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참 괜찮은 제라늄 친구
친구 쩡아가 이사하면서 우리는 만나기 적합한 장소를 찾기 위해 고심해왔다. 처음에는 자주 그랬듯 ㅂ역 근처에서 만났는데 각자의 본가가 있는 곳이라 마음이 불편했다. 지척에 부모님이 있으니 자유롭지 않은 느낌, 얼른 집에 가 뭔가 효를 행해야 할 듯한 책임감. 우리는 마흔이 훌쩍 넘었는데도 그런 부담감에서 벗어나지 못해 웬만하면 ㅂ역에서는 만나지 말자며 우회적인 회피를 택했다. 적당한 중간 지점을 찾느라 당일 아침까지 장소를 이리저리 바꾼 결과 사당으로 결정했고 마침내 우리는 정오가 되기도 전 한 타이 음식점에서 마주앉았다.
메뉴를 결정하고 맥주도 함께 시켰는데 쩡아가 열두 시도 안 됐는데 맥주를 먹을 수 있다니! 하면서 감격했다. 친구가 아이를 낳으면서 자연스레 만나는 시간이나 헤어져야 하는 때는 친구에게 맞춰졌다. 더 정확히는 친구의 딸인 다정한 어린이 연이의 스케줄과 컨디션에. 우리는 종종 셋이 만났지만 그날 친구는 “엄마도 이제 친구 좀 만나자!” 하고 강력히 어필해 배웅을 받으며 나왔다고 했다.
식사를 하던 친구는 아 맞다, 하면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그러고는 식물 사진을 보여주었다. 봄에 만났을 때 처음으로 화분을 들였다고 사진을 보여준 게 생각났다. 그때 보자마자 “제라늄이네” 하고 알아맞히자 “역시 넌 식물 박사야” 하고 칭찬했고 괜히 으쓱했던 것도. 친구는 저번에 알려준 재료들로 분갈이를 시도해봤지만 결국 엄두가 안 나서 가게에 맡겼다고 했다. 과연 제라늄은 베이지색 토분에 자갈까지 얹어져 멋지게 분갈이가 되어 있었다. 나는 처음 해보는 사람에게는 분갈이가 어려운 일일 수 있는데 괜히 부담을 줬구나 생각했고 이내 잘했다고, 예쁘다고 말해주었다. 쩡아는 내 충고대로 꽃이 지면 꽃대를 바로 잘라주고 잎 정리도 해줬는데 아직 새 꽃이 피지 않는다고 걱정했다. 나는 분갈이를 한 뒤라 아직 적응하는 데 시간이 필요해서일 거라고 답해주었다. 우리집 제라늄 중에도 위치를 좀 옮겼더니 꽃대를 멈추고 상황을 살피는 녀석이 있다고.
“역시 시간이 필요하구나.”
친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실은 식물을 더 샀다고 고백했다. 또 사진을 보여줬는데 금전수와 몬스테라였다. 그리고 금전수에 물방울이 생긴다며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를 물었고 나는 밤사이 뿌리에서부터 올라온 수분이 잎 가장자리에 맺히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신경 쓸 것 없다고 안심시켰다. 그러면서도 혹시 물을 자주 주고 있나 싶어 금전수는 절대 물을 많이 주면 안 되는 식물이라고 덧붙였는데, 친구는 3주에 한번으로 정확한 주기를 알고 있었다.
“연이가 반려동물을 기르고 싶어 해서 우선 식물부터 보살펴보라고 시작했는데, 식물이 있으니까 참 좋더라.”
나는 어디를 가면 식물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하지 말아야지 다짐하는 편이지만 친구가 그렇게 공감해주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얼마 전 에어컨 청소를 하느라 그 주변의 식물들을 모두 치워놓았는데, 그러고 나니 집이 순식간에 삭막해지더라, 식물이 얼마나 실내 환경에 중요한지 톡톡히 깨닫게 되더라, 그래서 내가 같이 사는 사람에게 내 덕에 얼마나 훌륭한 환경을 누리고 있는지 늘 생각하라고 생색내게 되더라. 네가 금전수와 함께 산 몬스테라는 정말 무럭무럭 자라는 친구라 키우는 보람이 상당할 거야, 아마 지금 잎이 좀 찢어진 건 다 잊어버릴 정도로 어마어마한 새잎 세례를 받게 될걸? 그러다 나는 물꽂이를 해둔 몇몇 식물들을 떠올렸다. 가지치기한 줄기들이 아까워 뿌리를 냈더니 개체 수가 불어나 있었고 그런 식물들이 내 좁은 가드닝 환경을 더욱 비좁게 하고 있었다.
원한다면 그 식물들을 쩡아에게 나눠주고 싶었지만 그렇게 섣불리 ‘영업’했다가는 이제 막 시작된 가드닝에 대한 관심이 사그라들 수 있으므로 나는 속으로 침착해야 한다고 다짐했다. 잘되면 이제 우리는 사당이 아니라 양재 화훼단지에서 만나 같이 식물을 보러 다닐 수도 있으니까. 나는 우리집 식물 중 가장 잎색이 아름다운 ‘베멜하’(베루코섬과 멜라노크리섬의 하이브리드종)를 보여주며 한번 키워보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친구는 멋진 식물이라며 마음에 들어했고 반색한 나는 그렇다면 다음에 당장 화분에 심어 가져오겠다고 나섰다.
“좋아, 그런데 천천히. 시간을 두고 천천히 줘.”
“그래, 그럴게. 내가 잘 순화시켜 놓을게.”
제라늄을 통해서 본 내 친구는 알고 있던 것보다 더 신중하고 살아 있는 것에 마음을 쓰는 사람이었다. 차까지 맛있게 마시고 일어서는데 친구가 봉투를 하나 내밀었다. 얼마 전 엄마 칠순이라 가족들끼리 식사했다고 한 말을 기억한 것이었다. 거기에는 축하의 말과 함께 내 오랜 친구 쩡아가 드린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그날 친구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는데 아주 오래된 장면이 떠올랐다. 사실 우리의 아지트나 다름없던 ㅂ역 근처를 돌아다니다가 쇼핑센터 에스컬레이터에서 우연히 쩡아의 어머니를 만난 일이었다. 그날 어머니는 “맨날 이렇게 둘이서만 놀면 어떡해” 하는 농담을 하셨고 그 말에 우리가 하하하하 웃었던 것을. 그렇게 둘이 노는 것이 가장 재미있었던 우리는 시간이 흘러 이런 사람들이 되었다. ‘이런’이라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삶의 다양한 층위에 대해 알게 된 사람들이.
언젠가부터 우리는 나중에 꼭 한동네에 살자고 다짐해왔다. 이십대 이후로는 한번도 같은 도시에 있지 못했지만 그래도 할머니가 되면 ‘비 오는 날 부친 부침개가 식지 않을 거리’에 가까이 살자고. 우중에는 부침개지, 하는 대화를 나누다가 나온 말이었다. 처음에는 낭만적이고 재미있다고만 여겼던 그 말은 이제 떠올리면 든든하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최종의 미래가 되었다. 거기다 일년 내내 꽃을 피우는 제라늄들과 금전수와 친구네 집으로 잘 옮겨가 무럭무럭 자란 ‘베멜하’까지 있다면 더욱 괜찮을 것이다. 그렇게 보살펴야 할 것들을 보살피며 나이 들어간 우리는 낮술보다도 이른 ‘아침 술’을 즐기는 참 괜찮은 할머니들이 돼 있을 것이다.
김금희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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