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노마드] 블링컨 美 국무장관은 어떻게 불어 능통자가 됐을까
세상에는 문화·인종·국적의 원천이 다양한 ‘하이브리드 인재’가 많습니다. 정치·종교의 핍박을 피한 이주민이나 후손이 국가의 명운을 가르기도 합니다. 국경을 초월해 족적을 남기는 이들의 삶을 들여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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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6월 25일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이 파리를 방문합니다. 조 바이든 행정부 출범과 함께 미국의 외교 수장이 된 이후 5개월이 지난 시점이었죠. 센강변 외교부 청사 마당으로 마중나온 장 이브 르드리앙 당시 프랑스 외무장관은 차에서 내린 블링컨과 주먹 인사를 하며 반가워합니다.
르드리앙이 “Mon cher Tony, Je serais tenté de dire. bienvenue chez toi”라고 프랑스어로 인사를 건넵니다. 우리말로는 “네가 살던 곳에 다시 온 걸 환영한다고 말하고 싶어” 정도입니다. 이런 인사를 건넨 이유는 블링컨이 10대 시절 초·중·고를 모두 파리에서 졸업하며 프랑스에서 10년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르드리앙은 “toi”라며 친분을 보여줍니다. 프랑스어는 높임말이 있어서 격식을 갖춰 상대를 지칭할 때는 ‘vous’라고 하는데요. 르드리앙은 블링컨을 친구처럼 부른 겁니다. 2012년부터 둘은 알고 지냈습니다. 당시 르드리앙은 국방장관이었고, 블링컨은 부통령이었던 바이든의 외교안보보좌관이었습니다.
르드리앙의 약간 호들갑스러운 프랑스식 환영에 블링컨도 유창한 프랑스어로 인사합니다. “Mon cher Jean-Yves, je suis content de te retrouver ici et de me retrouver à Paris.” 우리말로는 “너를 여기서 다시 봐서 좋고 내가 파리에 다시 와서 좋구나” 정도죠. 블링컨 역시 르드리앙을 ‘te’라고 하며 존칭을 하지 않습니다. 이 장면을 당시 제가 파리에서 특파원으로 일하며 TV로 봤는데요. 실제로 가까운 친구끼리 만나는 장면 같았습니다.
블링컨은 역대 미국 외교수장 가운데 가장 유럽을 잘 이해하는 사람으로 꼽힙니다. 블링컨이 어린 시절 10년이나 파리에서 살게 된 건 어머니의 재혼 때문이죠. 그의 의붓아버지와 어머니가 뉴욕에 살던 블링컨을 파리로 데려왔습니다. 이번 ‘글로벌 노마드’에서는 블링컨의 의붓아버지 새뮤얼 피자르(1929~2015)를 조명해보려고 합니다.
피자르는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아 존 F 케네디 미 대통령의 참모와 세계적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의 친구가 되며 영화 같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가 의붓아들 블링컨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와 ‘친유럽파’ 블링컨을 둘러싼 미국과 유럽의 역학 관계도 다뤄봅니다.
한가지 더 ‘글로벌 노마드’ 관점에서 이야기할 포인트가 있습니다. 블링컨은 파리에서 영어와 프랑스어로 수업하는 이중언어학교를 졸업했는데요. 이 학교가 왜 프랑스인들은 물론이고 한국인들을 포함해 프랑스의 외국인들 사이에서 유명세를 타고 있는지도 말씀드리겠습니다.
◇국무장관 지명되자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의붓아버지 소개한 블링컨
2020년 10월 24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자택이 있는 델라웨어주 윌밍턴에서 첫 내각 지명자들을 소개하는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초강대국 미국의 내각에서는 외교 사령탑인 국무장관이 제일 스포트라이트를 많이 받게 마련입니다. 2차대전 직후의 조지 마셜, 1970년대 헨리 키신저, 1980년대 조지 슐츠, 최초의 여성 국무장관이자 미국 장관급으로는 처음 북한을 방문한 매들린 올브라이트 등 미 국무장관 중에는 현대사에 족적을 남긴 거물들이 많습니다.
바이든이 새 국무장관으로 오바마 행정부 당시 국무부 부장관이었던 블링컨을 지명하자 유럽은 일제히 환영했습니다. 트럼프식 미국 일방주의에서 과거에 유럽과 함께 세계질서를 논의하던 시대로 돌아가는 걸 상징했습니다.
특히 프랑스가 대대적으로 환영했죠. 일간 르피가로는 “프랑스에 우호적인 인사가 바이든 외교정책을 지휘한다”고 했고, 공영 라디오 RFI는 “바이든이 국무장관으로 프랑스어 능통자를 골랐다”고 했다. 프랑스인들은 자기네 언어에 유독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영국·독일·이탈리아 언론도 트럼프 시대가 지나갔다며 유럽에서 오래 거주하고 학교를 다닌 경험이 있는 미국 국무장관 지명을 반겼습니다.
블링컨은 국무장관으로 지명된 소감을 밝히는 현장에서 의붓아버지 피자르 이야기를 꺼냅니다. 블링컨은 “돌아가신 의붓아버지는 아우슈비츠 등의 강제수용소 생활을 했던 홀로코스트 생존자였고, 미국이 그를 구해줬다”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미국의 이익만 추구한 트럼프 시대에서 완전히 탈피해 세계 무대에서 ‘미국의 역할’을 하겠다는 의지를 밝히며 의붓아버지의 삶을 상기시킨 겁니다.
실제로 블링컨의 삶에는 친부보다 피자르가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피자르는 폴란드, 독일, 프랑스, 호주, 미국을 넘나들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습니다.
◇10살 때 수용소에서 부모와 여동생 학살당해
피자르는 폴란드 북동부 거점도시 비알리스토크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는 모두 유대인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비알리스토크에서 처음 택시회사를 차린 사업가였다고 합니다. 1939년 2차대전이 발발해 독일군이 폴란드를 삼킬 때 피자르는 10살이었습니다. 부유한 유대인은 독일군이 가장 우선적으로 처단하는 대상이었죠. 그의 부모와 여동생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독일군에 의해 학살당했습니다. 피자르는 아우슈비츠를 비롯해 6군데의 강제수용소를 옮겨다니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의 팔에는 평생 ‘B-1713′이라는 강제수용소 수용번호가 문신으로 새겨져 있었습니다.
2차대전이 끝날 무렵 16세 소년이던 피자르는 독일로 끌려가는 이른바 ‘죽음의 행군’을 하고 있었습니다. 도중에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숲속으로 도망쳐 숨었다고 합니다. 한참을 숨어 있던 그는 탱크가 지나가는 진동음을 들었습니다. 나중에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숲에서 탱크를 쳐다봤어요. 옆면에 나치를 상징하는 문양(하켄크로이츠) 대신 미국을 상징하는 (성조기의) 하얀 별들이 그려진 것을 보고 탱크로 달려갔습니다. 무릎을 꿇고 생전의 어머니가 가르쳐준 영어 단어 3개를 외쳤습니다. ‘신이여 미국을 축복하소서(God bless America)’였습니다.”
블링컨은 국무장관으로 지명된 자리에서 이런 의붓아버지의 나치 탈출 장면을 자세히 소개하며 미국의 역할을 강조했습니다. 전쟁 고아였던 피자르는 2차대전 직후 독일 바이에른주의 미군 점령지대에서 친구들과 숙식하며 살았습니다. ‘럭키 스트라이크’라는 당시 유행하던 담배를 길거리에서 팔았다고 합니다. 암시장에서 장물을 거래하기도 했던 불량 소년이었습니다. 1년 넘게 뒷골목 삶을 살아가던 피자르에게 인생의 반전의 계기가 찾아옵니다.
◇파리·멜버른·보스턴에서 공부해 변호사가 되다
파리에 살고 있던 그의 친척들이 피자르의 소식을 듣고 그대로 방치할 수 없다며 파리로 데려옵니다. 친척들의 도움으로 그는 영미권에 가서 공부를 하기로 합니다. 그가 선택한 곳은 호주의 멜버른대학입니다. 1953년 멜버른대학 법학과를 나온 피자르는 이번엔 미국으로 가서 하버드대 로스쿨을 나왔고, 다시 파리로 가서 소르본대 대학원 법학과를 졸업합니다. 학업에 재미를 느끼고 열정을 쏟아부었습니다. 후일 그는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용하던 아드레날린을 공부하는 데 썼다”며 “공부로 방향을 틀지 않았다면 깡패나 테러리스트가 됐을지도 모른다”고 했죠.
직장 생활을 1950년대 뉴욕에서 유엔 사무국 직원으로 시작한 피자르는 파리와 뉴욕을 오가면서 활동 반경을 넓혔습니다. 1960년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당선되자 그의 경제·외교정책 태스크 포스 일원으로 활동했습니다. 미 국무장관 보좌관으로도 일하며 전면에 나서지 않고 뒤에서 당시 민주당 정권의 깊숙한 곳에서 일을 합니다.
이재에 밝은 유대인답게 그는 변호사로서 미국과 유럽의 대기업 자문을 맡아 돈도 많이 법니다. 카트린 드뇌브와 같은 스타들의 법률 자문도 맡았습니다. 그와 함께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을 기념하는 사업에도 공을 들입니다. 1961년 미국 시민권을 얻었고, 1974년에는 노벨평화상 후보에 오릅니다.
피자르는 홀로코스트에서 어떻게 살아 남았는지, 그리고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독일군의 수용소 생활은 어땠는지를 담아 1979년에 회고록(Of Blood and Hope)을 내놓습니다. 19개국 언어로 번역돼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지금도 영미권 서점에서 팔리는 이 책은 2차대전 수용소 생활을 사실적으로 기술하면서도 심금을 울린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피자르는 같은 유대인이면서 세계적인 지휘자 겸 작곡가인 레너드 번스타인의 가까운 친구이기도 했습니다. 번스타인의 교향곡 3번 ‘카디시’는 피자르가 가사를 써넣었습니다. ‘카디시’는 유대인들이 기도를 할 때 부르는 노래를 말합니다. 번스타인의 ‘카디시’는 관현악으로만 된 보통의 교향곡이 아니라 오라토리오 식으로 성악이 들어가 있는 곡입니다.
피자르는 프랑스에서 유대인을 추모하는 가장 대표적인 장소인 파리의 쇼아기념관의 이사를 지냈습니다. 쇼아기념관은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주도해 2005년 문을 열었는데요. 파리 4구의 젊음의 거리인 마레 지구에 있습니다.
◇재혼한 어머니를 따라 파리의 부촌에서 10대를 보낸 블링컨
피자르는 두번 결혼합니다. 첫 부인과의 사이에서 딸을 둘 뒀습니다. 그리고 1970년 블링컨의 어머니였던 주디스와 재혼합니다. 블링컨의 친부 도널드 블링컨과 이혼했던 주디스는 피자르를 두번째 남편으로 맞았습니다. 블링컨의 친부 도널드 블링컨은 투자은행 업계의 실력자로 큰 돈을 벌었고, 뉴욕의 미술품 시장에서도 ‘큰손’으로 유명했던 사나이였습니다. 그는 공산권이 무너진 직후인 1990년대 초 헝가리 주재 미국대사도 지냈습니다.
피자르와 주디스는 재혼한 이듬해인 1971년 블링컨을 데리고 파리로 이주합니다. 미술품 매매시장의 기획자였던 주디스는 파리의 아메리칸 센터 원장을 17년이나 맡았습니다. 블링컨은 파리의 부촌인 16구의 넓은 집에서 살던 어린 시절에 “늘 음악과 미술에 둘러쌓여 있었다”고 했습니다. 블링컨은 파리에서 청소년기를 보낼 당시 인권운동을 하는 피자르의 영향을 받아 보편적인 인권의 중요성에 눈을 떴다고 합니다.
피자르와 주디스는 딸 레아를 낳았습니다. 블링컨의 의붓여동생인 레아 피자르는 어릴 적 파리에서 자란 뒤 하버드대를 나와 파리2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빌 클린턴 대통령 시절 백악관에서 근무했죠. 레아는 파리를 중심으로 알라딘 프로젝트라는 단체 대표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단체는 홀로코스트를 기억하면서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 사이에 이해를 촉진하는 사회 통합 운동을 하는 곳입니다.
◇민주당 외교안보 라인의 핵심으로 성장
어머니의 재혼으로 아홉 살에 파리로 전학을 간 블링컨은 파리 15구에 있는 명문 사립인 ‘에콜 자닌 마뉘엘(EJM)’에 들어가 초·중·고를 쭉 이 학교에서 졸업했습니다. 프랑스 대입시험인 바칼로레아에 응시해 합격했지만 고국인 미국으로 돌아갑니다.
블링컨은 하버드대에 진학했고, 컬럼비아대 로스쿨을 졸업해 변호사가 됐습니다. 그는 30대 초반부터 민주당 안보전략팀에서 경력을 키웁니다. 클린턴 행정부 시절인 1994년부터 7년간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서 전략기획 수석국장, NSC 연설문 수석국장 등을 지냈죠. 이어 상원 외교위원회 상근 국장(2002~2008)을 지냈는데, 당시 상원 외교위원장이 바이든 현 대통령이었습니다.
오바마 행정부가 들어선 후 블링컨은 승승장구합니다. 부통령 외교안보보좌관(2009~2013), 대통령 국가안보보좌관(2013~2015), 국무부 부장관(2015~2017) 순서로 자리를 꿰찼습니다. 트럼프 행정부 시절에는 민간으로 가서 방위 사업과 정치 분야 컨설팅회사인 ‘웨스트에섹자문’이란 회사를 차려 돈을 제법 벌었습니다. 그러다 바이든이 트럼프를 꺾고 대통령이 되면서 국무장관으로 화려하게 복귀했습니다.
◇프랑스 뒤통수 제대로 때린 블링컨
프랑스는 블링컨에 기대하는 게 많았습니다. 하지만 나라간 이해관계가 상충하면 외교관은 철저하게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게 됩니다. 프랑스는 블링컨이 국무장관이 돼 파리를 다녀간 지 석달 만에 미국 정부에 의해 뒤통수를 세게 맞았습니다. 어찌 보면 믿었던 블링컨에게 배신당한 겁니다.
2021년 9월 15일 미국·영국⋅호주 3국은 안보 협력체 ‘오커스(AUKUS)’를 공식 출범시킵니다. 앵글로 색슨 국가끼리 깊숙하게 손을 잡은 거죠. 영국이 EU를 탈퇴한 이후라 독자적인 안보 전략을 구사한 측면이 있습니다. 오커스 출범을 계기로 호주는 프랑스로부터 디젤 잠수함을 인도받기로 한 2016년의 560억유로(약 75조원)짜리 계약을 파기합니다. 미국이 핵 잠수함 건조 기술을 건네주기로 물밑 약속을 하자 호주가 바로 프랑스를 헌신짝처럼 내팽겨친 거죠.
르드리앙 당시 프랑스 외무장관은 호주의 계약 파기에 대해 라디오에 출연해 “뒤통수를 제대로 맞았다. 오늘 무척 화가 난다. 이건 동맹국 간에 할 일이 아니다”라며 비난했습니다. 프랑스가 분노한 이유는 다층적이었습니다. 우선 외교 분야에서 서방의 아시아·태평양 안보 전략에서 제외됐다는 위기감이 상당했죠.
역사·문화적인 측면에서도 영어권 국가들로부터 집단 따돌림을 당했다는 굴욕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일간 르피가로는 “트래펄가 해전의 패배를 태평양에서 당한 꼴”이라고 비유했습니다. 나폴레옹의 프랑스 함대가 영국 함대에 무참히 패배했던 1805년 트래펄가 해전이 오늘날 태평양에서 다시 벌어진 것과 같다는 것이죠.
경제적 타격도 엄청났습니다. 호주에 인도할 잠수함을 제작하려던 나발그룹은 프랑스 정부가 대주주인 방산업체인데요. 391년 역사를 갖고 있는 회사로서 프랑스 서부 브르타뉴 지방을 먹여 살리는 회사입니다. 나발그룹 본사와 협력업체의 직원 및 가족들까지 수십만명이 직격탄을 맞았습니다. 특히 프랑스가 화가 난 건 미국측이 오커스 출범과 호주의 잠수함 계약 파기를 사전에 언질조차 하지 않았다는 거죠.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미국·영국에 의해 따돌림을 당할 때면 소외감 내지는 불만을 표시합니다. 2021년 초 백신 공급 초기 때 미·영이 백신 원료 수출을 통제했을 때 “앵글로 색슨이 문제”라고 했었죠.
◇'친불파’지만 파리보다 베를린을 먼저 찾아간 블링컨
국제 질서는 힘이 지배합니다. 블링컨이 국무장관이 된 다음 유럽을 쭉 돌았던 2021년 6월에도 그는 독일을 먼저 들렀습니다. 그리고 나서 프랑스, 이탈리아 순으로 방문했죠. 국력 순서로 일정을 짠 겁니다. 당시 블링컨은 베를린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독일보다 나은 친구가 없다”고 말합니다. 독일에서 ‘친불파 아니냐’는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일부러 이런 말을 한 것으로 보이구요. 독일·미국·프랑스 언론이 이 표현에 집중했습니다.
EU에서 독일과 프랑스는 쌍두마차인데요. 자세히 보면 프랑스는 독일과 비교해 갈수록 국력이 뒤처지고 있습니다. 인구가 작년 기준으로 독일이 8380만명이고, 프랑스는 6530만명입니다. 인구로는 프랑스가 독일 대비 78%라는 거죠. 그런데 작년 경제규모(GDP)로는 프랑스가 독일의 69%에 그칩니다. 2010년만 하더라도 독일과 프랑스의 GDP가 현재의 인구 비율과 거의 같은 100대 77이었다는 걸 감안하면 빠른 속도로 프랑스의 경제력이 독일보다 뒤떨어지고 있습니다. 즉, 1인당 GDP로 볼 때 갈수록 독·불 격차가 커진다는 겁니다. 왜 그런지에 대해서는 제가 특파원 시절에 여러 차례 컬럼을 썼는데요. ‘글로벌 노마드’에서도 다룰 기회가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블링컨이 졸업한 파리의 이중언어학교 입학 열기 고조
요즘 프랑스에서는 블링컨이 파리에서 다닌 ‘에콜 자닌 마뉘엘(EJM)’이 관심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이중언어학교인 EJM은 르피가로 계열의 미디어 정보 기업 랭테르노트(L’internaute)가 매기는 프랑스 고교 순위에서 올해도 1위를 차지하면서 10년 연속 1위를 지켰습니다. 한국에는 없는 유형의 학교라서 조금 더 자세히 소개해보겠습니다.
EJM은 원래도 명문이고 프랑스에서는 소위 ‘있는 집안 자제들’이 다니는 학교로 유명합니다. 요즘은 ‘현직 미 국무장관이 해외에서 살 때 다닌 학교’라는 점이 부각되고 있죠. ‘블링컨 후광 효과’ 때문에 입학 경쟁이 더 치열해지고 있다고 합니다. 자녀를 영어 능통자로 만들거나 미국이나 영국의 일류대학에 보내려는 프랑스 부유층들이 아이들을 이곳에 보내려고 애씁니다.
근년에는 중국인들이 이 학교에 자녀를 보내려는 열기가 대단합니다. 프랑스의 한국 교민, 외교관, 주재원들도 관심을 갖고 있는 학교죠. 마크롱 대통령이 런던 금융가의 인재들을 프랑스로 유치하기 위해 이중언어학교를 늘리라고 지시하면서 더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EJM에서는 학년별로 언어 배합 비율이 달라지긴 합니다만 영어와 프랑스어를 함께 사용합니다. 이를테면 수학은 불어로, 과학은 영어로 가르칩니다. 역사·지리는 1학기 때 영어로 하다가 2학기 때 불어로 바꾸는 식이죠. 학생들은 대략 3분의1씩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부모 모두 프랑스인, 부모 중 한 명이 프랑스인, 부모 모두 외국인 등 3개 그룹이죠. 부모가 모두 외국인인 경우 국적별로 다양하게 선발합니다. 한 학년은 200명쯤인데요. 부모가 모두 한국인인 학생은 학년당 1~2명 정도입니다. 예전보다 한국 학생들의 지원은 많아지고 합격자는 줄었다는 게 중론입니다.
◇국무장관 재임 중에 파리의 모교에 졸업 축사 보낸 블링컨
EJM은 학비도 유리한 점이 있습니다. 프랑스는 공립학교는 무료고 사립학교도 생각보다 학비가 저렴합니다. EJM은 프랑스 학교 중에서는 가장 비싼 학교입니다. 그래도 학비가 극악스럽기로 유명한 파리의 국제학교들에 비해서는 3분의1 이하에 불과합니다.
블링컨은 EJM에 각별한 애정을 표시해왔습니다. 2015년 국무부 부장관 시절에 학교에 찾아와 후배들 앞에서 강연을 했습니다. 지난해에는 국무장관으로 바쁜 와중에도 EJM 졸업 앨범에 직접 축사를 써서 보냈습니다.
블링컨이 국무장관으로 지명됐을 때 파이낸셜타임스(FT)는 그가 1980년 EJM을 졸업할 때 사진까지 구해 보도했습니다. FT는 “블링컨은 미국이 인기가 없던 냉전 시절 다른 나라 사람들이 미국을 어떻게 보는지를 해외에서 체감한 인물”이라며 “미국의 힘을 신뢰하지만 한계도 알기 때문에 바이든의 외교정책을 현실적인 방향으로 이끌 것”이라고 했습니다. 르파리지앵은 “학교 구성원들이 미국 국무장관의 모교라는 점에서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했습니다.
◇알랭 들롱·소피 마르소의 자녀들과 동문
EJM은 앞서 말씀드린대로 유명 인사나 상류층이 선호하는 학교입니다. 배우 알랭 드롱, 소피아 로렌, 제인 버킨, 소피 마르소의 자녀들이 이 학교를 나왔습니다. 에르메스 ‘버킨 백’으로 유명한 영국 출신 배우 제인 버킨의 동거남이었던 가수 세르주 갱스부르(1928~1991)는 프랑스 6·8혁명의 상징적인 존재인데요. 그의 딸인 배우 샤를로트 갱스부르(51)가 EJM을 나왔습니다. 샤를로트는 부모처럼 결혼을 하지 않고 이스라엘계 프랑스 영화배우 이방 아탈과 동거하며 세 자녀를 뒀는데요. 아탈과 자녀들도 EJM 동문입니다.
요즘은 유럽 제1의 부자인 베르나르 아르노 LVMH(루이뷔통모에헤네시그룹) 회장의 며느리이자 세계적인 모델인 나탈리아 보디아노바의 아들과 딸이 재학중이라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니콜라 사르코지 전 프랑스 대통령이 전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EJM 졸업생이고, 사르코지의 현재 부인인 가수 카를라 브루니는 예전 동거남이었던 TV 진행자와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EJM에 보냈습니다. 이외에 모나코 왕가, 석유 재벌 슐럼버거 가문, 프랑스 통신 재벌 부이그 가문, 콜롬비아 최대 재벌 산토 도밍고 가문의 자제들도 이곳을 졸업했습니다.
현재 미국 정부의 이란 특사인 로버트 말리는 미국·벨기에에 기반을 둔 국제 분쟁 연구기관인 ICG그룹 대표입니다. 그는 블링컨이 EJM에 다닐 때 같은 반 친구였습니다. EJM 졸업 후 블링컨은 하버드대, 말리는 예일대로 진학했죠. 블링컨이 국무장관이 되자 친구 말리는 인터뷰에서 “(베트남전 때문에) 블링컨은 미국이 가장 인기 없던 시절에 외국의 눈으로 세상을 봤다”며 “파리에 사는 젊은 미국인으로서 블링컨은 세계에서 미국의 역할을 탐색하는 법을 배웠다”고 했습니다.
이번에는 블링컨과 그의 의붓아버지 피자르를 둘러싼 이야기를 들려드렸습니다. 다음번에는 ‘런던에 사는 프랑스인들’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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