실·안방까지 점령하며 장판은 뒤안길로
한국인의 주거 공간은 짧은 시간 동안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전통사회의 한옥에서 서양식 주택으로 바뀐 지도 불과 한 세기 남짓이거니와, 서양식 주택 안에서도 소위 ‘문화주택’부터 시작해 단독주택과 연립주택을 거쳐 서양식 아파트가 도입됐고, 나아가 한국인의 생활 방식에 맞춰 개량한 한국형 아파트가 선을 보였다.
한국인들은 서양식 구조를 그대로 들여온 초창기 아파트를 한국인의 생활 양식에 맞춰 바꾸어 나갔다. 특히 좌식 생활에 맞춰 바닥 난방을 추가한 것이 큰 변화다. 구들에 뜨거운 공기를 흘려보내는 전통 온돌과 기술의 세부 내용은 다르지만, 온수를 바닥재 아래로 순환시켜 고층아파트에서도 마찬가지 효과를 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따뜻하게 데우는 바닥의 마감재는 세월에 따라 여러 차례 바뀌었다. 요즘 짓는 아파트는 대리석이나 타일 바닥을 과감하게 시도하기도 하지만, 약 10년 전에는 나무쪽을 이어 붙인 바닥이 대세였고, 거기서 10년쯤 더 거슬러 올라가면 합성수지 바닥재가 깔려 있었다. 그보다 더 과거, 단독주택의 시대에는 ‘방바닥’이라고 하면 두꺼운 종이를 깔고 그 위에 수지를 발라 마감한 것을 으뜸으로 쳤다. 오늘날은 의미가 많이 변질됐으나, ‘장판(壯版)’은 원래 이것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콩댐에서 ‘니스칠’로
한옥의 주재료는 흙과 나무다. 나무로 뼈대를 세우고 짚으로 얼개를 짠 뒤, 흙을 발라 벽과 바닥을 만든다. 이렇게 만든 공간에 사람이 들어가서 쾌적하게 살려면 벽과 바닥을 덮어줘야 한다. 종이는 산업사회 이전에 넓은 면을 감싸기 가장 좋은 재료였다. 한옥의 벽과 바닥에는 처음에는 전체적으로 풀칠하여 종이를 바르고(초배), 풀이 다 마르면 두세 번 더 종이를 붙인다. 덧붙일 때는 종이 가장자리에만 풀칠하여 종이 층 사이로 공기를 머금도록 하여 푹신한 느낌과 단열 효과를 더한다. 그 위에 한지를 여러 겹 배접한 벽지와 장판지를 바르면 바닥과 벽이 완성된다. 풀기가 완전히 말라야 종이를 새로 겹쳐 붙일 수 있으므로, 도배와 장판 시공은 적어도 두세 주 이상 끈기있게 매달려야만 하는 일이었다.
바닥을 모두 깔고 나면 ‘콩댐’이라는 과정이 기다리고 있다. 콩을 물에 불린 뒤 곱게 갈아서 들기름과 섞어서 장판지 위에 바르고 말리기를 여러 차례 반복하는 것이다. 콩댐하면 장판에 윤이 나고 방수 효과가 더해져 수명도 길어지는 효과가 있다.
하지만 전통 방식으로 콩댐한 장판을 기억하는 이도 사실 많지 않을 것이다. 시간과 손이 많이 가는 콩댐 대신, 20세기 중반 이후에는 ‘니스’로 한 번에 마감하는 것이 대세가 되었다. 장판을 기억하는 이들도 차츰 콩댐의 풋풋한 풀냄새가 아니라 코를 훅 찌르는 니스칠 냄새를 떠올리게 됐다.
영어로 바니시(varnish)란 수지(樹脂·resin)와 건성유(공기에 노출되면 딱딱하게 굳는 기름)를 휘발성 용매에 녹여 만든 도료를 일컫는다. 이것을 일본어 발음으로는 ‘와니스’라고 불렀는데, 한국에서 와니스가 다시 축약돼 ‘니스’라는 이름이 된 것이다. 바니시의 종류는 수지와 건성유의 종류만큼이나 다양한데, 예부터 사용하던 송진이나 옻칠 같은 것도 일종의 천연 바니시라고 할 수 있다.
화학 산업이 발달한 20세기에는 천연수지 대신 아크릴 등 합성수지를 이용해 값싼 바니시를 대량생산할 수 있게 됐다. 1950년대부터는 국내 페인트 제조사들이 바니시도 함께 제조해 시장에 공급이 늘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바니시는 마르면 단단한 피막을 형성하므로 장판의 표면을 상처와 물로부터 보호해 주었다. 또 여러 번 기름 먹이고 말리기를 반복해야 하는 콩댐에 비해 시공 기간과 비용도 크게 줄일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바니시로 장판을 마감한 집들이 점점 늘어났다. 특히 급격한 도시화로 하루가 다르게 인구가 늘던 서울에서는 시간과 돈에 여유 있는 집이 아니라면 전통 방식을 고수하기가 어려워졌다.
◇‘모노륨’과 ‘민속장판’
경제성장과 도시화가 놀라운 속도로 이어지면서 서울 등 대도시는 거대한 아파트 숲이 됐다. 아파트 숲 이리저리로 빈번하게 이사를 반복해야 했던 도시민들에게 전통 장판은 그림의 떡과 같았다. 두세 주가 넘는 시공 기간도 부담이 되었고, 한지를 여러 겹 배접해 만든 장판지도 한 평(3.3㎡)에 네댓 장씩 들어가니 장판지 가격과 시공의 품삯도 만만치 않았다.
이 틈새를 노리고 장판 시장에 도전장을 내민 것이 소위 ‘민속장판’이었다. 민속장판은 이름은 ‘장판’이지만, 사실은 장판 무늬가 그려진 시트형 바닥재다.
시트형 바닥재의 시초는 ‘리놀륨(linoleum)’으로, 건성유와 천연수지를 섞고 거기에 돌가루, 톱밥, 코르크 가루 등을 더해 아마포에 압착 건조해 만든 것이다. 성분을 봐도 알 수 있듯 ‘바니시를 미리 발라 건조시킨 천’이라고 이해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공간의 모양과 크기에 구애받지 않고 손쉽게 바닥을 마감할 수 있는 데다, 제작 과정에서 원하는 색상과 무늬를 자유롭게 넣을 수 있고, 공장에서 대량 생산해 다른 바닥재들보다 가격도 쌌다. 이 덕에 19세기 중반 발명된 이래 급속도로 보급됐다.
리놀륨은 20세기 들어 플라스틱 산업이 성장하면서 합성수지 바닥재에 밀려나게 되었지만, 그 이름은 한동안 시트형 바닥재의 대명사처럼 쓰였다. 1978년 럭키(현 LX 하우시스)가 한국 최초의 국산 시트형 바닥재를 출시하면서 ‘모노륨’이라는 상표를 붙인 것도 이 때문이다. 모노륨은 폴리염화비닐(PVC) 바닥재였지만, 리놀륨으로부터 이어지는 역사를 계승한다는 의미로 리놀륨을 연상케 하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국내 생산이 안 되던 시절 리놀륨 바닥재는 대부분 수입이어서, 가격도 비쌌지만 색상과 무늬도 대체로 서양식 주택에 맞춰져 있었다. 거실에 나무 마루 대신 마루 무늬 리놀륨을 깔 수는 있었지만 방바닥에 깔기에는 어울리는 것을 찾기 어려웠다.
그런데 1985년 럭키에서 ‘민속장판’을 출시하면서 사정이 바뀌었다. 민속장판은 언뜻 보면 전통 장판과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외관을 충실하게 재현했다. 장판의 색은 물론, 장판지가 겹치며 생겨나는 경계선의 자국도 재현했으며, 실감을 더하기 위하여 바니시를 칠할 때 남은 붓 자국 등을 흉내 내 인쇄하기도 했다. 민속장판은 외관을 충실하게 모방했지만 전통 장판보다 가격도 훨씬 쌌을 뿐 아니라, 하루면 시공이 끝나고 다음 날 입주할 수 있을 정도로 다루기도 간편했다. 민속장판은 아파트를 중심으로 급속도로 확산되었고, 전통적인 종이 장판은 전통 한옥이나 전원 친환경주택 등 일부러 큰마음을 먹고 선택해야 하는 기술이 됐다.
◇모방의 흔적마저도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고
그런데 2000년대 이후 태어나 신축 아파트에서 사는 이들은, 전통 종이 장판은 물론이고 PVC 민속장판에 대한 기억도 뚜렷하지 않을 것이다.(민속장판을 본 적이 있더라도, 거기에 왜 넓은 가로세로 줄무늬가 인쇄되어 있는지는 잘 모를 것이다.)
시트형 바닥재는 방바닥의 장판을 대체했을 뿐 아니라, 거실과 부엌 바닥의 마루와 타일도 대체했다. 하지만 새로운 마룻바닥재들이 등장함에 따라 전세가 역전됐다. 예전보다 값은 싸고 시공도 간편한 합판이나 압축목 등의 소재들이 속속 선보였고, 소비자들은 PVC 바닥재보다 원목의 따뜻한 느낌을 잘 살리는 마룻바닥재를 선호했다.
목재 바닥재는 아파트의 거실과 부엌을 재점령하는 데 멈추지 않고, 방바닥까지 진격해 들어갔다. 어차피 소비자들이 PVC보다 목재를 선호하는 추세인데 방바닥만 굳이 시트형 바닥재를 남겨둘 이유도 없었고, 전통적인 좌식생활을 벗어나는 침대와 의자 등의 가구가 보편화하면서 장판 바닥에 대한 향수도 남지 않게 됐기 때문이기도 하다.
전통 시대 한국의 집에서는 ‘마루’와 ‘방’이 겉보기뿐 아니라 기능적으로도 구별됐다. 마루는 나무로 덮여 있고 난방은 들어오지 않는 공간이고, 방은 장판을 깔아 놓고 온돌로 덥혀 주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현대 한국의 아파트에서는 마루(거실)와 방을 그런 식으로 구별하는 것은 어렵게 됐다. 거실과 방은 모두 목재 바닥재로 바닥을 덮어놨고, 모두 온수 파이프로 난방이 들어온다. 문지방도 점점 낮아지거나 아예 없어지는 것이 최근의 추세이니, 문을 열어 놓으면 거실과 방은 균질적인 공간으로 하나로 이어진다. 장판은 물론 그 모방품까지도 사라진 지금, 현대 한국의 아파트는 재료 면에서는 집 안 모든 곳이 ‘마루’가 되었지만, 난방 면에서는 집안 모든 곳이 ‘방’이 된 새로운 혼종의 공간이기도 하다.
김태호 전북대 교수
■ 용어설명 - 문화주택
일제강점기에 생활개선 운동의 일환으로 도입된 개념으로, 전통 한옥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서양식 주택의 요소를 대폭 도입해 지었던 주택을 가리킨다. 특히 한옥에서 불편하고 비위생적이라고 여겼던 부엌과 화장실 등을 서양식으로 고치고, 거실을 중심으로 공간을 재편하는 것이 문화주택의 핵심이었다. 문화주택은 일본식, 서양식, 개량 한옥식 등 실체는 다양하게 변형됐으나 위생과 능률을 핵심 가치로 내세우며 새마을운동 시기까지 구호로 존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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