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록의 캡틴락 항해일지] 제습기 세레나데

한겨레 2022. 7. 31.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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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록의 캡틴락 항해일지]

‘크라잉넛’ 기타리스트 이상면이 먼저 읽고 그리다.

한경록 | 밴드 ‘크라잉넛’ 베이시스트

장마가 찾아오자, 습한 날씨 때문에 벽에 걸린 그림들은 축 처진 표정을 하고, 가구들은 생선 맛살처럼 물렁해지고,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표들도 낮은 기압 때문인지 바닥을 기어서 귀까지 겨우 올라와 들어왔다.

​액션배우처럼 날렵했던 나의 몸뚱이도 축 늘어져 늪 속을 허우적거리는 것만 같다. 이것은 필시 나쁜 마법사의 주문으로 평화로운 인간 세상을 괴롭히려는 것임이 틀림없다.

그렇다고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다. 나는 당장 ‘고스트버스터즈’에 긴급 연락을 하듯, 뒤베란다에 처박혀 있는 ‘제습기’에게 무전을 친다. 그러면 제습기는 제트기처럼 거실로 날아온다.

무대에 오르기 전 악기를 닦듯 정성스레 먼지를 닦아주고, 녹슨 기타줄을 갈듯 필터를 교체한 뒤, 제습기에 전기를 신속하게 공급한다. 제습기는 영화 <스타워즈>의 R2D2 로봇처럼 삐리릭 소리를 내며 “반가워, 캡틴락!” 하고 인사를 건넨 뒤, 기지개를 켠다.

제습기는 신난 어린아이마냥 ‘부앙~’ 소리를 내며 거실 곳곳의 습기를 빨아들인다. 마치 “나 습기 잘 빨아들이지?” 하고 뽐내는 듯 제 역할을 해낸다. 나는 대견스럽다는 듯 “아이고, 잘한다!”고 맞장구쳐준다. 물통에 물이 가득 차 있으면 ‘역시 대단하군!’이라며 흐뭇하게 바라본다.

제습기의 존재 이유는 습기를 빨아들이는 것이다. 건조한 계절을 지나 습한 시기가 덮치면 제습기는 구원투수처럼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며 가치를 인정받는다.

코로나가 잦아들고 오랜만에 무대에 섰을 때 나는 뮤지션으로서 살아 있음을 느꼈다. 나는 내 존재 이유를 무대에서 증명할 수 있었다. 27년 동안 당연하게 여겼던 무대와 관객들이 이렇게 소중하게 느껴지긴 처음이었다.

뮤지션은 무대 위에서 곡을 연주하고 노래하고 관객들에게 박수를 받을 때 비로소 본연의 가치를 인정받는다. 우산은 비를 피하고자 태어났고, 전구는 어둠을 밝히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렇게 누구에게나 존재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닐까?

나라는 존재는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돌이켜보면 영화 <모던 타임스>의 ‘떠돌이 찰리 채플린’처럼 사람들에게 위로와 웃음을 줄 수 있을 때 가장 행복했다. 그래서 이것이 나의 존재 이유가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아직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지 못했다고 해서 우울해할 필요는 없다. 잘하는 것이 없다고, 무엇을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겠다고 자책할 필요도 없다. 누가 알아주지 않을지언정 우리는 모두 고결하다.

우리는 모두 신의 숨결이기 때문이다.

길거리에 아무렇게나 피어 있는 들꽃도 누군가를 미소짓게 하는 어여쁜 한송이 꽃일 수도 있다. 그러니 거친 흙바닥이라도 열심히 뿌리를 내리고 빗물도 흠뻑 마시며 햇볕도 마음껏 쬐어야 한다.

정말 하기 싫은 일이지만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직장에 다녀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때로는 언제 운명의 바람이 바뀔지 모른다. 잭 런던의 책 <야성의 부름>에서는 따뜻한 샌프란시스코의 도련님 같던 개 ‘벅’이, 골드러시 때 추운 북극으로 ‘견신매매’를 당해 썰매를 끄는 고단한 신세가 된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결국 갖은 고초를 겪은 주인공 ‘벅’은 야성의 법칙을 깨닫고 오히려 존재의 의미를 깨닫는다. 팔려가지 않고 따뜻한 집에 있었다면 안전하고 여유로웠겠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역경을 극복한 덕분에 자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무덥고 습한 여름날 ‘제습멍’을 때리다 보니 시원한 북극까지 다녀왔다.

많은 사람이 퇴근하면 지쳐서 취미고 자기계발이고 할 체력과 여유가 없다고 한다. 그래도 한번쯤 쓸데없더라도 자신이 하고 싶은 걸 해보길 권해드린다. 생각해보면 돈 안 되는 게 가장 재미있는 것이다.

우리의 존재가 항상 빛날 수는 없다. 커튼이라는 존재도 뜨거운 태양을 가리기 위해 필요한 순간 펼쳐져야 빛을 발한다. 하지만 항상 펼쳐져 있다면 집 안에 빛이 들지 않아 이끼가 낄지도 모른다. 커튼이 필요한 순간을 위하여 있는 듯 없는 듯 구석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숨기며 때를 기다려야 한다. 뮤지션이 무대 위의 찬란한 순간을 위하여 연습하고 사색하듯이.

우울해지면 영혼의 제습기인 좋은 책을 읽고 좋은 음악을 듣자. 하여튼 습한 게 문제다. 몸이 무겁게 습해지면 운동을 해서 땀을 흘려버리자. 가끔 시원하게 펑펑 울어 버리자. 눈물이 나지 않으면 감동하자. 영혼이 건강한 땀을 흘린 것처럼 카타르시스를 느낄 것이다. 우리 자신을 헛되이 여기지 말자. 눈부신 순간들을 소중히 여기자.

우리는 모두 신의 숨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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