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의부 창립' 강제하·이웅해·백남준·최명수 선생.. 8월의 독립운동가

박응진 기자 2022. 7. 31.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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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훈처 "항일무장 세력 하나로 묶는 데 기여.. 국권회복 노력"
(국가보훈처 제공) ⓒ 뉴스1

(서울=뉴스1) 박응진 기자 = 일제강점기 '대한통의부' 창립에 기여한 강제하·이웅해·백남준·최명수 선생이 올해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됐다.

국가보훈처는 31일 이들 선생에 대해 "100년 전 남만주에서 항일무장 세력을 하나로 묶은 통의부 창립에 기여하고 일제강점기 국권회복을 위해 끝까지 위국 헌신했다"며 이같이 밝혔다.

보훈처에 따르면 '대한통의부'는 1922년 당시 남만주에 있던 서로군정서, 대한독립군, 대한광복군총영 등 17개 독립운동 단체 대표 50여명이 모여 독립군기지 재건과 항일무장투쟁을 위해 만든 통합단체다.

강 선생은 1891년 평안북도 창성 출신으로 1919년 '창성 3·1만세운동'을 주도했으며, 일제의 주요 시위 인물 검거를 피해 남만주로 망명했다.

(국가보훈처 제공) ⓒ 뉴스1

그는 남만주에서 조직한 '대한독립청년단' 부단장을 맡아 독립군을 국내로 파견해 일제 기관을 파괴하거나 군자금을 모집해 중국 상하이(上海)에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로 보냈다. 또 그는 1920년 10월엔 독립청년단장이 돼 무장활동을 지휘했다.

강 선생은 1922년 8월 '남만한족통일회의'에 참석해 통의부 탄생에 기여했으며, 독립군 생계를 책임지는 권업부장을 비롯해 교통위원, 재무부장 등을 맡아 통의부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이후 그는 1924년 11월 통의부·광정단 등 7개 단체를 통합한 '정의부'가 창립되자, 교육기관인 '화성의숙'의 재무를 담당하는 등 최고위 간부로 활동했다.

이 선생은 1878년 함경남도 상기천면 출신으로 국내에서 의병에 가담하다 1910년 '경술국치'를 계기로 서간도로 망명했다.

이 선생은 1919년 4월 항일무장 기반 조성을 위해 독립군단인 '대한독립단'을 조직했고, 사법부장으로 선임된 뒤 만주와 국내에 다수의 지단(支團)·지부(支部)를 설치, 독립단 소속 대한독립군의 항일운동을 지원했다.

이 선생 1922년 동지 22명과 함께 대한독립군 대표로 남만한족통일회의에 참석, 통의부 출범에 참여했고 통의부 민사·재무부장을 역임했다. 그러나 그는 1928년 12월 일제 경찰에 체포돼 국내로 압송된 뒤 징역 8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국가보훈처 제공)ⓒ 뉴스1

1885년 평안북도 운산에서 태어난 백 선생은 신민회원으로 활동했다. 1911년 일제가 신민회 탄압을 위해 조작한 '데라우치(寺內) 암살사건'에 연루·체포돼 1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던 그는 2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뒤 남만주로 망명했다.

백 선생은 1919년 3월 독립군단 '한교공회'을 설립해 부회장으로 활동했고, 1920년 독립운동가 오동진이 광복군총영장을 맡은 부대에서 군사·참모부장을 맡아 특수작전을 이끌었다.

백 선생은 1922년 남만한족통일회의에서 '광복군총영' 대표로 참가해 통의부 창립에 공헌했고, 중앙행정위원으로 활동했다.

백 선생은 이후 정의부 사법기관인 '검판청' 검판장으로 선임되는가 하면 '유한농업공사'를 설립해 만주 한인사회의 산업발전과 생계유지에 힘썼다.

그러나 그 역시 1932년 일제에 붙잡혀 국내로 압송됐고, 징역 5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국가보훈처 제공 )ⓒ 뉴스1

1881년 충북 청원군 출신의 최 선생도 1910년 경술국치 뒤 서간도로 망명한 인사다. 그는 1912년 현지에서 조직된 '부민단'에서 단총(團總)으로 선임됐다.

최 선생은 신흥무관학교, 백서농장 등도 만들어 독립군 양성에 앞장섰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당시 서간도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본격적인 무장활동을 위해 부민단을 '한족회'로 개편했고, 최 선생은 한족회 검무국장·헌병과장을 겸임했다. 그는 통의부 검무국장과 정의부 자치분과 위원, 검리장으로도 활동했다.

1920년대 후반 만주를 떠나 상하이에서 활동한 최 선생은 1934년 12월 일본 경찰에 검거돼 국내로 압송됐으며, 징역 2년6개월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강제하·이웅해·백남준 선생에겐 각각 1995·2010·2014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최 선생에겐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pej86@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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