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살 '놀이중심' 교육하라던 정부, 돌연 '학교 가라'..부모들 황당

김유나 2022. 7. 31. 16:1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저희 가족 전체의 인생 계획이 흔들리고 있어요.” 2019년 2월생 아이를 키우는 A씨는 29일 발표된 정부의 학제개편 방안을 듣고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직장 문제로 최근 지방으로 이사 온 A씨는 2025년 말 파견근무가 끝나면 다시 서울 친정집 근처로 이사갈 계획이었다. 2026년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부모님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다. 하지만 정부의 학제개편 방안에 따르면 A씨의 아이는 당장 2025년에 초등학교에 입학해야 한다. A씨는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어린이집에 다닐 때보다 손이 더 많이 간다는 데 지금 있는 곳에선 육아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도 없고, 여기서 입학하면 중간에 전학을 가야 해 어찌 해야 할지 고민”이라고 토로했다. 

현재 어린이집에 다니는 아이는 내년에 근처 공립 유치원에 입소할 계획이었으나 이 계획에도 제동이 걸렸다. A씨는 “공립 유치원은 한글도 안 가르쳐주는데 6살 반에 다니다 갑자기 언니·오빠들과 학교에 가게 된다니 걱정이 돼 사립기관을 알아보고 있다. 몇달 뒤면 유치원 신청 기간이 돌아오는데 머리가 너무 아프다”며 “이렇게 중요한 사안을 갑자기 결정하는 정부의 태도에 화가 난다. 시위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갑작스럽게 취학연령 하향을 예고한 뒤 반대 여론이 거세지고 있다. 초등학교 입학에 맞춰 이사 등을 계획했던 부모들은 혼란에 빠진 가운데, 정부가 오랜 기간 유지해온 미취학 아동 교육과정과도 정면 배치되는 정책이란 지적이 나온다. 사회적인 파장이 큰 사안을 갑작스럽게 결정했다는 비판도 크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9일 오후 용산 대통령실에서 박순애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으로부터 업무보고를 받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놀이중심’ 강조하더니…‘빨리 교육해야 효과 커’

31일 교육부에 따르면 정부는 미취학 아동의 공평한 교육 기회 보장을 위해 2012년 만 3∼5세(한국 나이 5∼7세) 공통 교육내용인 ‘누리과정’을 도입했다. 현재 유치원과 어린이집에서는 누리과정에 따라 교육과정을 구성한다. 2019년 개정 누리교육의 가장 큰 특징은 이전보다 ‘놀이 중심’ 교육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누리과정 해설자료는 교사에게 ‘놀이중심 일과 편성’, ‘아이들의 놀이 흐름을 중단하지 말고 놀이시간을 충분히 운영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한글 교육도 놀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말과 글의 관계에 관심을 가지게 하는 것은 권장하지만, 한글 자음을 따라 쓰는 등 학습 위주의 교육은 금지한다. 유아 발달 단계상 철자교육은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 하는 것이 맞는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현재 공립 유치원은 대부분 한글·영어 교육을 하지 않고 있다.

누리과정은 또 ‘놀이 도중 화장실에 가는 것을 허용하는 등 일상생활이 융통성 있고 유아 주도적으로 이뤄지도록 할 것’, ‘실내에서도 유아의 신체 움직임을 지나치게 통제하지 말 것’을 권고한다. 수업시간 동안 자신의 자리에 앉아 수업을 듣는 초등학교의 교육과정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다. 

하지만 박순애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29일 취학연령 하향 계획을 발표하며 “영유아와 초등학교 시기가(성인기에 비해) 교육에 투자했을 때 효과가 16배 더 나온다는 연구결과가 있다”고 설명했다. 만 5세까지는 ‘놀이’가 중요하다고 주장해온 정부가 돌연 ‘빨리 교육해야 효과가 크다‘고 입장을 바꾼 셈이다. 2018년생, 2020년생 아이가 있는 B씨는 “부모들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누리과정에서 한글 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않는 것은 정부가 ‘한국 나이 7살은 교육보다 놀이가 필요한 시기’라고 인식하고 있던 것 아니냐”며 “누리과정은 이렇게 만들어놓고 갑자기 학교만 일찍 보내라고 하니 황당하다”고 말했다.

◆‘3년 뒤 도입 갑작스럽다’ 불만

학부모들은 정부의 계획이 갑작스럽고 빠르게 추진된다고 반발하고 있다. 학제개편은 이전 정부에서도 언급된 적 있긴 하지만, 본격 추진된 적도 없고 윤석열 대통령의 공약이나 국정과제에서도 등장한 적 없다. 정부는 2025년부터 단계적으로 취학연령을 내린다는 방침인데, 이대로라면 2019년 1∼3월생이 만 5세에 입학하는 ‘첫 세대’가 된다. 아이가 2019년 3월생인 C씨는 “지금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만 2세반이고, 한살 많은 아이와는 교육과정이 다른데 2년 반 뒤 갑자기 동급생이 된다는 것 아니냐“며 “장기적으로 계획을 세워서 그 아이들은 어린이집 입소 시기부터 한 반을 만드는 등 순차적으로 적응되게 해야지 갑자기 학교에 같이 가라고 하니 어이가 없다”고 꼬집었다.

또 다른 2019년 2월생 학부모도 “첫해에는 한반 20명 중 4∼5명만 7살(만 5세)일텐데 언니·오빠들 사이에서 알아서 살아남으라는 건가”라며 “예전에 ‘이해찬 1세대’란 말이 해당 연령을 조롱하는 의미로 쓰였듯 우리 아이들은 ‘박순애 세대’로 불리고 성인이 될 때 계속 영향을 미칠 것 같다. 교육은 백년지대계라더니 당장 3년 뒤 정책을 이렇게 발표하는 게 황당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 29일 서울 시내 한 초등학교 모습.   연합뉴스
정부는 “공교육 편입 시기를 당겨 교육의 사회적 격차를 해소하겠다”고 밝혔지만, 오히려 교육 격차가 더 커질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이모(39)씨는 “한글을 모르는 상태로 학교에 가면 아이가 힘들다는 인식이 커서 대부분 입학 전 한글 공부를 하는데, 학교에 빨리 간다면 한글 공부 시작 시기도 더 빨라지고 영유아 사교육이 늘어날 것”이라며 “집에서 잘 못 봐주는 아이들과 격차가 더 커질 것 같다”고 말했다. 9살·5살 자녀가 있는 최모(42)씨도 “학교는 하교 시간도 빠르고 방학도 길어서 돌봄은 오히려 유치원·어린이집이 잘돼있다. 맞벌이 가정 아이는 학교에 다니는 순간 ‘학원 돌리기’가 시작되는데 가정환경이 어려운 아이들은 혼자 집을 지켜야 한다”며 “공교육에서 아이들을 돌봐주지도 않으면서 공교육에 일찍 편입시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라고 반문했다.

시민단체 사교육걱정없는세상도 “학부모들이 의무교육이 시작되는 시점을 본격적인 학습 시기로 인지해 조기 취학에 대비할 것”이라며 “과잉 사교육 열풍이란 사회적 문제가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 등은 ‘만 5세 초등취학 저지를 위한 범국민 연대’를 결성하고 8월1일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철회 촉구 기자회견을 연다는 방침이다.

◆국제적인 추세와도 안 맞아

취학연령 하향은 국제적인 추세와 맞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2019년 기준 38개 회원국 중 만 5세 이하에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국가는 4곳(호주·뉴질랜드·아일랜드·영국) 뿐이다. 한국 등 26개국(68.4%)은 만 6세에 입학하고, 핀란드와 스웨덴 등 8개국은 만 7세다. 다만 프랑스, 헝가리, 이스라엘, 멕시코 등은 초등학교 전 유치원 과정부터 의무교육으로 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공교육 편입을 빨리 위한 목적이라면 초등학교 입학을 당기는 것보다 유치원 1년 과정을 의무교육으로 만드는 식의 방안이 더 효과적이란 의견도 나온다. 정의당도 정책논평을 통해 “출발 선상의 교육 격차를 해소할 요량이면 유아 1년 또는 3년 무상의무교육이 더 적절하다”고 제언했다.

김유나 기자 yoo@segye.com

Copyright © 세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