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에 고추장에 마른 멸치, 먹다가 눈물이 났다

박찬일 2022. 7. 31. 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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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의 '밥 먹다가 울컥'] 이탈리아에서 음식이 안 맞아 고생할 때 소포 하나가 도착했다. 고추장과 마른 멸치였다. 고추장 두 숟갈과 멸치 몇 개를 넣고 올리브유로 밥을 비볐다. 먹는데 눈물이 났다.
유럽 등 외국살이에서는 먹는 일이 제일 힘들다.ⓒ최갑수 작가

외국살이 해본 사람들은 대략 동의할 텐데, 먹는 일이 제일 힘들다. 한국에 사는 사람들보다 훨씬 심각하다. 거긴 ‘마켓컬리’도 ‘배달의민족’도 없다. 아는 후배가 하나 있다. 젊었을 때 무슨 기계 수입하는 회사에 들어갔는데 유럽으로 발령이 났다. 한국에 수입할 기계 수리법과 관리를 배우는 파견근무였다. 그는 닭을 아주 좋아했다. 그 옛날, 압력계를 달아서 튀기는 프라이드치킨 초창기에는 앉은자리에서 닭 세 마리를 먹어치워 주인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월급 40만원인가 할 때였을 텐데 치킨과 생맥주 값만 5만원이 넘게 나왔다.

지금도 그렇지만 30년 전쯤 유럽에 무슨 프라이드치킨 가게가 있었겠는가. 혈중 치킨지수가 낮아질 무렵, 참지 못한 그는 닭을 직접 튀겨 먹기로 했다고 한다. 정육점 아저씨한테 튀김용 닭을 추천해달라고 잘 말했으면 될 일인데, 눈에 닭이 보이기에 얼른 토막 내 사와서 튀겨 먹었다.

“어쩐지 닭이 비싼데 좀 작고 그렇더라.” 녀석이 고른 건 비둘기였다. 비둘기 고기는 닭보다 몇 배는 비싸고 고급 요릿집에서 주로 판다. 특유의 묘한 야생의 냄새가 나는데 이걸 그들은 미식의 지표로 본다. 평소 먹는 닭이나 오리와 다른 풍취. 미식이란 원래 일상의 맛과 다른 것을 의미한다. 비둘기 치킨을 먹은 최초의 한국인이 그 후배다.

그 녀석이 유럽에서 일으킨 사건 사고가 한둘이 아니었다. 처음 떠날 때 그의 짐에는 일반미 두 말이 실려 있었다. ‘유럽 사람들은 다 빵만 먹는다, 그러니 쌀이 없을 거다. 지고 가자.’ 이런 생각으로 내린 결론이었다. 쌀이 다 떨어지고 그가 시장에서 산 쌀은 향료 냄새 같은 게 나는 인도 쌀이었다고 한다. 찰기가 없어서 불면 훅 날아가는 쌀로 밥을 지어 가져간 ‘3분 카레’를 데워 덮어 먹는데, 신세가 처량해서 울고 싶어지더란다. 그 한심한 옛날 얘기를 듣던 친구가 한마디했다.

“야, 인도 쌀에 대한 모욕이다 그건. 인도 밥에 3분 카레라니.”

좀 다른 이야기인데, 1970년대 우리가 쌀밥을 먹을 수 있었던 건 저런 동남아 쌀 덕이었다. 한국 과학자들이 개발한 통일벼는 동남아 벼와 한국 벼를 유전적으로 조합한 것이다. 수확은 훨씬 많아서 식량 부족에 해결책은 되었지만, 묘하게 쌀에 찰기가 부족했다. 핏줄은 못 속이는 법이다.

요즘 유럽에 취사도 겸하는 레지던스를 얻어 여행하는 사람들이 많다. 혹시라도 한국 식품점이 없는 지역에서 밥맛이 한국 쌀과 비슷한 걸 구하려는 분들은, 우선 중국 식품점에 가시라. 중국 쌀 중에서 낟알이 통통한 걸 고르면 한국 쌀과 진배없다. 중국 식품점도 없으면 일반 마트에서 이탈리아 쌀을 고르면 되는데 여기에도 팁이 있다. 리소토용 쌀은 한국 쌀과 제법 비슷하지만 길쭉하고 윤기도 적다. 수프용으로 나오는 ‘슈퍼파인(super fine)’을 고르면 ‘아키바레’니 ‘고시히카리’니 하는 품종 저리 가라 할 만큼 끝내주는 밥맛을 보장한다. 이탈리아어로는 ‘super fino’이라고 적혀 있다. 한국 쌀보다 맛있다고 귀국할 때 한 보따리 사가는 사람들도 꽤 많다.

어떤 서양 요리든 한식화하는 고추장의 힘

이탈리아 쌀에 관해서는 웃기는 기억도 많다. 밥 지으려고 리소토용 쌀을 샀는데 색이 노랗고, 그 왜 있잖은가 수영장 염소 소독약 냄새, 그게 풍기는 게 아닌가. 알고 보니 일종의 인스턴트 사프란 리소토였다. 사프란에선 염소 소독약 냄새와 비슷한 향이 난다. 쌀 진열대에는 사프란·버섯·트러플을 넣은 즉석조리 리소토를 판다. 한국에서 판다면, 1인분에 3만~4만원 이상 받아야 하는 고급 재료 리소토다. 이걸로 밥 지어서 고추장에 비벼 먹었다. 소독약 냄새 나는 고추장비빔밥 맛을 상상해보라.

이탈리아 유학 시절 ‘그 녀석’이 보내준 고추장, 멸치, 올리브유에 리소토용 쌀을 비벼 먹곤 했다.ⓒ박찬일 제공

고추장은 외국살이 하는 사람들에게 유용하다. 안 상하지, 값도 싸지, 매운맛에 대한 갈망도 해결하지, 다용도로 쓴다. 여행자들도 사 가지고 나간다. 미처 준비 못한 사람들은 국적기 승무원들에게 몇 개 얻어 가기도 한다. 아예 그 용도로 항공사는 서비스 삼아 미리 넉넉히 싣는다. 빵에 발라 먹어도 한 끼 때울 수 있고(마요네즈랑 섞으면 먹을 만하다), 온갖 요리에 제 몫을 다 한다. 어떤 서양 요리든 한식화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나도 이탈리아에서 아주 고생하며 요리를 배울 때 제일 힘든 게 음식이었다. 매일 오일에 버무린 스파게티와 송아지고기를 먹었는데 이것도 하루 이틀이지 사람이 살 수가 없었다. 송아지고기는 싸고 간단하게 요리할 수 있어서 주인이 매일 주다시피 했다. 동네에 한식당은커녕 중국 식품점도 없었다. 음식이 안 맞으니, 안 그래도 마른 몸이 피골이 상접한 상태로 가고 있었다. 매일 열 몇 시간씩 일하지, 제대로 못 먹지(송아지고기밖에 먹을 게 없었다), 일주일에 하루 쉬는 날은 시체처럼 누워 있었다. 삐걱거리는 싸구려 침대 밑에 전갈과 도마뱀이 돌아다니는 방에서.

그렇게 지쳐가고 있을 때인데, 가게에 소포 하나가 도착했다. 열어보니 고추장 1㎏과 마른 멸치였다. 어떻게 알았는지 서울의 그 녀석이 보내준 것이었다. 운송료가 고추장과 멸치 값의 열 배는 들었을, 지구를 반 바퀴 돌다시피 해서 녀석의 마음이 왔다. 밥을 지어(앞에서 얘기한 슈퍼파인 쌀을 썼다) 고추장 두 숟갈쯤에 멸치 몇 개를 부수어 넣고 최상급 엑스트라버진 올리브유로 비볐다. 먹는데 눈물이 났다.

정작 한국에 와서 진짜로 크게 울어버리는 일이 생겼다. 녀석이 젊은 나이에 갑자기 저세상으로 떠나버린 것이었다. 영정 안에서 웃고 있는 후배를 보니 심장이 턱 막혔다. 요즘도 마트에서 고추장을 볼 때마다 내게 보내준 것과 똑같은, ‘해찬들’ 빨간 상표 고추장을 볼 때마다 나는 발바닥이 쑤욱 꺼지는 것 같다. 사람은 기왕이면 오래 살아야 한다. 주변 사람들에게 나쁜 기억도 막 쌓아서 나중에 죽어서 아무런 미련도 갖지 않게 하는 게 좋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며칠 전, 이 글을 쓰려고 녀석과의 추억이 있는 장소를 휘 돌아보았다. 서울 청파동의 포대포라는 돼지껍데기 집이다. 좁은 자리에 다닥다닥 앉아서 피어나는 연기에 눈물을 질금거리며 껍데기를 구웠다. 돼지껍데기처럼 질기게 좀 오래 살지, 뭐가 급한지 그리 가버렸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박찬일 (셰프)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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