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 기다릴 만큼 기다렸다

정병기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2022. 8. 1.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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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과 원칙’, ‘손해 배상’, ‘분리 매각’. 대우조선 하청노동자 파업이 종료된 후 사람들의 입길에 오르내리는 말들이다. 지난 22일 파업이 종료되던 날 경찰은 파업 참가자 9명에 대한 체포영장을 신청했다. 24일에는 대통령실이 ‘법과 원칙대로’ 후속 조치를 취할 것을 발표하고, 28일에는 산업은행이 대우조선 분리 매각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정병기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법과 원칙은 과연 모두에게 공정한가? 법과 원칙이 어느 한쪽에 불리하다면 저항할 권리가 있다. 독일 등 노동 관련법이 발전된 나라에서는 노동자의 파업권을 폭넓게 인정하고 단체교섭의 자율성도 보장한다.

2021년 택배기사 노조 교섭과 관련해 중앙노동위원회가 원청의 단체교섭 당사자성을 인정했지만, 법적으로는 아직 논란이 해소되지 않았다.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지 않은 단체교섭이므로 처벌할 것인가. 생계가 달린 문제에서 법과 원칙을 따질 때에는 위법을 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들여다봐야 하며 법과 원칙의 공정성도 따져 봐야 한다. 검찰은 법을 집행하는 것에 머물지만, 정치는 법을 제정하고 개정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손해 배상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대우조선은 이번 파업에 7000억원 이상의 손해 배상 청구를 하겠다는 입장이다. 2002년 두산중공업이 65억원의 손해 배상을 청구해 조합비와 임금, 살던 집까지 가압류당한 노조 간부 배달호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011년 한진중공업도 158억원의 손해 배상을 청구해 당시 노조 조직차장 최강서씨가 극단의 선택을 했다. 안타까운 사례는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파업에서 간신히 살아나온 노동자들을 다시 죽음으로 내모는 것이 손해 배상 청구다.

노동자단체 ‘비정규직이제그만 1천100만 비정규직 공동투쟁’이 지난 29일 거제조선소 하청노동자들을 민형사 소송으로 탄압하지 말라고 촉구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더불어민주당도 ‘노란봉투법(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개정안)’ 제정에 나섰다. 파업 노동자에 대한 손해 배상과 가압류를 제한하는 노란봉투법은 2020년 9월 발의된 후 국회에 계류 중이다.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노동자들에게 가해진 손배·가압류에 안타까움을 느낀 시민들이 노란 봉투에 모금을 시작했듯이 노란봉투법 제정에 시민들의 관심이 절실한 때다.

윤석열 대통령은 협상 타결 사흘 전인 19일 “기다릴 만큼 기다리지 않았나”라며 공권력 투입 가능성까지 내비쳤다. 공권력 투입을 못했으니 손해 배상으로라도 노동자들의 힘을 뿌리 뽑아 기울어진 법과 원칙을 보존하려는 것인가. 2021년 6월 시작된 노사 교섭에 대우조선이 1년 넘도록 나오지 않았으니 노동자들도 “기다릴 만큼 기다리지 않았나”. 노란봉투법 제정도 기다릴 만큼 기다렸다.

이번 파업의 근본 원인이 다단계 하청 구조에 있다는 것에는 많은 사람들이 동의한다. 조선 산업은 고임금에 호황이라는 세평과 달리 2019년 이후에는 사망 사고 비율이 제조업 평균보다 높고 임금 수준도 하락해 제조업 평균과 거의 차이가 없다. 게다가 2016년 이후 하청노동자들의 임금은 30%까지 하락했고 사망 사고의 많은 부분도 이들에게서 발생했다. 파업 당시 요구한 임금 인상 30%는 하락한 임금 수준의 회복에 불과했는데, 그마저도 노조의 양보로 4.5% 인상에 그쳤다.

조선 산업의 인력난은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 이를 해결하는 방안이라는 듯 기업과 정부는 노동자들의 사기를 꺾어 공포의 노사 평화를 이루려는 것으로 보인다. 대우조선과 산업은행은 손해 배상 청구와 분리 매각을 예고했고, 정부와 여당은 내부 총싸움에 바쁜 와중에도 기울어진 법과 원칙으로 견강부회한다. ‘부자들의 정당’이 되고 싶어 하는 민주당도 노란봉투법 제정의 불씨를 제대로 살릴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지지율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담대함’이 노동자의 삶에도 무신경하게 만든 것인가. 하청노동자들을 귀족 노조로 매도할 수 없으니 여론 조작도 한계가 있을 것이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지도자의 네 가지 등급을 얘기한 바 있다. 가장 훌륭한 지도자는 아랫사람이 그가 있는 것만 겨우 알고, 버금가는 지도자는 아랫사람이 가까이 여겨 받들고, 셋째 등급의 지도자는 아랫사람이 두려워하고, 가장 낮은 등급의 지도자는 아랫사람이 경멸한다고 했다. 20%대의 지지율로는 4등급 중 2등급에도 미치지 못한다. 영국의 ‘민주주의 지수 2020’에 따르면, 우리나라 민주주의 수준은 미국과 일본보다 높은 23위에 올라 ‘완전한 민주 국가’에 포함됐다. 공정하지 못한 억압으로 국민을 우롱해 부메랑 효과를 빚는다면, 그 등급은 어디에 해당할까.

정병기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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