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 캐리어

윤평호 기자 2022. 8. 1.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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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평호 천안아산취재본부 차장

어쩌면 삶은 짐을 풀고 싸는 일의 반복이 아닐까? 인생의 시작인 태어남도 누군가 몸을 풀어 출발한다. 죽음 역시 총체적으로는 마지막 짐 싸기이다. 짐을 싸고 푸는 무한한 여정에 빼 놓을 수 없는 동반자가 있다. '가방'이다. 가방은 단순히 짐을 넣는 기능 이상이다. 한 생명이 공동체 성원으로 받아들여졌음을 상징하는 징표이기도 하다.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하는 갓난아이한테 가방을 주진 않는다. 외출할 때면 보호자들이 대신 기저귀 등 각종 아기용품으로 꽉 찬 두세 개 가방을 둘러맨다. 아이가 첫 발을 떼고 걷기 시작하면 비로소 작은 가방 하나 가질 수 있다. 주지 않아도 아이가 먼저 찾는다. 주변의 다른 사람들은 다들 가방 하나씩 갖고 있으니. 아이가 맬 수 있는 무게 만큼의 가방이 그때 허락된 인생의 무게이다.

성장하며 가방의 외양이나 내용물은 달라진다. 학창시절 책가방은 대한민국의 신체건강한 남성이 되면 군용배낭으로 변모한다. 본격적으로 사회 생활에 진입하면서 하는 일에 따라 가방에도 격차가 생긴다. 우영우 변호사의 가방은 마을 언덕 위 팽나무 아래 두고 와도 극 중에서 친모로 밝혀지는 선배 변호사가 딱 봐도 변호사 가방임을 알아보고 챙겨준다. 검색 해보니 변호사 가방이라고 따로 상품군이 존재한다. 2013년 5월 28일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의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가 열차에 치여 숨진 열아홉 살 김 군. 그의 가방에는 먹지 못한 컵라면 하나와 나무 젓가락, 그리고 스패너 등 수리 공구들이 들어 있었다.

여름 더위가 절정으로 치닫고 있다. 휴가철과 맞물려 전국 피서지마다 여행객들의 짐 풀기와 싸기가 반복되고 있다.

떠나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 최근 천안 복지단체 기관들의 아동가구 주거실태 현장을 동행 취재했다. 한 칸 방에서 힘겨운 여름 나기를 하는 몇 가구에서 공통적으로 눈에 띈 것이 '캐리어'였다. 짐을 풀 곳도 마땅치 않아 캐리어를 수납처로 사용하고 있었다. 한 아이는 덥고 비좁은 방에서 가장 편한 공간이 '엄마 품'이라고 말했다. 아이와 엄마는 언제쯤 맘 편히 짐을 풀고 정착할 수 있을까? 주민의 슬픔을 행복으로 바꾸는 것, 잊지말아야 할 지방자치단체의 책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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