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해서 투자 못하겠다"..'3高'에 몸 사리는 기업들
[편집자주] 윤석열정부가 민간 주도 성장을 천명했지만, 정작 민간의 소비와 수출, 투자 모두 흔들리고 있다. 고물가 속에 금리가 뛰고 자산가격이 떨어지면서 소비가 얼어붙고 있다. 글로벌 경기둔화와 공급망 불안에 엔저와 고금리까지 겹치면서 수출과 투자마저 위축되는 복합위기가 우려된다. 이 '퍼펙트스톰'을 막을 방법을 찾아본다.
미국 애플은 내년 일부 사업부문의 연구개발과 채용 예산을 줄이기로 했다. 매년 5~10% 인원을 늘려왔던 것과 달리 내년에는 일부 부서의 인원을 늘리지 않기로 했다. 마이크로소프트(MS)와 테슬라, 넷플릭스는 올해 이미 감원에 들어갔다.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세계 1위 업체 대만 TSMC도 시설투자액을 당초 밝혔던 400억∼440억달러(52조4000억~57조7000억원)에서 400억달러로 줄였다.
고물가·고환율·고금리 등 '3고(高) 악재'의 여파다. 전 세계적인 'R(경기침체·Recession)의 공포'에 대비해 선제적으로 허리띠를 졸라매는 긴축 경영이 현실화하는 모양새다. 경기의 첨병 역할을 하는 기업들의 긴축 움직임이 가시화하면서 '경기 침체→투자 보류→고용 감소→경기 침체'의 악순환에 속도가 붙을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진다. '3고'의 여파는 미래 먹거리를 찾는 기업들의 M&A(인수합병)와 IPO(기업공개·상장) 시장도 비켜가지 않는 분위기다. 전 세계적으로 투자·금융시장에서 돈줄이 말라간다는 얘기가 나온다.
국내 기업들의 상황도 다르지 않다. SK하이닉스가 4조3000억원을 투자해 충북 청주 테크노폴리스 산업단지 내 43만3000㎡ 부지에 신규 반도체 공장을 증설하려던 계획을 지난달 29일 이사회에서 보류했다. LG에너지솔루션 역시 미국 배터리 공장 투자 건을 다시 들여다보고 있다. 1조7000억원을 투자해 애리조나주에 원통형 배터리 공장 건설을 지어 2024년 제품을 양산할 계획이었지만 최근 경제 환경 악화에 따른 투자비 급등을 이유로 재검토에 들어갔다. 사실상의 투자 보류다.
서지용 상명대 경영학과 교수는 "기업 여건이 악화하면서 투자가 줄어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상호 전국경제인연합회 경제정책팀장은 "필수 소비재를 제외하곤 전반적으로 상황이 비슷할 것"이라며 "물가가 급등해 수출 수요가 준 데다 원재료비 압박에 제품 가격을 올리면 소비 수요가 줄어드니 투자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국내 10대 그룹이 지난 5월 발표한 향후 5년간 1000조원대 투자 계획에서도 깊은 고민이 엿보인다. 익명을 요구한 재계 관계자는 "지난 5월 투자 계획 발표 당시와 상황이 또 달라졌다"며 "하반기 이후 상황을 예측하기 어려워 시기를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그룹 관계자도 "어렵긴 어렵다"며 "올해는 계획대로 가더라도 내년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고 밝혔다.
전경련이 국내 매출 상위 500대 기업 가운데 100곳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해 지난달 30일 발표한 '2022년 하반기 국내 투자 계획' 결과에 따르면 응답기업의 28%가 올 하반기 투자를 상반기보다 줄이겠다고 답했다. 기업 4곳 중 3곳(75%)은 투자가 다시 활성화할 시기를 일러야 내년 이후로 예상했다. 2024년 이후(7%)나 기약이 없다(10%)고 답한 곳도 17%에 달했다.
이미 상반기 투자도 예년보다 크게 줄어든 상황이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올 상반기 시설투자·유형자산취득을 공시한 상장사가 87곳, 투자액은 8조3032억원으로 지난해 상반기(12조8136억원)보다 35.2% 줄었다. 공시 외 상황으로 삼성전자의 올 상반기 시설투자 규모는 20조3000억원으로 지난해 상반기(23조3000억원)보다 12.9% 줄었다. 삼성전자의 상반기 기준 시설투자 규모가 줄어든 것은 2017~2018년 반도체 슈퍼호황 직후였던 2019년 이후 3년만이다.
잔뜩 위축된 기업들의 상황은 미래성장동력 투자의 대표적인 분야인 M&A 현황에서도 드러난다.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올 상반기 상장법인 가운데 MA&를 완료했거나 진행 중인 기업은 51곳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55개사, 지난해 하반기 93개사보다 대폭 줄었다. 금융정보업체 딜로직이 집계한 국내 M&A 규모도 올 상반기 39조8000억원으로 지난해 상반기 47조5000억원보다 16% 줄었다. 코로나19 사태의 타격이 컸던 2020년을 제외하면 최근 5년 동안 가장 낮은 수준이다.
국내만의 문제가 아니다. 글로벌 시장에서도 올 상반기 M&A 시장 규모가 2조3000억달러(약 3012조원)로 지난해 상반기 3조달러보다 20% 이상 줄었다.
M&A업계에서는 지난해와 사뭇 달라진 분위기를 하소연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한 사모펀드(PEF) 운용사 관계자는 "유가와 원자재 가격 상승 등의 여파로 경영여건이 악화하고 기업가치가 하락하면서 관망세가 이어지는 분위기"라며 "그동안 영업손실이 나도 성장성으로 기업가치를 정당화했던 분위기가 고금리 시대에도 맞냐는 쪽으로 돌아서고 있는 데다 금리가 급등하면서 조달비용 부담까지 커진 상황"이라고 전했다.
금리 인상에 따른 자금시장 가뭄 여파는 자금조달의 대표적인 시장인 IPO 시장에도 직격탄이 된 모양새다. 올해 IPO 대어로 평가받았던 현대오일뱅크, 현대엔지니어링, SK쉴더스, 원스토어가 줄줄이 상장을 철회했다. 현대오일뱅크는 수요예측조차 포기하고 상장철회를 결정했고 나머지 기업은 IPO에 나섰다가 수요예측에서 흥행 참패한 뒤 물러섰다.
전문가들은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미래 먹거리에 집중하는 이른바 '타깃 투자'가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대기업을 중심으로 실제 사례도 눈에 띈다. SK케미칼은 폐플라스틱 재활용에, SK온은 배터리 생산시설에 신규 투자를 결정했다. LG에너지솔루션도 폐배터리 재활용 사업을 두고 중국기업과 합작법인 설립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맺었다. 포스코는 수요 감소가 예상되는 철강사업은 재무건전성을 높이면서 액화천연가스 부문에 힘을 더 실을 예정이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실장은 "기존 주력 산업에서 대규모 투자는 유보하는 대신 탄소중립 전환이나 디지털 전환 같은 새로운 신성장 동력 부분에 대한 투자에 집중하면서 미래 준비에 나서는 게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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