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봄날의 햇살

국제신문 2022. 8. 1.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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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를 이리저리 돌리다 우연히 이상한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제 이름은 똑바로 읽어도 우영우 거꾸로 읽어도 우영우입니다.” 일상에서 좀처럼 접할 수 없는 목소리입니다. 복지상담을 하다 보면 아주 드물게 만나게 되는 이들의 그것과 닮았습니다. 겉모습은 분명 어른인데 표정이나 말투는 천상 아이 같은 사람들 말입니다. 드라마에 호기심이 생겨 여러 회 방영분을 압축해놓은 영상을 보게 됐습니다.

인상적인 장면은 로펌 구내식당에서 나눈 우영우와 동료 변호사 최수연의 대화입니다. 최수연이 우영우에게 권모술수 권민우, 우당탕탕 우영우처럼 자신의 이름 앞에도 수식어를 만들어달라고 합니다. 최강동안 최수연, 최고미녀 최수연을 예로 듭니다. 이때 우영우가 말합니다. “아니야. 넌 봄날의 햇살 최수연이야.”

우영우에게는 최수연의 사소한 배려 하나하나가 봄 햇살입니다. 연수원에서 동기들이 놀리면 막아주고, 바뀐 시험범위를 말해주며, 로펌 구내식당 점심메뉴로 좋아하는 김밥이 나오면 알려주고, 물병 뚜껑을 대신 열어주는 것까지 말입니다.

우영우를 보면서 누군가 떠올랐습니다. 10대 후반의 뇌병변 장애인입니다. 그 친구는 어느 날 전동휠체어를 타고 장애인활동지원사와 함께 행정복지센터를 방문했습니다. 보호자인 아버지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다고 했습니다. 상담실에서 1시간가량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간혹 말을 잘 알아듣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지만 비교적 의사표현이 명확해 전체적으로 상담에 무리는 없었습니다. 그날 이후 보호자와도 상담을 했고, 아동보호전문기관 구청 경찰이 함께 의논한 끝에 그 친구는 집을 떠나 장애인생활재활시설로 옮겨가는 것으로 마무리됐습니다.

첫 상담 이후 그 친구는 종종 장애인활동지원사와 함께 행정복지센터를 찾아왔습니다. 행정복지센터에 들어서면서부터 큰소리로 “김찬석 선생님, 김찬석 선생님” 하고 불러 모두가 방문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 친구는 저를 만나면 휠체어에 탄 채로 온몸을 비비 꼽니다. 손과 팔, 상반신을 비비 꼬고, 고개와 얼굴을 비틀며, 휠체어에 고정되다시피 한 허리까지 들썩거립니다. 휠체어가 없다면 금방이라도 무중력 상태의 우주인처럼 허공으로 튀어나올 듯 합니다. 눈은 거의 감긴 채 허공을 쳐다보는데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합니다. 동행한 활동지원사에게 물었습니다. 왜 이런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렇게 된다고 합니다. 기쁜 감정이 온몸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분출돼버리는 것입니다.

그 친구가 온몸으로 좋아한다고 표현하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습니다. 특수학교 담임 선생님입니다. 저하고 있을 때도 자주 그 선생님 이야기를 했고, 그때마다 온몸을 비비 꼽니다. 선생님 생각만으로도 행복한 모양입니다. 사실 그 친구에게 특별히 뭘 해준 기억이 없습니다. 첫 만남에서 이야기를 들어주고 맞장구를 쳐준 정도입니다. 사회복지사의 제1 덕목이 경청과 무조건적 공감이니 당연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 친구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고, 그것이 특수학교 선생님과 사회복지 공무원이었던 셈입니다.

이 친구와 우영우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못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처음 본 또래들과 스스럼없이 친구가 되듯 상대를 친구로 만듭니다. 신기하면서 부러운 일입니다. 우영우는 전학 간 고등학교에서도 따돌림을 당합니다. 학교의 소문난 문제아 동그라미가 이를 구해줍니다. 도움을 받은 우영우가 도움을 준 동그라미에게 말합니다. “친구가 돼 줄게. 너 친구 없잖아.” 터무니없는 말을 천연덕스럽게 내뱉습니다. 그렇지만 우영우처럼 아이같이 들이밀면 친구가 되지 않는 것이 이상합니다.


다른 점도 있습니다. 우영우에게는 봄날의 햇살이 친구만이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아버지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저를 찾아왔던 뇌병변 친구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만약 그 친구에게 우영우의 아버지 같은 봄날의 햇살이 있었다면 그 친구는 행정복지센터 공무원이 아니라 아버지 앞에서 온몸을 비비 꼬며 행복해했을 것입니다. 많은 장애인이, 많은 보호자가 TV 우영우를 보며 한편으로는 장애인에 대한 관심에 기대감을 가지면서도 한편으로는 갈 길이 먼 현실에 실망합니다. 봄날의 햇살이 TV 밖으로 비치기를 희망합니다.

김찬석 사회복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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