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원섭이 만난 사람] “인기투표식 고위법관 인사에 지금 법원은 포퓰리즘 넘쳐나, 재판 재촉하는 선배 줄어… 판사 재임용 때 냉정한 평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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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과 법률이 규정한 ‘재판은 신속하게 진행해야 한다’는 원칙을 문언(文言) 그대로 준수하긴 어렵다 하더라도 최근 5년간 ‘법원의 재판 지연’은 심각한 수준으로 악화하고 있다. 대법원 통계에 따르면, 전국 법원 민사 합의부 1심 처리 기간은 지난 5년 만에 93일(32%) 증가했다. 형사 합의부 1심 기간도 50일(33%) 늘어났다. 같은 기간 합의부 2심 재판도 민사가 94일(41%), 형사가 60일(43%) 늦춰졌다. 다른 지표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이 같은 ‘재판 지연’ 현상은 해마다 가속도가 붙으며 갈수록 심각해지는 양상이다.
대한변호사협회도 이 문제에 주목해왔다. ‘재판 지연’은 헌법상 국민의 기본권인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 침해할 수 있다. 민·형사 사건의 당사자들을 대리하는 일선의 변호사들은 그 심각성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이종엽 대한변호사협회장은 지난달 29일 본지 인터뷰에서 “법원은 국민의 위임에 따라 ‘사법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관인데 합리적 이유 없이 재판을 지연한다면 ‘제때 판결을 내려야 한다’는 임무를 어기는 것”이라고 했다. 이 회장은 이전에도 대법원장 자문 기구인 사법행정자문회의에 참석해 재판 지연 문제를 꾸준히 제기해 왔다. 이날 인터뷰는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있는 대한변협회장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법원 재판은 국민 위한 ‘사법 서비스’
–변협 회원 변호사들이 현장에서 느끼는 재판 지연은 얼마나 심각한가.
“지난달 28일 오후부터 긴급 온라인 설문 조사를 시작했는데 29일 오후 6시까지 229명이 응답했다. 이 가운데 212명(93%)이 ‘최근 5년간 재판 지연 사례를 겪은 적이 있다’고 했다. 재판 시작과 판결 선고가 모두 늦다는 의견이 많았다. 소장을 법원에 내고 법정에서 판사 얼굴을 처음으로 보려면 6개월~1년이 걸린다는 비율이 25%로 나왔다. 1심 판결을 받을 때까지 1년 6개월~2년이 걸린다는 비율도 25%였다. ‘1심 판결은 5개월 안에 선고해야 한다’는 소송법 규정과 큰 차이가 있다. 설문 조사는 오는 12일까지 계속된다. 변협 회원들은 재판 지연으로 소송 당사자에게 피해가 생긴 사례도 호소하고 있다. ”
–재판이 늦어지면 당사자는 어떤 피해를 당할 수 있나.
“중소기업은 망할 수도 있다. 납품 대금 10억원을 못 받아서 소송을 하게 된 회사가 있다. 재판이 늦어지는 동안 하청 업체에 줄 돈을 마련하느라 2금융권, 3금융권에서 대출받는 바람에 이자 부담이 커졌다. 빚이 많아지니까 신용 등급이 떨어져 각종 거래에 어려움을 겪게 됐다. 판사 한 명의 재판 지연이 기업의 생사를 가를 수 있다. 주식 소유권 관련 재판이 늦어지면서 거래 정지가 되는 바람에 뒤늦게 승소 판결을 받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는 개인도 있다.”
–우리나라 법원의 재판이 다른 국가에 비해서는 빨리 진행되고 있다는 반론도 있다.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일본 변호사 업계에 따르면, 일본 법원은 첫 재판 기일을 소장 접수 후 45일 안팎 되는 기간에 잡아준다고 한다. 작년 우리나라에서 민사 합의 사건 첫 기일 지정까지 걸린 시간(150일)의 3분의 1도 안 된다.”
‘신속한 재판’ 헌법·법률 곳곳에 규정
–김명수 대법원장 취임 이후 ‘재판 지연’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는 지적이 많은데.
“지금 대법원이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 제도를 없앴다. 열심히 재판하고 좋은 판결문 쓰겠다는 동기 부여가 많이 없어진 게 사실이다. 판사도 공무원이라 승진이나 보직이 중요한데 인사가 노력이나 성과와 무관하게 이뤄진다면 누가 열심히 하겠나. 그런 지적이 많다.”
–김 대법원장이 도입한 법원장 후보 추천제가 원인이라는 분석을 말하는 것인가.
“지금 많은 법조인들은 ‘법원에 사법 포퓰리즘이 있다’고 지적한다. 법원장을 인기 투표식으로 뽑는다면 굳이 후배 판사들에게 인심 잃어가며 재판 빨리하라고 재촉할 필요가 없다. 지금 법원에 이런 풍토가 있는 게 사실이다. 선배 판사가 후배 판사들에게 좋은 말만 하며 인기 관리를 하면 재판 지연이 될 수밖에 없다.”
–전국 지방법원 배석 판사들이 ‘일주일에 판결문 3건만 쓰자’고 암묵적으로 합의했다는 말도 나온다.
“장기적으로 법원의 재판 역량이 저하할 수 있다. 판사 교육이 원래 도제식이다. 선배 판사가 후배 판사를 옆에 앉혀놓고 하나씩 가르쳐주는 것이다. 배석 판사가 판결문 초안을 써오면 부장 판사가 ‘사건의 사실관계는 정확하게 파악했는지’ ‘비슷한 사건의 판결문은 충분히 찾아봤는지’ 등을 확인하며 재판 기법을 전수한다. 배석 판사들이 일주일에 판결문 3건만 쓰겠다고 한다면 부장 판사가 굳이 더 가르쳐 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법원 전체의 재판 실력이 떨어지고 재판 속도 역시 느려질 우려가 있다.”
고법부장 승진 폐지 등 ‘일할 의욕’ 저하
–지난 정부가 강행한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이 형사 사법 절차를 전반적으로 지연시킬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그렇다. 형사 재판을 시작하려면 먼저 수사가 끝나야 한다. 검수완박으로 경찰 수사 부담이 커지게 돼 있다. 혐의가 복잡하고 입증이 어려운 사건은 경찰과 검찰을 오가며 보완수사를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 담당자가 바뀌면서 처음부터 수사를 다시 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되는 구조다. 수사가 늦어지면 형사 재판 시작도 늦어질 수밖에 없다. 검수완박이 민사 재판을 지연시키는 수도 있다.”
–검수완박이 어떻게 민사 재판도 지연시킬 수 있나.
“예컨대 명예훼손 사건에서는 형사 고발과 함께 민사 손해배상 청구도 하게 된다. 보통 법원은 고소 사건의 수사 결과나 형사 재판의 결과를 보고 그에 따라 민사 재판을 한다. 검수완박으로 형사 재판이 늦어지면 민사 재판도 늘어지게 되는 측면이 있다.”
–‘재판 지연’이 국민의 헌법상 권리를 침해한다는 비판도 많다.
“법원이 재판을 지연하는 것은 국민에 대한 임무 위배에 해당할 수 있다. 헌법은 ‘모든 국민은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고 형사 피고인은 지체 없이 공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민사소송법에는 ‘법원은 소송 절차가 신속하게 진행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내용이 있다. 법관윤리강령에도 ‘법관은 신속하게 재판을 진행해야 한다’고 돼 있다. 국민은 재판을 신속하고 공정하게 진행해 달라며 사법권을 법원에 위임했다. 법원이 정당한 이유 없이 판결을 늦게 내린다면 헌법과 법률에 따라 국민에게서 위임받은 의무를 저버리는 것이다.”
–일부 판사가 재판을 뭉갠다는 얘기도 법원 안팎에서 나온다. ‘재판 지연’에 대한 대책은 무엇일까.
“그런 판사가 누구인지 법원 스스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재판 지연을 이유로 판사 재임용에서 탈락시키는 경우는 거의 없다. (재판 지연에 대한) 평가를 냉정하게 하고 정도가 심한 사람은 (재임용 탈락 조치로) 내보내야 하는 것 아닌가.”
–판사 재임용 평가는 10년 단위로 하는데 평소에 재판 지연을 개선할 수 있는 방법도 필요하지 않을까.
“미제 사건이 얼마나 되는지를 주기적으로 판사들에게 알려주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서둘러 처리하라고 권고할 수도 있을 것이다. 법원이 재판을 신속하게 하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가능할 것이다.”
법원, ‘재판 지연’ 상시 대응·개선해야
–법원은 판사 1인당 재판 부담이 과도하다는 입장이다.
“미국식 ‘디스커버리(discovery)’ 제도를 도입하면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이 제도는 재판이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당사자끼리 자료와 증거를 서로 공개하고 쟁점을 정리하는 과정을 먼저 거치게 한다. 당사자 간 공방을 통해 사안의 실체가 드러나 조기에 합의할 수도 있다.”
–독일은 ‘재판지연 보상법’을 시행하고 있고 유럽사법재판소는 하급심 재판 지연에 대해 손해배상을 인정했다. 이런 제도의 도입이 필요하다고 보는가.
“우리도 충분히 검토해 볼 만한 제도이다. 재판 지연이 이미 장기화되는 추세로 가고 있다. 소장을 내놓고 첫 기일조차 받지 못한 상태에서 숨진 사람도 있다. 평생 일궈온 사업체가 재판 지연으로 큰 어려움에 빠질 수도 있다. 선의의 피해자를 막기 위해 재판 지연을 예방하고 피해를 보상하기 위한 합리적 장치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보다 근본적 방안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판사는 국민에게 재판 서비스를 제공하는 공무원이다. 신속한 재판은 판사로서 직업 윤리와 의지 문제라고 본다. 판사들이 부지런해야 한다. 당장 법원에 들어오는 사건을 줄일 수도 없고 판사 수를 갑자기 늘릴 수도 없지 않은가. 재판은 판사가 하는 것이다. 원고나 피고가 정해진 때에 서류를 내지 않으면 판사가 독촉해야 한다. 주장이 분명하지 않으면 제대로 설명하라고 채근해야 한다. 당사자의 주장과 증거가 정리된 상태에서 4~5회 재판으로 판결을 내리는 ‘집중심리제도’가 제대로 작동되게 해야 한다.”
☞이종엽
1963년 경기 시흥 출신으로 인천 광성고,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다. 사법시험 28회, 연수원 18기로 1992~1995년 검사 생활을 거쳐 변호사로 개업했다. 인천지방변호사회장, 인천 경실련 공동대표 등을 지냈고 작년 51대 대한변호사협회장에 당선됐다. 지난 정부 마지막 검찰총장후보추천위원회에 참석해 이성윤 당시 검사장을 겨냥해 “특정 정치 편향성이 높은 분은 어울리지 않는다”며 반대 의사를 밝혔다. 김명수 대법원장의 ‘거짓말’ ‘편향 인사’ 논란에는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지난 4월 ‘검수완박’ 입법에 대해서도 무제한 반대 토론을 개최하며 “국민 권익 보호와 법을 통한 사회 정의 실현을 위해 졸속 입법을 저지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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