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의 허리 강원 백두대간 대탐사] ⑮ 안반데기의 기적, 화전민과 백두대간

김우열 2022. 8. 1.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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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박한 시대에 꽃피운 푸른 물결, 구름도 머물다 가는 곳
강릉·평창 경계 위치 '낭만 관광지'
60년대 개간 도로·전기 등 전무
"주민 생계 막막 이 악물고 버텨"
국내 최대 고랭지 채소단지 성장
백두대간서 가장 높은 고루포기산
화전민 희노애락 담긴 울창한 숲길
야생화 만개 대자연 풍경 만끽
▲ 해발 1100m 백두대간 고원지대에 자리한 안반데기 모습.

아! 백두대간

대관령 남쪽 해발 1100m 백두대간 고원지대에 자리한 ‘안반데기’, 대관령을 기점으로 백두대간에서 가장 높은 해발 1238m의 ‘고루포기산’. 안반데기와 고루포기산은 모두 화전민과 깊은 연관이 있다. 그 옛날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깊고 험한 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화전민들은 척박한 산비탈 밭이 유일한 재산이자 희망이었다. 강릉시 왕산면과 평창군 대관령면의 경계에 솟은, 백두대간 능선에 자리한 고루포기산 등은 과거 화전민들이 오로지 생계를 위해 오갔던 길이어서 그들의 역사와 문화가 고스란히 배어있다.

▲ 안반데기에서 고루포기산 방향으로 풍력발전기가 설치돼 이국적인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 안반데기의 기적

강릉시와 평창군 경계에 위치한 강릉시 왕산면 대기4리 ‘안반데기’. 세칭 ‘하늘 아래 첫 동네’로 불린다. 국내 최대의 고랭지 채소 재배단지이다.

지금에서야 ‘낭만 관광지’로 불리지, 그 옛날 화전민들에게는 낭만 같은 건 생각할 겨를도 없는 치열한 삶의 현장이었다. 일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게 없었고, 휴식 등의 여유는 사치였다. 일하고, 밥먹고, 잠자고, 다시 일어나 일하고, 밥먹고, 잠자는 일상이 반복됐다.

발을 잘못 디디면 수십m 아래로 떨어져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가파른 비탈에서 곡괭이와 삽만으로 밭을 일궜다. 현재 운유촌을 기준으로 안반데기쪽은 1965년, 고루포기산쪽은 1966년에 개간됐다.

안반데기의 역사는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산자락에 흩어져 살던 화전민들에게 땅과 집을 준다며 안반데기로 불러모았다.

“경북 안동이 고향인데 전북 김제와 충북 등을 떠돌다가 집과 함께 땅을 공짜로 준다고 하니 부친께서 괴나리 봇짐을 짊어지고 생판 알지도 못하는 이곳에 5남매를 데리고 무작정 왔어요. 1966년 3월달에 아버지를 따라서 왔는데 첩첩산중으로 계속 가니까 너무 무서웠어요. 도착해서는 여기가 사람사는 곳이 맞는지, 사람이 살 수 있는지 놀라기도 하고 막막했어요. 그 때 제가 14살이었는데 도망치고 싶었죠. 이를 악물고 버티다보니 안정적인 삶이 찾아와서 지금까지 57년째 살고 있는 거예요.”

안반데기 산증인인 김시갑(70) 씨는 마을에 온 계기와 도착 당시의 모습, 심정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했다.

당시 도로는 물론 상수도, 전기 등 기반시설이 아예 없었다. 곡괭이와 삽만으로 그야말로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만 했다. 강도 높은 육체노동으로 아프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극심한 근육통에 시달렸다.

개간 당시에는 약 60가구가 살았다. 씨감자와 무, 약초가 주력 상품이었다. 재배한 작물을 내다 팔려면 안반데기에서 가장 가까운 대관령 횡계까지 30리 이상 산길을 걸어서 가야 했다.

▲ 안반데기 화전민의 산증인인 김시갑씨가 과거 안반데기 모습을 설명하며 손짓하고 있다.

산길을 오르다 비탈에 굴러 작물이 망가지는 일도 허다해 아무런 수입없이 빈손으로 돌아오는 날도 많았다. 다음날 아침 눈뜨기가 싫을 정도로 척박한 땅에서의 일이 고됐고, 농사도 생각만큼 되지 않았다. 사람 걸어다니는 길만 덩그러니 놓여있고 가장 중요한 도로가 없다보니, 농사를 지어도 내다 파는게 쉽지 않고 잘 팔리지도 않아 생계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60년대 말에는 많은 이들이 떠나 10가구도 채 남지 않았다.

그러다가 강릉과 대관령 횡계로 가는 비상도로가 70년대 초에 뚫리면서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럭저럭 농사도 되고, 판로도 안정적이다보니 70년대 후반 사람들이 다시 몰려와 이전 사람들이 버리고 간 땅에서 농사를 지으며 생기가 돌았다. 이맘때쯤 재배가 비교적 수월하고 포전매매로 거래돼 작업이 용이한 배추농사가 본격 등장했다.

육질이 단단하고 맛이 좋다는 입소문이 돌면서 80년대부터 90년대까지 배추재배 농가가 급격히 늘었다. 이 시기가 고랭지배추의 전성기로 현재까지 국내 최대 고랭지배추단지의 명맥을 잇고 있다. 해발 1100m의 산비탈에 광활하게 펼쳐진 고랭지배추밭은 척박한 땅에서 희망을 쏘아올린 화전민들의 땀과 눈물의 결실이다.

김시갑 씨는 “굶는 날이 많았고 늘 배고팠어요. 눈이 오면 아예 다닐 수가 없기 때문에 가을 추수가 끝나면 봄까지 먹을 수 있는 쌀과 국수 등의 식량을 한번에 구입해놔야 겨울을 날 수 있었죠. 최악의 환경에서 죽지 못해 일을 하고 이를 악물고 버텼어요. 희망의 끈 조차 찾아볼 수 없었던 쓸모없는 땅이 국내 최대 고랭지배추밭이 된 것은 기적입니다. 주민들이 피와 땀으로 성취한 희생의 결과라고 볼 수 있어요”라고 말했다.

▲ 해발 1238m의 고루포기산 숲길.

■ 화전민과 백두대간

백두대간 능선에 자리한 고루포기산은 산에 고로쇠나무가 많이 자생해 예부터 비슷한 말로 고루포기산으로 불렸다는 이야기가 구전으로 전해오나 기록으로 남아있는 것은 없다. 남서쪽의 발왕산, 북쪽의 능경봉, 능경봉 동쪽의 제왕산에 비하면 ‘무명(無名)산’이라고 할 수 있다.백두대간 종주 붐이 일고, 안반데기 운유길(왕복 6㎞, 소요시간 약 3시간)과 안반데기 노추산 모정탑길(왕복 8.58㎞, 소요시간 약 4시간)이 생기면서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유명(有名)산’에는 입신양명(立身揚名)의 꿈을 안고 과거시험을 치르는 유생, 높은 벼슬아치, 유람하는 선비 등이 오르내렸다는 기록들을 찾아볼 수 있다. 각층의 사람들이 다양한 목적을 갖고 산과 마주한 것이다. 반면, 안반데기와 이어지는 고루포기산 등 백두대간 줄기는 특정 사람들만의 길이었다. 오로지 먹고 살기 위해 올라야 했던 생계를 위한 길이었다. 오르는 이유는 이게 전부다. 이 길에 나서는 이는 대부분 화전민들이었다.

김시갑 씨는 “횡계 등지에 작물을 내다 팔아야 돈을 벌 수 있으니까 그곳으로 가는 고마운 길이기도 했지만, 30리가 넘는 산길을 가야해 첩첩산중 산골에 사는 것이 힘들어 원망스러운 길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일반적인 백두대간 종주 코스는 대관령휴게소∼능경봉∼고루포기산∼안반데기, 안반데기∼고루포기산∼능경봉∼대관령휴게소이다. 안반데기∼고루포기산 코스(왕복 9㎞, 소요시간 약 3시간)는 임도로 이어져 있다.

▲ 대관령을 기점으로 백두대간에서 가장 높은 해발 1238m의 고루포기산 정상.

걷는 내내 꽃처럼 활짝 핀 푸른 배추의 물결이 펼쳐진다. 멍에전망대를 거쳐 고루포기산 정상으로 가는 길은 곳곳에 풍력발전기가 돌아가 이국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겹겹이 늘어선 백두대간의 능선, 하얀 풍력발전기, 새파란 하늘 위 구름이 조화를 이루면서 무한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임도 끝지점에 다다르면 숲길이 이어진다. 울창한 숲과 형형색색 야생화가 곱게 피어 상쾌한 공기를 만끽할 수 있다. 1㎞ 정도 오르면 고루포기산 정상이다. 고루포기산 정상에서 남쪽은 닭목재(5.9㎞), 북쪽은 능경봉(4.8㎞)이다. 대자연과 사람이 만들어 낸 경이로운 풍경과 역사·문화적 가치는 가히 으뜸이다. 시간만 흘렀을 뿐 구름과 푸른 하늘, 능선, 풍광 등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다. 화전민들은 조용히 아름다운 경치를 눈에 담고 마음에 위안을 얻었을 것이다. 그 옛날 삶의 희로애락이 짙게 밴 각별한 길임을 오르는 이들은 기억해야 한다. 김우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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